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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라!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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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옷자락을 붙들라! (막 5:25-34)


오늘 저는 특별한 그림 하나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제리코(Gericaut Theodore)의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작품입니다.  프랑스 배인 메두사호는 1816년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서 필사의 구조 작전을 펼칩니다.  파도치는 바다를 표류하며 굶주림과 병마, 갈증과 악천후를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죽은 동료들의 인육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선원과 승객 149명 중에 겨우 15명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실화를 소재로 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잘 보십시오.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습니다.  돛을 단 배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배에 탄 사람들의 모습이 아주 극명하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터번을 쓰고 돛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좌측 삼각형을 이루는 절망의 무리들과 우측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고 필사의 몸부림을 하는 무리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좌측에 있는 절망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거센 파도를 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모두가 누워버렸습니다.  결국 시체가 되어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측에 있는 희망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 멀리서 지나가는 배 한 척을 발견하고 물통에 올라가 자신의 옷을 벗어 흔들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일어서서 손을 내밀어 흔들어 봅니다.

제리코는 뗏목에 탄 사람들이 표류 끝에 구조를 받게 되는 순간의 환희를 캔버스에 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이 인생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아픔과 질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런 것들로 인하여 점점 깊어만 가는 상처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저마다 풍랑에 흔들거리는 메두사의 뗏목을 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벌떡 일어나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배를 향해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돛단배를 향해 소리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구원의 환희를 맛보고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헌신과 섬김의 일을 하셔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대 속에서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무엇으로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을까?  돈으로 줄 수 있을까?  건강으로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재물로 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정말로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유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내 자녀들에게, 우리의 후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뭔가 그 믿음의 유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후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올바른 믿음의 유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자유의 삶을 우리 자자손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그런 조상이 되셔야 합니다.  내 자녀들과 후대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증거될 수 있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겨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 믿음의 유산 밖에는 물려줄 것이 없다.  내가 평생 붙잡았던 이 믿음을 너희들도 붙잡고 살아라."

오늘 주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리석은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색한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음의 결단입니다.  내가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한 번 믿어보리라.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해 보리라.  헌신의 열정을 회복해 보리라.

기억하십시오.  결단은 모든 기적의 첫걸음입니다.  결단 없이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단은 모든 축복의 첫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냥 앉았다가 가지 마시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결단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달라지리라.  나가서 마음이 무너지더라도 일단 여기에서 달라지리라고 결단을 하고 나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자의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본 듯 현대인들의 초상처럼 등장하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 12년간 혈루증으로 앓던 이름 없는 한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서 고통의 정체를 발견하고 나아가서는 치유와 회복의 비밀을 깨닫고 평안과 축복의 땅으로 달려가는 복된 말씀을 이 아침에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이 여인은 12년간 불치병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재산과 집을 잃고 희망을 가질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원선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마지막 희망인 구원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른 믿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의 손을 거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그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의 손을 거두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이 있는 마가복음 5장 21절부터 43절에는 두 가지의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료된 사건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두 번째 치유사건, 즉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낫게 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묘하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기 딸이 거의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을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형편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짧은 구절 속에는 그 동안 이 여인이 안고 살아왔던 온갖 아픔이 함축적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이라는 부인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병을 하혈증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성병이나 자궁암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혈증이라고 했을 때, 한 달 동안 계속해서 하혈을 한다고 해도 사람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아니고, 일년도 아니라 12년 동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전해지는 당시 의원들이 혈루증을 치료하던 치료법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타조알을 태워서 재를 베조각에 싸 몸에 지니고 다녔다.  흰 암나귀 대변 속에서 발견된 보리를 먹으면 효험이 있다."  이런 터무니없는 치료법의 실험 대상이 되어서 재산을 다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효험이 없이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강풍에 시달리던 메두사의 뗏목이 저 멀리 한 척의 배를 발견하듯 이 여인은 어느 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여간 어려움이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 여인에게는 외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서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환자들이 환부를 드러내 보이며 주님 앞에 치료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내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나병환자들도 썩어 문드러진 자신의 환부를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고쳐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끄러운 자신의 질병을 주님 앞에 이야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놓고 예수님께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뗏목의 좌측무리들처럼 포기하고 절망할만도 한데 이 여인은 그 마지막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인을 좌초시키려는 강풍과 폭우는 한 두 번,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혈루증은 종교적으로도 소외당한 질병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더구나 위생여건이 열악한 시대에 옷을 자주 갈아입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목욕이라도 자주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녀는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나병환자의 경우와 같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밥 한끼를 나누는 작은 행복조차도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인은 대게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병들고 나면 사람이 그리운 법인데 이 여인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행여 사람이 가까이 오면 입에다 손을 대고 "나는 부정하다.  타메 타메"를 외쳐야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고독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존경과 체통을 유지하고 살아가지만 속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의 아픔을 친정 식구에게 조차 드러낼 수 없는 아픔들, 친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아픔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 현대인들의 이야기요, 나의 이야기요,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몸이 되었습니다.  친구들도 한 사람 두 사람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외로운 여인은 이제 빈손입니다.  붙들만한 재산도 없었습니다.  함께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붙잡았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잡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이곳에 나온 것, 피묻은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있는 옷을 붙들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은 권력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자색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을 붙들기만 하면 거기에는 신비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옷은 신비한 옷입니다.  붙들면 구원을 받습니다.  붙들면 치료를 받습니다.  붙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됩니다.  붙들면 하늘 문이 열려지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손을 내 밀어 예수님의 옷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옷을 붙잡는 순간 여러분이 가슴에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풀려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은 피가 흐르는 이 여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만지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부정해집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제 예수님은 부정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정해 진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염된 것이 아니라 여인이 정결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으십시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254장)

사랑하는 여러분, 내 죄를 정결하게 해 주시는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힘 주시고 나의 추악함을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에 씻음을 받으십시오.  비록 누구처럼 환상을 본 적도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오늘 말씀을 듣고 찬송하는 중에 내 영혼이 주님의 옷깃에 접촉되기를 바라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의 옷깃에 접촉되면 내 육신이 안고 있는 질병들이 낫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고 있는 문제들이 다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서 믿음의 열정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여정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있지만 쉽게 감동하지를 않습니다.  과거처럼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나도 은혜를 받고 싶다.  나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싶다.  이런 간절함이 없습니다.  머리 속에는 지식으로 충만한데 그 지식이 목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은 앵무새처럼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뜨거움이 없습니다.  마치 영적 뇌졸중에 걸린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래서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설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믿어서는 자녀와 후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기 전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습 그대로 여러분의 자녀들과 그 후대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만 잘 믿어야 한다고 백날 말해도 아이들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천만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진실한 몸부림 있는 신앙이 아이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영적 흔적을 남겨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오늘 이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주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손을 내 밀어 주님의 보혈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오후에 갖게 되는 전교인 치유수양회에 보다 많은 교우들이 참석했으면 합니다.  참석해서 정말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몸이 피곤해서 참석 못하겠다, 시간이 없어서 참석 못하겠다.  이런 것들은 다 핑계입니다.  그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 마음에 사모하는 마음만 있다면 피곤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만 있다면 시간이 문제이겠습니까?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마십시오.  그런 모습은 아이들의 영혼에 독약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헌신의 자리에 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아이의 영혼을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빛나는 눈동자는 부지런히 이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말씀하셨고, 32절에서는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선생님, 사람이 밀고 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스쳐지나가다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겠지요.  그런데 누구를 찾는다는 말입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자 몰려왔습니다.  본문과 연관이 되는 21절에 보면 큰 무리가 모였다고 했습니다.  큰 무리라는 것은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등을 밟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주님 앞에서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뒤에서 밀고 밀리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옆에서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지만 의미 없는 부딪힘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제자들마저도 옹위하여 길을 가고 있었지만 저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아주 작은 기적조차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능력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혈류 근원이 말랐습니다.  12년 동안이나 괴롭혀 왔던 그 질긴 병이 나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이 땅에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있지만 그들 가운데 의미 없는 부딪힘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도 세계 각처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만 그 말씀이 의미 없이 메아리처럼 허공을 맴돌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지만 병이 나은 것은 그 여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지만 문제를 해결 받은 것은 그 여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우리들의 예배가 예수님과의 의미 있는 영적 부딪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분의 보혈의 피에 내 죄가 용서를 받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뜨거운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 묻습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이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전만 하더라도 이 여인이 외친 말은 "타메, 타메,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가기라도 하면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타메, 타메, 타메"라는 말 밖에 외칠 줄 모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옷자락에 감동된 이 여인, 주님의 옷에 접촉된 이 여인, 주님의 사랑에 접촉된 이 여인은 주님 앞에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타메, 나는 부정하다"를 외치는 것 아니라 "나는 깨끗해 졌다. 나는 나았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 입술의 언어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 절망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이 주님의 옷깃에 접촉되는 순간 내게 희망이 있다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서 가슴 속으로 울고 있던 사람이 주님의 진리에 접촉되는 순간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노래만 부르던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접촉되는 순간 하늘의 노래를 외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만 만졌음에도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예배의 시간마다 주님이 임하십니다.  주님이 지나가십니다.  그때는 주님을 붙드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만지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접촉하는 시간입니다.  그 은혜로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서 오늘 전교인치유수양회에 참석하십시오.  일단은 참석하고 보셔야 합니다.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시간에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무런 역사도 체험하지 못했던 못난 제자들처럼 의미 없는 대답을 주님 앞에 내놓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삶이 변화를 받았다고 하는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용서함을 받고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는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합시오.  믿음은 자기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인은 이 땅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그냥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딸아!"  예수님의 이 한마디는 이 여인을 가족으로 인정해 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여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가족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어떻게 버림받은 한 여인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날 수가 있었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붙든 그것은 바로 그녀의 믿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나음을 받고 구원받은 것도 그녀의 믿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처럼 어떤 육체의 질병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병이 나를 끊임없이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믿음으로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성경에서는 더 이상 이 여인의 삶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밖의 기록들은 이 여인의 본문 이후의 삶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에 보면 이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실 때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그 얼굴에 땀방울과 핏방울이 흘러내릴 때 무리들 가운데서 뛰어나와 자기 손수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핏방울을 닦아주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고 또 넘어질 때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해를 혈루증에 걸렸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았던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무리 속에서 뛰어나와 예수님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손수건에 뜻밖에도 거룩한 예수님의 얼굴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의 순간에 주님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일은 가족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를 가족으로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신 그 분 앞에 가족의 일원으로 성실을 다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말은 원문 그대로 보면 평안을 향하여 가라는 뜻입니다.  이제 평안의 땅으로 가라. 네 인생이 새로워졌느니라.  모든 문제, 모든 갈등, 모든 근심이 사라졌느니라.  평안의 땅, 축복의 땅, 승리의 땅, 약속의 땅으로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믿음으로 여러분의 손을 내미십시오.  메두사의 뗏목 좌측에 계시던 분들도 이 시간 주님의 구원선을 향해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오른손을 다 드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손을 만져 주시옵소서.  이 손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손바닥 끝에다가 여러분의 아픔을 다 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실으시기 바랍니다.  이 손으로 주님의 옷을, 피묻은 주님 옷자락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안의 땅으로 나아가십시다.  주님이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구원과 승리, 환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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