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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십자가와 지는 십자가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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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십자가와 지는 십자가 (마 16:21-28)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군사기초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졌던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내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있었고 또한 고된 훈련도 쉴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심정은 물론 다른 기독신자 훈련병들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에 다녀본 적이 전혀 없으면서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주일에 교회에 가겠다고 나서는 훈련병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이라 할지라도 내무반에 그냥 남아 있으면 꼭 무슨 작업에든지 동원되기 십상인데 교회에 나가면 그런 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동기로라도 일단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하여튼 훈련소의 주일 아침만큼 '가짜 기독신자'들이 대거 양산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꼭 군대 안에서만 생기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훈련소의 경우처럼 새빨간 가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입으로는 기독신자라 하지만 사실상 참된 신앙은 소유하지도 발휘하지도 못하는 '가짜 교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 바로 앞에 기록된 사건을 보면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우리 기독신앙의 핵심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말이 한 번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다 진실한 신자인 것은 아닙니다.
즉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요 화육하신 성자라고 믿습니다.'라고 공회 앞에서 서약을 하고 세례를 받은 교인이라고 해서 100퍼센트 다 진짜 신앙인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을 진짜로 만들어 주고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시금석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곧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두 개의 십자가'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독생 성자'로 신앙고백할 때에 반드시 '깨닫고 믿어야 할 십자가'와 '지고 따라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신앙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구세주로 오셨을 때 그 최고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신자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똑바로 알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바로 이 점에 대하여 실수한 대표적 인물이 다름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본문 21절부터 23절에 "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이때로부터"라는 말은 바로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바로 그 시점부터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에게 '그리스도' 즉 구세주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네 개의 동사들은 모두가 다 '반드시 해야만 하다'(must)라는 조동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메시아로서 꼭 이루셔야만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 사역임을 재삼재사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의 비장한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즉각 반응하기를 "예수님,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주님께 생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라고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베드로 딴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생각하다 보니 나온 말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메시아상에 같이 물들어 있던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외세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대인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습니다.
즉 메시아만 오시면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것이 단숨에 해결되고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대는 그들의 당면 과제인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에 모아져 있었습니다. 
어느 유대인에게나 이 점에 있어서는 추호의 이견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 메시아로서 당연히 해 주어야 할 최고의 급선무요 가장 필연적인 의무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분명히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처럼 순전히 민족적, 물질적,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그들이 고대하던 민족해방을 성취해 주기는커녕 로마군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며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일일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꼭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기다려왔다가 이제 눈앞에서 만나고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그 메시야가 그런 꼴로 죽게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바로 그와 똑같이 오해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면 적어도 이 소원은 이루어 주시겠지. 아니 당연히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하겠지."라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메시아상을 마음대로 정하면서 신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보다도 당신의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니, 내가 모처럼 마음을 잡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데도 그 대가라는 것이 겨우 무슨 죄사함인지 뭔지 하는 것뿐이야?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급한 내 인생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들부터 당장 좀 풀려 나가도록 해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다."라고 추상같이 호령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교회의 반석이 될 신앙고백'을 하고 그처럼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따끔한 책망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씀이기도 했지만, 또한 근본적으로는 그 베드로의 마음과 입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던 사단을 두고 하신 책망이기도 했습니다.
실로 놀라운 것은, 그처럼 귀한 첫 신앙고백자였던 베드로조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대변인 노릇까지 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입과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그것들이 바로 사단의 생각을 전하는 도구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는 것보다는 내 육신을 따뜻하고 배부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 저 천국을 예비해 주시는 것보다는 당장 이 인간 사회에서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주시는 것이 백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요 곧 '사단의 사고방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죄라고 생각하십니다.
다른 것들 다 제쳐 놓고 먼저 이것부터 해결되어야만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 되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하여 계획하시고 또한 성취해 주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전혀 죄 없으신 순결한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으로써 그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되는 진짜 최고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이 '하나님의 일'은 이처럼 사람이 미처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은혜와 축복이 차고 넘치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엔의 결의에 따라 미국 역시 많은 군인들을 우리나라에 파병해 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의 꼬마들은 미군만 보면 껌이나 초콜릿을 달라고 졸랐고 실제로 많이 얻어먹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미군들은 우리에게 그런 과자나 나누어 주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토와 국민 전체의 생명을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주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철모르는 아이들은 미군들이 우리를 위해 치렀던 그 큰 희생은 모르고 미군만 보면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면서 따라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런 철없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주신 구원, 이 놀랍고도 고마운 '하나님의 큰 일'은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눈앞에 먹고 살기에 필요한 '사람의 일'들에만 마음을 빼앗겨서, 그저 좀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입으로 값싼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짝이 없는 참된 신앙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대속의 은혜를 진실하게 고백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음을 깨닫고, 이처럼 '믿는 십자가'를 자신의 심령에 확고부동하게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신앙은 또한 '자기 십자가'에 대한 결단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첫 번째 십자가의 의미를 똑바로 깨닫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또 다른 십자가 하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신자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로서, 아무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신앙에 따라오는 고난을 기꺼이 당할 각오를 철저히 가지지 않는다면 처음의 신앙고백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어지는 24절 이하 28절에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메시아,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메시아'를 믿어야 한다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하나 의외의 십자가를 그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은 이것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기중심으로 계획하고 추구하며 살던 인생을 이제는 완전히 끝을 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것은 그처럼 곁에서 보기에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십자가이지만 바로 그 십자가가 다른 사람 아닌 자기 자신에게도 지워지게 될 것을 아예 단단히 각오하고 따라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려 하면 이처럼 엄청난 고난까지 감수할 것을 각오해야만 합니까?
왜냐하면 그 길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 최대의 판돈'이 걸려 있는 경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길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 즉 '생명을 걸고' 따라가는 길인 것입니다.

장차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좀 잃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함은 이 세상 사회에서도 상식에 불과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노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사업에 투자되어 버려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이나 돈을 두고 손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대차대조표의 결론적인 결과는 분명히 '훨씬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로 이 원리를 적용시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멋대로 살면서 혹 '온 천하를 얻는' 인물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생명을 잃으면 두말할 것 없이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 장사입니다.
그러니 그 가장 귀한 생명을 반드시 따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기 십자가' 정도의 투자는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26절에서 하시는 말씀,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말씀은 무슨 질문이 아니라 신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명령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이란 돈이나 직장이나 명예나 행복 정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생명,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영생을 걸어 놓고 따라가는 인생 최대최고의 경주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실패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 "자기 십자가"가 어떤 것이든지, 그 주님 따라가는 길에 필연적으로 닥치게 되어 있는 성도의 고난이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피하려 하다가 영생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십자가'에 헌신함으로써 영생을 얻게 될 그날의 영광을 27절에서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때는 우리 주님께서도 이제 더 이상 고난의 주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서 재림하실 것인데, 28절 말씀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죽기 전에" 즉 나중에 변화산상에서 그 왕권의 영광을 미리 보았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 모두가 "각기 행한 일"대로 상을 받게 되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우리의 용모나 개인적인 성취나 사회적인 업적을 따라 판단 받게 되는 날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 살았느냐는 이 한 가지만으로 판결 받게 되는 날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을 아예 믿지 않았던 사람들뿐 아니라 입으로 신앙고백은 했지만 그저 편하게 살려고만 하고 자기 생을 바쳐 섬기는 신행일치의 삶이 전혀 없었던 '가짜 신자'들까지 "제 목숨을 잃고" 영벌에 빠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아예 자기중심의 생을 완전히 부인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 함께 고난 받기를 각오하고 따라갔던 성도들은 세상에서 잃었던 듯이 보였던 생을 주님과 영생하는 진짜 생명으로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 즐기다가 나중에 고생하는 '베짱이 인생'은 영적으로 불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반면에 미리 좀 고생을 하더라도 나중에 큰 즐거움을 누리는 '개미 인생' 또한 참된 신자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18절에서 선언한 것입니다.
정말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간단한 계산을 신앙생활의 현실에서는 해 내지 못하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지게 되는 '자기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것이 평균으로 따지자면 대체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뭐 기껏해야 이전에는 자기만을 위해 쓰던 시간과 힘과 물질 중에서 일부분을 주님 위해 쓰는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짊어졌던 십자가의 고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지고 갔던 순교의 고난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할 것들을 두고 우리는 무겁다고 끙끙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것들마저 당장 잃어버리기 싫다고, 바치기 아깝다고 자기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중에서 겨우 하루, 전체 소득에서 단지 십분의 일, 이런 것들조차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줄 모르는 기가 막히는 교인들입니다.

이제 추석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짝 믿음' 가정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또 한 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뵈러 가는 길을 하필이면 주일을 꼭 끼워 넣어서 다녀와야겠다는 불신남편의 압력이 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조상을 위한 제사상을 차리고 그 앞에 절하는데 왜 혼자서 불효자 노릇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불신가족들의 핍박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제 말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다른 것 아닌, 바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 놓고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즉 그 길에서 유한하고 가치 낮은 '현재의 생명'을 기꺼이 잃을 각오를 해야만 영원하고 지극히 귀한 '장래의 생명'을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가 되어 있다면 불신남편이나 불신가족의 핍박 정도야 사실상 그리 '목숨을 걸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천국에서 쓸 '영광의 면류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대로 이 법칙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두 번째 십자가' 즉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에게 닥치게 되는 고난 역시 필연적임을 깨닫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희생과 충성으로써 끝까지 지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이 최고의 신앙고백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 꼭 동반되어야 할 '두 개의 십자가'를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죄 사함을 위하여 '구세주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바로 깨달아야 만이 우리의 신앙고백은 진짜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뒤를 따르는 제자에게도 또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그 고난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우리의 신앙고백은 진실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 '두 십자가'가 없는 신앙고백은 가짜이며 그 신앙생활이란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짜 화폐도 있고 위조지폐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천연색 복사기계가 잘 발달되어 있고 또 위폐범들의 수법도 워낙 교묘해서 보통 사람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기가 참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야말로 척 보면 다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지상교회 안에도 '진짜 신자'와 '가짜 교인'들이 섞여 있습니다.
  
다들 '입으로는 시인'했으니 겉으로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입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진심을 함께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 어느 누가 무슨 재주로 속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진실로 믿는 십자가'가 있는지, 그 삶 속에 '기꺼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있는지 없는지를 감식해 보심으로써 그 신앙고백의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의 강서성전이 지어졌을 때에 처음에는 이 본당의 강단 뒤에 십자가가 하나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원로목사님께서는 그것을 떼어 버리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신자들의 진짜 십자가는 '눈으로 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십자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에 장식으로 걸고 다니는 십자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지고 따라가는 십자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에 이 '두 개의 십자가'가 들어 있습니까?
어떤 '그려진 십자가'나 '조형물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진심으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늘 간직하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만 할 '자기희생과 충성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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