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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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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 (롬 12:1-2)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잘 살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잘 사는 것’은 흔히 말하듯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잘 사는 것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는데, 여기 ‘그 지으신 모든 것’ 안에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의 기쁨과 보람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은 인생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의미한 삶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룰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예배가 아닌 영적 예배를 원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교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예배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가 영적 예배이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일까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하신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을 바치라고 하지 않고 우리 몸을 바치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몸에 의해서 나타나는 행동을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형제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얼굴 표정을 통해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악수를 통해서,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그 사랑을 표현해야지, 그저 마음속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마음이 있으면 몸은 저절로 따라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데 힘씁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으면 몸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몸도 함께 더러워지고 악해 지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몸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데도 해치는 일이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15)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마음에 없는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 어귀나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기도는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우리의 헌신이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예배는 헛된 예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먼저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몸이 거룩한 제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이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어떻게 몸이 제사가 되는가? 눈으로 악한 것을 보지 아니하고, 그것으로 제물이 되게 하라. 혀로 더러운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제물이 되게 하라. 네 손으로 불법한 일을 행하지 말고 번제가 되게 하라. 그러나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행도 해야 한다. 손으로 구제하고, 입으로 찬송하고, 귀로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들어야 한다. 이는 제사는 부정한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는 다른 행위의 첫 열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손, 발, 입 그리고 다른 지체로 하나님에게 첫 열매가 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신이시므로 속되거나 허물이 있는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은 먼저 자신을 거룩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순종할 때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됩니다. 현대와 같이 생활이 다양하고 복잡한 때에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나가려면 불변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기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떠난 거룩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몸이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바쳤던 제물은 양이나 염소나 소를 죽인 것이었습니다. 성막에 가져올 때에는 활기차게 살아있어야 하지만,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는 그 짐승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 몸을 죽여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산 그대로 바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를 단번에 드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속죄를 위한 또 다른 제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을 통해서 죄악에 물든 죽은 행실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산 행실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이나 주중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 머물러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듣고 맞닥뜨리는 것들이 하나 같이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요즘은 대기가 오염되어서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고 외출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옷깃이나 소매가 더럽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니 알게 모르게 세속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석탄 하치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창문을 꼭 닫아두어도 미세한 석탄가루가 틈사이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집안 곳곳에 시커먼 가루가 묻어 있고, 세탁해서 널어놓은 옷가지도 더러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때 다니엘의 사례는 우리에게 귀한 본보기가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다니엘은 왕립학교의 생도로 선발되었습니다. 생도들은 삼년 동안 왕립학교에서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나중에 시험을 거쳐서 왕의 신하로 일하게 되므로 왕은 특별히 그들에게 자기가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동료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서 우상의 제물과 다를 바 없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 사실을 그들을 관리하는 환관장에 말하고 선처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환관장은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여 열흘 동안 채소와 물을 주어 시험해 본 후에, 다니엘과 세 친구의 안색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윤택한 것을 보고서 그들의 청원대로 삼년 동안 채소와 물을 주었습니다. 이로써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세속으로부터 자기들을 지킬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다니엘의 시대에 비해서 훨씬 더 세속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사회의 법과 제도와 관습이 다 세속화되어서 더 이상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무의미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경건한 말이나 행동을 좋아하지 않으며 속되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언행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깊이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락과 유흥으로 재미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가장 유망한 사업은 오락산업 곧 엔터테인먼트 산업일 뿐 아니라, 미래 산업의 성장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이나 외딴 섬에 가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믿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니엘이 보여준 것과 같은 결단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리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결단은 그저 편한 마음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과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고충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그 같은 생각이나 노력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로 끝나고 말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갈등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편을 택합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봉착한 성도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우리를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요? 

본질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속의 영향력을 물리치고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면 이를 해결할 방도는 없는 것일까요? 본문에 이르기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향으로 변할 리는 만무합니다. 이 세상은 내일은 오늘보다 한층 더 타락할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변화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것을 좋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면 이전에 그토록 좋아하던 것이 그만 싫어집니다. 이전에 귀하게 여겼던 것이 이제 보니 무가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도 나는 그것을 가까이 하기 싫고 보기도 싫다면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겪는 갈등의 대부분은 성경은 금하지만 나 자신은 마음으로 그것을 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한다면 내면적인 갈등이 생길 리 없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에 손해를 보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서 36장에 이르기를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고 하였습니다. 스가랴서 4장 6절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진액을 공급받아 절로 과실을 맺듯이,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주장하시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세속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마음이 새롭게 된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했습니다. 구약시대의 마가 선지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두루 생각하던 중에 이같이 말했습니다.

“6)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그와 같은 파격적인 제물을 바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고 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많은 제물을 바쳤더라도, 심지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듯이 자기의 맏아들을 번제로 바칠지라도 그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같은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많은 제물이나 어떤 파격적인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같이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천의 수양보다 더 귀한 제사로 받으십니다.

또 한 가지 예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유대 사회는 매우 불의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고, 사회 정의가 실종되고,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들을 두둔하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이 압제를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게을리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보란 듯이 성대하게 절기를 지키고 때마다 많은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1)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많은 제물을 드려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인정은커녕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배워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의 뜻대로 하신 적이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행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당하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십자가를 면하고 싶은 예수님 자신의 뜻을 완전히 접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으며,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기쁘게 받으시고 합당한 상을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결과, 저와 성도님들이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게 되므로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에 이르기를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2).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좋아하고 기쁨을 얻는 것을 우선시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과 뜻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설교 말씀을 단 마음으로 받아들여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도님들에게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시고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에 속한 평강과 기쁨과 풍성한 생명을 맛보면서 살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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