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막 15:33-41)

  • 잡초 잡초
  • 499
  • 0

첨부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막 15:33-41)


고당 조만식 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담임 목사로 청빙하려고 찾아갔습니다. 조 장로님이 주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주 목사님이 놀라며 “장로님, 편히 앉으십시오”라고 예의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조 장로님은 “목사님, 당찮은 말씀입니다. 전에는 제가 교장이었고 목사님은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목사님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종이고 저는 그 종을 받드는 장로입니다. 편히 앉으라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에게는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 장로님이 길가에서 손님을 만나 이야기하다가 예배 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주 목사님은 조 장로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조 장로님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주 목사님은 조 장로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조 장로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시간에 늦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종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해 주소서. 은혜로운 설교를 듣던 성도들을 방해한 죄를 용서해 주소서.” 조만식 장로님이 눈물로 기도하자, 주기철 목사님도 울고 성도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목사에 그 장로다”하며 칭찬했습니다. 

한데 과연 오늘날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면 마음으로부터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열심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단이나 타 종교의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지극 정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제가 가끔 가는 식당 중에 주인이 보살입니다. 한 주간에 보통 두 번 절에 간다고 합니다. 가면 밤새도록 삼천 배를 하고 온다고 합니다. 말이 삼천 배지 밤새도록 삼천 배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게 어디 보통 일이겠습니까? 힘들지 않느냐고 하니 힘이야 들지만 그래도 보람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전 십리 길 이십 리 길 걸어서 새벽 예배에 참석하던 그 열심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밤새도록 철야예배를 드리던 그 정성은 다 어디로 가고 심야기도회라고 해서 모여도 한 시간 기도하기조차 힘들어하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물론 그만큼 시대가 변한 것도 있겠지만 단지 바뀐 시대만 이야기하기에는 좀 부족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기도와 울부짖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삯꾼 목자이고 또 하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모두가 다 양을 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위험이 닥칠 때 누구를 먼저 생각하느냐 입니다. 삯꾼 목자는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양을 버리고 도망을 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자기의 목숨을 겁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부모치고 자식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녀들은 조금만 서운해도 부모님이 내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신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혹 모를 수도 있겠죠? 마음을 닫고 꽁꽁 숨기고 전혀 내색도 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웬만큼 둔한 분이 아니라면 무언가 눈치를 채도 채지 전혀 모르고 있을 리야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했고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주님의 사랑을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매달려 있습니다. 밤새 심문으로 시달렸습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질 당하여 온 몸이 만신창이가 돼 있습니다. 

너무 지친 나머지 그 짧은 십자가의 길을 오르면서 세 번씩이나 쓰러지셨습니다. 오죽 하면 피눈물조차 없는 로마 군병들이 지나가던 사람으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게 했겠습니까? 그런 몸으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면 제 정신 차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조차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첫째가 자기를 못 박고 자기를 비난하며 조롱하는 모든 무리들을 위한 기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극심한 고통 가운데 정신조차 차리기 힘든 상황에서 흔히 자기를 비난하고 욕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저주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오히려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니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이 세상 사람들도 쉽게 믿을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그들은 쭉 지켜보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그냥 쉽지는 않아도 그래도 가능한 일이라고 합시다. 구약 성경 전체를 들러보아도 문둥병자를 고친 이야기는 딱 한 번밖에는 없습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그 화제의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집의 조그만 계집종 이스라엘에서 전쟁 중에 포로로 끌고 왔던 이 계집종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선지자가 있어서 그에게 가면 우리 주인님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했던 어찌 보면 철없는 계집종 하나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에게 청하여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그는 선지자를 만나면 문둥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으로 와서 우여곡절 끝에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여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습니까? 

그랬는데 예수님을 통해서는 얼마나 많은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까? 그것뿐입니까? 주님을 찾았던 사람들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에 의해서 들려왔던 중풍병자로부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여 눈을 떠서 보게 된 맹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과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그것만이 아니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풍랑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리신 나사로, 이렇듯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애써 예수를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라고 몰아붙이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진짜가 내가 진짜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가짜랍니다. 그러면서 네가 진짜라고 했으니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죽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모욕까지 퍼부어 댑니다. 욕먹는 것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생욕을 먹는다면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오히려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신 예수님의 다락방의 기도처럼 진실로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온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이 칭찬할만한 무엇이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래서 아직 원수의 자리에 있을 때 그 원수인 나를 주님이 사랑하셔서,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야 말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십자가 밑에 있던 한 사람이 변화가 됩니다. 바로 백부장입니다. 그가 나중에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욕을 당하고 우리가 심지어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런 나를 통해 단 한 사람만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만도 큰 영광이요 은혜인데 거기에 더하여 회개하며 돌아오는 사람까지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의 고통입니다.
주님이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순간만은 철저히 고독한 순간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물로 드려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번제라고 해서 조각조각 마디마디 다 잘라서 불살라 주님 앞에 드립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남겨두는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 지금 드려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인정사정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은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하지만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셨던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렸다고 했습니다. 진액을 다 쏟아내는 기도를 드렸던 주님이십니다. 그랬던 주님이 지금 울부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지만 주님이 버림을 받았기에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지금 주님의 품에 안길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했습니다. 내가 버려져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나를 대신하셨습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님의 울부짖음은 사실 저와 우리 모두의 울부짖음입니다. 정작 버려질 사람은 나였습니다. 정작 버려질 사람은 여러분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은 우리입니다. 아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다고는 해도 오래 믿었던 아니면 얼마 되지 않았던 하나같이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전히 문제투성이입니다. 외식 덩어리입니다. 철저하게 남에게 보이는 모습과 내 진짜 모습이 다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게 있습니다. 죽어야 될 사람은 난데 어째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습니까?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돕는 배필을 통해 주셨던 교훈은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서로가 도움으로서만 온전히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불순종하고 난 다음의 모습은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떠안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쉽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제 삼시 그러니까 아침 아홉시입니다. 그리고 낮 12시부터 온 하늘이 깜깜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실 때가 제 구시 그러니까 오후 세시입니다. 그리고는 숨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고통만도 여섯 시간입니다. 물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며칠씩 죽지 않고 매달려있는 경우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예수님의 경우는 오히려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이건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얼마나 매질을 심하게 당하셨으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돌아가셨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그 죄를 대신하는 그 순간만은 하나님도 외면하셨습니다. 철저한 고독 가운데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이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도망쳤습니다. 제자고 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예루살렘 성에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올 때 환호하며 맞이하고 따르던 무리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겨우 십자가 밑에 요한과 몇 몇 여인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은 그래도 대제사장과 친척이기에 당당하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 뿐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다짐 다짐했던 제자들 아니 누가 더 크냐 하며 자리만 탐내던 그들 모두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진짜 필요한 자리 진짜 위로가 필요한 때 정작 주님은 홀로 계셨습니다. 고독 속에 울부짖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영광은 원하지만 희생은 원치 않습니다. 내게 손해가 날까 해서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했던 룻기에 나오는 기업 무를 자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니 복을 받기는 원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수고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심지 않고 거둘 수가 있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씨도 뿌리지 않으면서 거두려고만 하면 그건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한데 그 강도가 누구입니까? 여기 대제사장들만 욕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나는 어떻습니까? 

왜 힘들고 고달픈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못해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뭐 목사님도 제 사정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요 사정을 압니다. 하지만 그 길이 복을 누리는 길인데도 아니라고 나는 그래도 못한다고 한다면 거기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왕이 귀인들을 잔치에 청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잔치를 벌여놓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잔치 자리에 참석하도록 부탁을 했더니 다 일치하게 사양을 합니다. 

한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또 한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또 한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아니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지금 초청자가 누굽니까? 왕인데 어떻게 신하들이 하나 같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찌 보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왕에게 잘못 보이게 된다면 그 신하들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왕이면 더 출세도 하고 싶고 더 승승장구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하기 싫은 일이나 마음에 안 드는 일도 겉으로는 좋은 척, 정말 마음에 쏙 든다고 하면서 맞장구를 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혼인 잔치 자린데 불러주지 않아서 문제지 정중하게 꼭 참석해 달라 꼭 와 달라고 하는데 안 갈 신하들이 어디 있냐고요? 가져가야 할 예물이 부담스러워서일까요? 아니 그럼 안 가면 입을 싹 씻어도 되는 겁니까? 그냥 아는 사이라면 가능합니다. 초청 상대가 임금입니다. 자기들은 신하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핑계가 있어요? 갑작스럽게 쓰러져서 움직일 수 없다면 그건 가능할 수 있겠죠? 그러더라도 그럼 이런 형편이니 자식이라든가 누굴 대신 보내면 안 되겠냐고 해야 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럴 사람도 없다면 그런 사정을 마리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밭을 돌아봐야 되고 소를 시험해야 되고 장가들어서 힘들다니 이건 정말 애들도 웃을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누구 얘깁니까? 이게 바로 우리들 얘기입니다. 우리들은 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도 받고 싶고 복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로 잔치 자리에는 안 가려고 합니다. 시간도 내기가 어렵고 내 형편도 그렇고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아프고 나무 바쁘고 뭐 하여간 들어보면 다 이해가 되는 얘기는 맞습니다. 형편과 사정을 들어보면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근데 문제는 그 형편과 사정대로 그냥 놔두었다가는 은혜, 복된 삶, 이건 물 건너간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지 않습니까? 보세요. 

우리 자녀들 그 많은 시간 들여 학교를 보냅니다. 그냥도 아니잖아요? 돈도 갖다 주면서까지 학교를 보냅니다. 공부하기 싫다는 놈 등을 떠밀어가면서까지 보내고 아프다는 놈 약을 먹여가면서까지 보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기 싫다는 공부해라 해라 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이에요? 잘 되라고요? 그러면 잘 될 가능성이 있어서요? 그런데 정말 공부만 하면 잘 됩니까? 진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모아도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꽝입니다. 아무리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밀어주시면 다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느 백부장의 말처럼 “나도 남의 밑에 있고 내게도 부하가 있어서 상관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리고 하면 옵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이 말씀만 해도 다 나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대로 믿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고 예수님 말씀하시니 그 믿음대로 그냥 갑니다. 그랬더니 하인이 그냥 나았습니다. 그러니까 내 형편을 따지는 것도 믿음입니다. 내 건강이 어떻고 직장이 어떻게 가정이 어떻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 그 하나 틀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그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래서 안 된다 어렵다는 믿음입니다. 그럼 나타나는 결론도 뭐에요? 그렇다면 나도 네게 해 줄 것이 없네 입니다. 그냥 그렇다면 그렇게 피곤하게 살려무나. 나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구나. 

어떤 때 피로 회복제를 먹기도 하고 또 이런 저런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조금을 자도 단잠을 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단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낮에 그냥 깜빡 잠시 졸았는데 아주 개운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내가 수고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내 형편과 사정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주시면 훨씬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결단을 하기 위한 믿음입니다. 못한다는 믿음, 힘들다는 믿음, 하고 싶지 않다는 믿음, 결국 하나님 앞에 꾀를 부리면 그래서 심지 않으면 거둘 것도 없습니다. 

우리 형편이 그런데도 모든 원망은 다 하나님께 돌리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말은 다 내 잘못이지, 내가 못 나서 그렇지, 내가 문제지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떻습니까? 그런 다 누구 탓이라고 내 입장이 돼 보라고 그러고 있잖아요. 그러니 어찌 예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데 저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까지 기도하고 있는데 정작 저들의 모습은 정말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위해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정말 피를 토하는 절규입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 이것저것을 하라, 주일을 지키고 온전한 예물을 드리고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들이 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 나간 짓하는 겁니까? 거기에 진짜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고 또 풍성하게 누리는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좁고 험해서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도 쉬운 길이 없습니다. 공부만 해도 대학까지만 마치려고 해도 얼마나 많은 돈이 듭니까? 시간은 또 어떻고요? 그런데 그 시간에 차라리 기술을 배우고 취직을 해서 돈을 벌라고 하는 사람 몇이나 됩니까? 정말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대학가야 하고 그래서 코피 흘려가며 공부하는데 정말 그리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거 나중에 얼마나 써먹어요? 그래 가지고 정말 제대로 된 직장 얻을 수 있나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00배 60배 30배로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핍박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 그 길이 힘들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면 안 되겠구먼, 그건 불가능하구먼. 네 믿음이 그렇다면 네 믿음대로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힘주시고, 길을 열어 주실 줄로 믿으면 또 말씀하시죠. 네 믿음대로다. 한 마디로 그건 순종입니다. 뭐가 믿음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순종입니다. 그래 예수님도 순종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인생들을 보면 이건 정말 아니올시다 입니다. 

그래 절규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캄캄한 어둠 속의 주님의 절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한 풍성한 삶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죽음으로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절규 가운데 열어 놓으신 그 길입니다. 그 주님이 나를 돕겠다고 하십니다. 나도 겪어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 길,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안 될 것 같아도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과 함께 가지 않으시렵니까? 

설탕으로 만든 가짜 약 플라시보도 환자가 효력 있는 약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 나타났습니다. 연구 결과는 그들이 복용한 약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준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닌 것에 근거를 둔 믿음조차도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종교적 차원에서 믿음은 어떤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봅시다. 설탕으로 만든 가짜 약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듯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도 그릇된 평화나 행복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속자로서 믿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염려하는 믿음과 맡기는 믿음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입니다. 그 믿음대로 염려할 일이 생기고 그 믿음대로 평안해집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이제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이 바로 내가 되어야 하고 그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나 때문에 주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절규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