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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하지 못한 고린도교회 (고전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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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하지 못한 고린도교회 (고전 3:1-4) 
 
 
❚고린도 시의 역사

몇 년 전 성지순례를 하면서 그리스 남쪽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코린트’(Corinth)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옛날 미술 시간에 건축양식 중에서 혹시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이라는 것을 배운 기억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고대 서양의 3대 건축양식을 이렇게 배웠지요? 그 가운데 코린트 양식이 바로 이 코린트라는 도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 말이 나올 만큼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 끝에 위치한 이 도시 국가는 경제와 문화, 예술이 아주 발달한 당시 인구 50만의 대도시였던 것입니다.

이 ‘코린트’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라는 도시입니다. 고린도는 방금 소개한 대로 항구도시로서 다양한 해상교역을 통해 부유하고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유입되어 그리스 신전뿐 아니라 각종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그 부유함과 더불어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각종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 성적으로 음란한 일들이 온 도시에 가득하고 그 도시의 시민들은 그 죄악에 깊이 젖어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돈 좀 벌고 배불러지고 살기 편해지면 슬그머니 죄 지으려는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들 때보다 오히려 부유하고 편할 때 죄 지을 일이 더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얼마나 음란하고 방탕하게 살았는지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는 말이 아예 ‘난봉꾼’이라는 뜻이 될 정도였으니 알만 하지요? 

그래서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방탕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교인들이 많았다고 나온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룩할 성(聖), 무리 도(徒), 말 그대로 거룩한 무리로 살지 못하고 자신들이 사는 지역 환경에 사로잡혀 교회 다니면서도 도덕적으로 방탕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던 부끄러운 일이 고린도교회에 아주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휩싸여 함께 어울리며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살아가는 성도는 ‘성도’라는 이름조차 부끄러운 성도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남들 죄 짓는다고 함께 죄 짓고 남들 이렇게 산다고 함께 어울려 그렇게 사는 성도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참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기 주변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되고, 썩어가는 세상을 썩지 않게 지켜주는 소금이 되고, 죄악 된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꾸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참 성도라는 말입니다. 오늘 고린도교회의 부족한 모습은 우리에게 이 교훈을 뼈저리게 심어줍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은 세상을 따라가는 성도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내 가정과 직장과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린도교회의 역사

그렇다면 이 타락한 우상의 도시, 음란한 도시인 고린도에 교회는 언제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주후 49년 경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안디옥으로부터 마게도냐와 아덴(아테네)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사역했는데(행 18:1~17) 처음에는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다가 유대인과의 갈등이 시작된 후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서 가르쳤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 짓는 일을 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려나가며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고린도에 교회가 생기고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떠난 이후에도 사람들과 서신 왕래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와 계속 유대 관계를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린도전서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를 읽다 보면 참 골치가 아파집니다. 저도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이 교회 참 골치 아픈 교회로구나, 이런 교회는 담임목사가 정말 골치 아픈데 당시 사도 바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는 정말 문제투성이, 문제아들만 모여 있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린도교회에는 출교(黜敎)해야 할 성적으로 문란한 교인들을 아직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로부터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자기의 계모와 동거하고 있었고(5:1~5) 몇몇 성도들은 계속 고린도의 사창가를 드나들고 있었습니다(6:15~20). 이렇게 성적으로 문란한 성도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와 정 반대로 몇몇 교인들은 금욕주의자로서 혼인과 모든 성적인 생활을 죄로 여기기도 했습니다(7장).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이 여러 개의 파당으로 나누어져서 서로 자기네가 잘 났다고 싸우고, 은사를 많이 받기는 했는데 서로 내 은사가 높으니 네 은사가 높으니 하며 다투었던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냐 안 되냐?”부터 시작해서 “부활이 있냐 없냐?”까지 정말 교회 안에 다툼과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사소한 일상생활의 분쟁을 가지고 법정에 고발하는가 하면(6:1~8), 교회의 예배도 아주 무질서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자 성도들이 예배 때 천주교처럼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혼란스러웠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방언을 최고의 ‘유일한’ 은사라면서 예배 때 마구 남용해서 예배가 아주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졌기(14:23) 때문입니다. 정말 고린도교회는 복잡하고 문제투성이 교회지 않습니까? 그러니 담임목사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얼마나 머리가 아팠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이 정도로 복잡하고 문제 많은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요즘도 간혹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고 다투는 경우가 있지만 만약 고린도교회 같았다면 교회가 박살나고 몇 개로 쪼개지고도 남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어디 고린도교회만 문제입니까? 우리 교회는 문제없습니까? 문제 있습니다. 당연히 있지요. 약점도 있습니다. 골치 아픈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도 많습니다. 담임목사인 저만 골치 아픈 게 아니라 많은 분이 상처도 받고 고민도 하며 교회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 교회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성도들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문제없는 교회로 가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물어보십시다. 특히 교회 때문에 좀 힘들고 성도들 때문에 갈등하는 분들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은 혹시 문제가 전혀 없는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교회가 있다면 저희 모두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정말 그런 교회, 문제가 아예 없는 교회 있다면 저도 그 교회로 옮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병원과도 같다고 합니다. 모두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환자)들이 가득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교회가 이런 저런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성숙한 성도는 마치 구경꾼처럼, 제3자처럼 남의 일같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문제들을 나 자신의 문제로 보고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해결방법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신앙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주저 없이 성경을 펼쳐 신약의 일곱 번째 책인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신앙적 답을 담은 편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린도교회에는 정말 엄청난 신앙적, 윤리적 문제들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이 문제 많은 교회에 설립자 바울은 편지를 통해 신앙적 해결방법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바울의 해결방법들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귀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고린도교회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고린도교회에 많은 까닭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젖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이 고린도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간난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다 나이가 좀 들면 이유식도 먹다가 드디어 밥도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신자는 영적으로 마치 간난아이 같은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거나 요구하면 탈이 납니다. 

그래서 아주 초보적인 것을 가르치면서 가급적이면 잘 대해주고 무조건 섬겨주고 품어주며 살살 달래가며 신앙생활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교회 와서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면 좀 자라야지요. 당연히 단단한 음식도 먹어야 하니까 성경말씀도 잘 배우고 기도하는 법, 전도하는 법도 배워야지요. 그리고 언제까지 마냥 어린아이처럼 섬김만 받고 대접만 받고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자신도 커서 남을 섬기고 돕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지요.

고린도교회에는 은사가 충만했습니다. 방언을 비롯해 각종 은사가 충만하게 넘치고 성도들은 지식이 넘쳐났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똑똑하고 잘 난 성도도 많았고 게다가 영적으로 신령한 은사까지 넘쳐흐르는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봐도 참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도대체 왜 파당을 지어 서로 자기네 파가 최고라고 싸우고 네가 잘 났니, 내가 잘 났니, 내 은사가 더 높으니 네 은사가 더 높으니 하면서 다투고 분쟁하는 이유가 도무지 뭐냐는 것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은사가 충만한 것도 성숙과 관계 없고, 지식이 많고 똑똑한 것도 성숙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성도가 성숙한 성도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두 가지 답을 줍니다. 그 하나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옵니다. 뭘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하는 찬양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모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인지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볼까요?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보세요. 여기 나오는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는 사랑, 자랑하지 않는 사랑, 교만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또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성내지 않는 사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사랑입니다. 한번 종합해 보십시다. 여기 나오는 사랑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모하고 좋아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품어주고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사랑입니다. 이런 자세는 성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세지요. 

그래서 여기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 언제나 남을 대할 때 성숙한 태도로 대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랑이 부족해서 고린도교회는 그토록 은사도 많고 지식도 많았지만 다툼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이 사랑을 꼭 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냥 일반적인 사랑, 입으로만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 남을 잘 배려하고 품어주고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그래서 나는 낮추고 남을 높여주는 그런 사랑을 꼭 가지기 바랍니다.

❚덕을 세워라

두 번째 성숙의 기준은 덕(德)입니다. 이 ‘덕’이라는 표현이 고린도전서에 참 많이 나옵니다. 여덟 번이나 나오는데 어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사도 바울은 계속 이 ‘덕’을 강조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갈등이 생겼을 때 바울은 1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싸우기 마련입니다.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네가 맞냐 내가 맞냐 고집을 부리기 때문인데 앞서 말한 성숙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이 있어서 얼마든지 우상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혹 내 옆에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초신자가 있다가 내가 그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시험 들고 실족하지 않도록 그 사람을 배려해서 안 먹어야 한다(‘평생’)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여섯 번이나 이 ‘덕’을 언급하는데 이 부분은 은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최고라며 자꾸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향해 방언도 좋고 은사도 좋고 다 좋지만 사랑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 은사는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다시 갑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봅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사람의 방언을 하고 심지어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어서 덕을 못 세우면 꽹과리 소리처럼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언의 은사를 받아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믿음의 은사를 받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어서 덕을 못 세우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구제하는 은사를 받아 내 모든 것을 내주어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줄 지라도 사랑이 없어 덕을 못 세우면 아무 유익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뭡니까? 결국 앞에 말한 사랑과 덕은 한 가지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의 자세가 있어서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과 덕이 없어서 고린도교회는 은사 충만, 지식 충만한 교회였어도 결국 늘 싸우고 다투고 상처 주고 상처 받은 것입니다.

결론을 맺읍시다. 고린도교회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보다는 안 좋은 모델이 되는 교회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처럼 고린도교회는 우리에게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회입니까? 물론 고린도교회처럼 문제도 있고 약점도 있는 교회입니다. 혹시 고린도교회 정도로 말썽꾸러기는 아니지 않냐며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 한 번 보십시다. 우리 교회는 과연 사랑이 많은 교회입니까? 어떤 사랑이지요? 성숙한 사랑 말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품어주고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사랑 말입니다. 이런 사랑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교회는 과연 하나님께 점수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또 우리 교회는 덕을 세우는 교회입니까? 은사 많은 교회, 지식 많은 똑똑한 교회, 건물 잘 지은 교회, 남들 볼 때 그럴 듯하게 보이는 교회보다 덕을 세우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덕을 세우기 위해 온 성도가 애쓰고 나를 내려놓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교회는 과연 덕에 있어 점수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고린도교회의 부정적인 모델을 통해 우리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 사랑을 세우는 교회, 덕을 세우는 교회가 되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최근 교회 안에서 마음 아프거나 상처 받거나 갈등이 있었던 분들은 더 확실히 깨닫게 되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똑똑한 성도보다 성숙한 성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고 잘 난 성도보다 사랑을 품은 성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성도보다 덕을 세우는 성도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성도, 거룩할 성(聖), 무리 도(徒), 성도가 되고 그런 분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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