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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섬길 것인가? (롬 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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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섬길 것인가? (롬 12:9-13)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외모도 준수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좋은 신랑감이고 좋은 사위감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우르과이라운드를 경험하면서 시골을 살려야겠다 생각하고 졸업하고 시골에 뛰어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을 위해서 일하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결혼기가 지났지만 시골을 좋다고 하는 처녀가 없어서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인터넷카페에서 어느 여성과 이메일을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습니다. 

이메일을 자주하다보니까 하루에 10통정도가 오갈때도 있습니다. 한 천여통의 이메일이 오고갔습니다. 청년의 마음에 누군지 모르는 그 여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여성이라면 결혼해도 좋겠다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썼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그런데 프로포즈를 하고 나서 이메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10통씩 왔다갔다하던 이메일이 일주일에 한통으로 줄더니 한달지나니까 딱 끊겼습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시골청년이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남들 다가는 직정버리고 시골에 와서 시골살려보겠다고 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너무 챙피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습니다. 이메일이 한통왔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열어봤더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프로포즈를 받고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릴적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소아마비를 앓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어릴적 불에 넘어져 화상이 남아서 아주 보기가 싫습니다. 이래도 저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받고 청년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백은 했지만 외모가 그렇다 하니까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색시를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면 우리부모님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참 큰일입니다. 몇날 몇일을 잠을 못자고 고민했습니다. 결국 청년은 결심했습니다. 다시 이 처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에게는 건강한 몸을 가진 제가 필요하군요 그리고 저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결정은 제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편지를 다시 보냈습니다. 두사람은 결국 만났습니다. 만났는데 너무 놀란것은 그 자매가 너무 건강하고 너무 아름다운 자매였다는 것입니다. 자매가 웃으며 이야기 합니다. 놀라셨죠 제가 속이고 싶어서 속인것이 아니라 제 외모가 아닌 제 영혼을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과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랑의 조건을 달아서 그 순수한 사랑을 변질시키고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이익보다 다른사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하고 자기이기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은 변질된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일곱가지 은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예언의 은사, 섬김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이 은사들은 성령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의 목적은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은사 받으려고 돈내고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노력한 사람없습니다. 하나님 주신 선물이기에 우린 이웃에게 그대로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은사에대해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것이 은사이든, 재능이든 우리가진 직분이든 그것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려면 사랑으로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소리나는 꽹가리에 불과한 겁니다. 오늘 성가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불렀지만 사랑이 없는 찬양이라면 그건 노래에 불과한 겁니다. 

성가대원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유창한 설교를 해도 사랑이 없이 설교한다면 그것은 말의 연결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 장로님이 훌륭한 기도하셨지만 장로님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아무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는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이런 교제가운데 성도들의 그 흘려보내는 사랑의 향기 사랑의 손길을 통해 하나님을 깨달아 알아가는 겁니다. 교회에서 사랑은 기본이고 본질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주님의 사랑가운데 이뤄진 것이고 사랑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을 이야기할때도 어떤 은사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의 설교의 뛰어난 은사, 교인들의 놀라운 은사, 이런 것들도 도움이 되지만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공동체속에 들어오면 사랑을 느낄수 있구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구나 나같은 사람도 따뜻하게 맞아주는구나. 내가 여기오면 인가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구나. 여기오면 외롭지 않구나. 성도들의 사랑을 통해서 내가 주님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의 힘,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한다 그러면 자력이 있습니다.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같이 있고 싶습니다. 교인들도 똑같습니다. 이 공동체속에 있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가도 멀리 한시간씩 기차를 타고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오면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까. 수원에서 오는 분들도 여러분 있습니다. 어떻게 수원에서 오는 것입니까. 수원에 더 좋은 교회도 많은데, 여기와야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사랑을 나눠줘야 합니다.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뭘해도 사랑으로 해야합니다. 사랑에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야단치고 책망한다고 해서 사람 안변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변합니다. 우린 주님의 사랑으로 변한겁니다. 그래서 집사가되고, 권사가되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래서 그 받은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어 줘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이 주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똑똑하고 잘난사람들이 모이면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비교하고 학위자랑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랑으로 모였기 때문에 주님 중심으로 하나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베풀고, 사랑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설교하고 사랑으로 찬양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사랑이 없습니다. 신기합니다. 

보면 제가 제일 사랑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목사가 사랑을 제일 많이 이야기 합니다. 설교도 하니까. 제가 제일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랑을 제일많이 기도하는 장로님들이 사랑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제일많이 찬양하는 성가대가 사랑이 제일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저부터가 제일많이 조심하고 회개해야합니다. 사랑은 제일 많이 이야기하지만 사랑없는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없는 목사가되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버림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을 베풀수 있는 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착각을 합니다. 예배끝나고 모여서 커피한잔하면서 교회에 대해 비판하고 논쟁하고 토론하면 이게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인줄 압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손으로 발로 몸으로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휴지떨어지면 휴지하나 줍고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내가 청소도 하고 장애인이 있으면 붙들어주고 노인이 있으면 부축해주고 더러운게 있으면 내가 닦고 코흘리는 아이 있으면 닦아주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으로 섬길 수있을까 사랑의 5가지태도를 묵상해보려 합니다.
성경 9절 10절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보니까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했습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위선과 가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악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위선과 가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최고로 경계해야 할 것이 위선과 가식입니다. 속으로는 너무너무 미운데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제 자신이 제일많이 범하는 것이 이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위선과 가식에 물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많이 책망하신것이 너희들이 위선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은데 사랑하는 척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는데 존경하는 척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사랑은 진실입니다. 사랑은 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선에속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실한 것입니다. 불순물이 껴선 안됩니다. 거짓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위선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때 거기에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나서 왜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느냐 우리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 사랑에 불순물이 너무나 많기때문입니다. 우리 사랑에 너무 거짓이 많고 위선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모습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그 사랑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태도는 존경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니까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형제를 사랑하되 우애해라. 우애라는 말은 친구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이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이것을 가족같이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되 서로 우애하고 가족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성이다르고 환경이 다른 사람이 모여있지만 가족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과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아닙니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권사님도 가족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아프면 모든 지체가 아픔을 느끼는게 그게 살아있는 유기체의 모습입니다. 한지체의 팔이 잘려나가도 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일 수 없습니다. 가족의 마음을 가지고 가족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은 서로 나눠먹는 겁니다. 끼리끼리만 먹는게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그래서 허물도 덮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면 아무문제가 안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형제가 7남매입니다. 부모님까지 합치면 한 10가족이 식사를 합니다. 그러면 꼭 그때마다 방구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국쏟고 나갑니까 숟가락 던지고 에이 더러워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낄 사람은 끼려니 하고 먹는 겁니다. 얘는 꼭 밥먹을때마다 방구끼더라 한마디 듣고 맙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용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밥먹는데 방구끼면 보통일이 아닐겁니다. 신문에 날지도 모릅니다. 아무개 권사가 밥먹다가 방구끼었데. 허물도 덮어줄 수 있는 게 가족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가족같이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서로를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높게 여겨야합니다. 무시하면 안됩니다. 교회에서도 종종 무시합니다.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돈많은 사람 잘사는 사람,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 학벌좋은 사람이 대우받습니다. 교회도 그런 기준이 많습니다. 그래서 없는 사람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시할 수 있습니다. 옷이저게 뭐야. 애좀 봐 애좀, 나보다 남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체를 보듯이 그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중요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해도 다윗은 사울을 끝까지 존중합니다. 사울을 욕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을 향해서 큰 절을 하고 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며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모습을 사무엘서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마음에도 감동이 옵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죽이려고 했구나 내가 잘못생각 했구나 사울이 깨닫습니다. 

나를 짖밟고 괴롭히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그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서로서로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를 존경하듯이 장로님을 존경하고 권사님을 존경하고 모두를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짜 사랑이다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랑의 태도는 열심을 품고 섬기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열심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나님을 섬기되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은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예배에 게으르고 봉사에 부지런하지 않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분에게 드리는 예배의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이 열심히라는 말은 마음속에 불을 품다라는 말입니다. 불이 타오르는 것, 열심입니다. 물이 막 끓는 것, 그게 열심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불이 끓어 오르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봉사하는데도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열심히 식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 마음에 품고 우리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일을 할 때 열심히 안하고 대충대충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처삼촌묘 벌초하듯한다고 했습니다. 하기싫은 일 시키면 대충대충 하는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면 안되겠다. 예배할 때도 열심을 다해서 예배해야 합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앞에 예배에 열정이 있습니다. 찬송하나 불러도 거기에 열심히 있습니다. 봉사에도 열심히 있습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하는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 했습니다. 열심을 내는 교회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소망중에 섬겨야합니다. 12절입니다. 소망중에 즐거워하며 환난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이땅에 오시면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주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이미 하나님품에 가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죽더라도 우리에겐 소망이 있고 꿈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의 삶이 힘들더라도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환난을 참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살다보면 힘든일이 왜 없겠습니까. 때론 가족과 사별하기도하고 사업에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아픈 배신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가운데에서도 환난중에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해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부족한 힘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게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항상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환난을 이겨낼 수 있고 소망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우울해하면 안됩니다. 찡그리면 안됩니다. 왜냐면 우리속엔 예수님이 계시니까. 부활의 주님이 계시니까.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즐거워하실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명한 알렉산더가 그런말을 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전에 그는 부하들 자기 친구들을 다 불러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이 돋우니까 자기친구들에게 가지고 싶은 것 있냐고 묻고 다 줘버렸습니다. 부하들이 그럽니다. 대왕이시여 그렇게 친구들에게 다 줘버리면 왕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때 알렉산더가 그럽니다. 아니야 아직 나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있다. 그는 희망을 가진 것으로 족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희망이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가 안돼. 여러분들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절벽같은 일이 내 앞에 닥칠지라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 제일 비참한게 뭔지 아시죠? 내 인생 끝났어. 난 좋은시절 다 지나갔어. 옛날이 좋았지, 과거가 좋았지 그 사람은 참으로 슬픈 사람입니다. 과거가 좋은 사람 아닙니다. 과거보다 여러분의 미래가 더 좋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어. 그런 바람으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은 뭘까요. 베푸는 삶입니다. 13절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랑한다는 것은 베푼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며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을 당해서 어려울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마케도니아교회가 헌금을 해서 구제헌금을 해서 사도바울 편으로 보내줍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예전에는 어렸을 때 그런기억이 늘 납니다. 시골에는 어느 교회에 부흥회한다하면 면 지역의 교회들이 다 모입니다. 그때는 교파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니까 다 모입니다. 그 교회에서 한 주간동안 집회하는 것입니다. 숙식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여관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도님들의 집에 몇 명씩 다 모시고 가는 겁니다. 어렸을 적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방을 몇 개몇개 해서 다른 곳에서 오신 분들이 거기를 씁니다. 그분들이 쌀을 조금씩 가져오는데 밖에다 큰 솥을 걸고 밥을 해서 다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는 일주일동안 은혜받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때는 그것을 즐겁게 생각했습니다. 대접해야 내가 복을 받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대접하는 것을 인색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역예배 드립시다하면 대접하는 것 귀찮어 커피하나 내야 하잖아 귀찮아 안드려, 이런분들 많습니다. 자꾸 대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대접해야 복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대접할 때 그 복이 나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보니까 주라 그리하면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많이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복이되어 돌아올 줄 믿습니다. 손대접하기를 힘쓰라.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라. 이것이 초대교회의 원리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자꾸 베풀어야 합니다. 넉넉해서가 아닙니다. 없는 중에도 나눌때 하나님은 그 위에 복을 더 부어주시고 그것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에서 늘 살펴야 합니다. 어느집이 양식이 없지않나. 누가 궁핍하지 않나, 구역장님들은 늘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구역의 힘으로 부족하면 교회에 부탁을 하고 내 힘으로 안되면 힘있는 분들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는 그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 교회에 성미통을 뒀는데 용도가 조금 달랐습니다. 원래 어렸을적 보면 성미를 많이 하는데 지금도 우리교회에서 여신도회에서 관리하는데 성미의 목적은 원래 시골 교역자들 옛날 교역자들이 다 어려우니까 사례를 제대로 못드리니까 밥을 할 때 쌀을 뜰때 한 수저씩 떠 성미통에 따로 넣습니다. 모아지면 그것을 모아서 교역자이 굶지않도록 쌀을 드리는 것이 성미의 전통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성미를 가장 가난한 분들을 돕는데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시골교회 후미진 곳에 성미통을 하나 놨습니다. 

교인들이 여유가 있을 때마다 성미통에 쌀을 붓습니다. 늘 차있습니다. 그러면 교인중에 어려움당한 교인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분들이 와서 성미통의 쌀을 받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을 연명을 하고 끼니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성미통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주무시는데 밖에 손님이 온것 같습니다. 밤손님이. 나가보니까 교회들어가는 현관입구에 성미통이 있는데 누군가 성미통의 쌀을 퍼담는 것입니다. 뒷모습을 보니까 교인은 분명히 아닙니다. 쌀을 퍼서 한자루지고 일어나는데 못일어 나는 겁니다. 

목사님이 가서 들어올려주면서 식가구 많은 것 같은데 이것가지고 되겠냐고 더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쌀을 더 퍼줬습니다. 이분이 당황해서 그래도 허겁지겁 그 쌀을 메고 사려졌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주일 낯선가족 한가족이 나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가족이 어려움가운데에서 그 도움을 받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전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백마디의 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번 베푸는 사랑이 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면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때로는 그 교회를 좋게 여기고 그 교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교회에도 사랑의 성미통을 둬야겠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분들이 시간날때마다 쌀을 가져다 부어놓으면 필요한 분이 와서 언제든지 쌀을 가져가서 적어도 쌀이 없어 굶는일은 없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사랑의 공동체 하루아침에 되어지지 않습니다. 말로만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부터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사랑의 공동체는 가능할줄 믿습니다. 

어느 시골교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까 교인들이 교회올 때 촛불을 하나씩 가지고 옵니다. 한사람이 일찍와서 촛불하나 키면 그 큰 예배당에 촛불하나 켜도 어둡습니다. 그러나 또 한사람, 또 한사람, 또 한사람 전교인이 촛불을 들고 들어오면 예배당안이 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 한사람 해서 달라질게 뭐가 있어. 세상이 변하겠어. 아닙니다. 나 한사람, 나 한사람 사랑의 촛불의 불을 켤때 결국 어두운 세계는 밝아질 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빛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고 형제를 존경하고 열심히 주를 섬기고 그리고 사랑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할 때 주님은 그 가운데 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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