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 (잠 25:13)

  • 잡초 잡초
  • 675
  • 0

첨부 1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 (잠 25:13) 

 
지금으로부터 약40년 전 여름이면 항상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일명 아이스께끼 아저씨입니다. 연일 30도가 넘는 여름 불볕 더위에 가장 많이 팔리는 과자류는 뭐니 뭐니 해도 빙과류입니다. 지금은 그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만 옛날에는 한 종류 뿐이었습니다. 

사각으로 생긴 나무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아이스께끼 아저씨는 골목길이나 소풍가는 장소나 할 것 없이 언제나 가장 인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짊어진 통에는 오직 한 가지의 얼음과자 뿐입니다. 맛도 한 가지, 모양도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도 그 아저씨의 아이스께끼 통 하나면 동네 아이들을 모으는 데는 그만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요즘은 아이스크림도 가지각색입니다. 오렌지 맛, 포도 맛, 딸기 맛, 우유 맛, 커피 맛, 초콜릿 맛, 콜라 맛.......알록달록한 색, 시커먼 색, 하얀 색.... 그야말로 총 천연색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맛이 있고 무슨 향이 나고 어떻고 해도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일 뿐인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모두가 녹아내린다는 것입니다.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은 없습니다. 특히 더운 날씨일수록 빨리 녹아내립니다. 그것도 원래의 모양은 흔적도 없이 아주 보잘 것 없는 모양으로 허물어져 내립니다. 

여름날에 녹아내리는 이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녹기 전에 빨리 먹어야지 무슨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때로는 먹는 것에도 철학이 있고 신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아이스크림에 대한 좀 더 철학적인 이야기란 이런 것입니다. 아이스크림이란 녹아야 할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자기가 녹아짐으로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데만 그 녹아내림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것에 녹아내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상당한 아이스크림에 대한 철학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 이것을 신앙적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합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다른 사람을 시원하게 하는 데에 충성하는 신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 생활한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 텐데 그걸 이루어드리지 못해서 하나님으로 늘 안타까운 갈증에 시달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부족함을 드러내고, 답답함을 안겨주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는 교회에 다닌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아직도 하나님이나 보는 사람들에게 전혀 시원함을 주지 못하고 갈증 만 잔뜩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철학을 배워야 됩니다. 그냥 지나칠 말이 아니라 성경에도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25:13절을 보십시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중에 여름에 보리를 추수해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보리를 추수할 때가 한창 여름 때이지 않습니까?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은 대부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만 저도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보리를 베어보았습니다만 정말 고역입니다. 뜨거운 날씨에 저절로 흐르는 땀에 거기에다가 보리 수염이라도 등짝 옷 속에 들어갈라치면 아주 못 견딥니다. 

이때 잠깐 쉬면서 마시는 한 잔의 얼음냉수, 그야말로 무엇이 이 시원함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갈증이 나면 음료수를 찾습니다. 그러나 정말 갈증이 날 때는 어떤 음료수도 필요 없습니다. 무슨 주스도 소용없습니다. 냉수가 최고입니다. 그 기분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이렇게 시원하게 해 드려야한다는 정말 실감이 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문제는 아무나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됩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람의 그 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충성된 사람입니다. 오직 충성 된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여름날에 얼음냉수같이 시원함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적 의미로는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충성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로지 그 한 가지의 일을 위해 집중하며 정성을 다하는 자세가 곧 충성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한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임금님께 “어떻게 하면 죄의 유혹을 피하고 많은 시험을 이겨서 나라를 위한 깨끗한 충신으로 일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그 젊은이의 뜻이 기특하여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컵에다가 물을 가득히 채워서 컵을 들고 제한된 시간 안에 시내를 한 바퀴 돌되, 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즉시로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하명했습니다. 

젊은 재상은 질문 한번 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드디어 임금님이 명하신 대로 제시간에 물 컵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물었습니다. “자네가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여자를 보았나?”, “못 보았습니다.” “그럼 술집을 보았나?”,“ 못 보았습니다.” “그러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얼마나 나왔던가?”, “임금님, 못 보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못 봤습니다.”

이때 임금님은 “바로 그것이야. 내 할일을 열심히 하노라면 시시한 일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충성 된 자의 가장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충성하는 자세가 있어야합니다. 부모 심부름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충성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먼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항상 먼저 생각해왔던 문제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 지고나면 사실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학생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알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정체감이 시원치 않기 때문에 휘청거립니다. 사느니, 죽느니. 조금 뭘 됐다고 해서 교만했다가 좀 안 된다고 해서 자살한다고 야단이고, 이게 정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 확실하면 하나님 앞에 충성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이냐, 사람 앞이냐 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내 위치가 어디냐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섬겨야 하는 위치인지 섬김을 받아야하는 위치인지를 그렇게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무조건 섬기는 위치에 서면 손해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명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할일이 무엇이냐를 빨리 알아내는 일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의 사람이 더 사랑받겠습니까? 물론 시키는 일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했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절대적 사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자,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에 대한 평가의 문제입니다. 누가 충성이라고 인정을 하느냐 입니다. 사실 민주주의라고 하는 지금시대에 좀 유감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여론조사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평가 받는 가장 흔한 척도로 사용 되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평판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시행을 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 방편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평가기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당당한 철학과 주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결실을 기대할 정도로 타당하다면 백성은 따라주는 그런 풍토가 되어야 하는데 일일이 물어가면서 “다리를 놓을까요? 말까요?” 해서는 될 일도 안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만 여론에 의한 평가만 중요시하다가 <기회주의자>가 되거나 자기가 없어져 버리는 <위선자>가 되어버린다면 피차가 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평판과 여론을 의식해서 남의 눈치나 보면서 일 하겠다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옛날이야기 한 도막 기억하십니까?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아들이 고삐를 잡고 가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뭐라 그랬어요? “아이고, 어린 아들을 고삐를 잡게 하고 자기가 떡 타고 가는 저런 나쁜 애비가 다 있냐?” 그 다음에는 애를 태우고 자기가 고삐를 잡았더니 “저런 불효자가 있나, 아버지를 저렇게 고삐를 잡게 하다니”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할 수 없이 둘 다 나귀를 탔더니 “저런 나쁜 놈들이 있나, 저 어린 나귀를 두 사람이 타고 가다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나귀를 둘러메고 갔다고 하잖아요. 여론이란 항상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평가입니다. 충성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것만이 옳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 할 것도 아닙니다. 남보다 땀을 더 흘렸다고 그것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논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바쳤다고 그것만으로 내가 스스로 충성을 평가받으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충성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다 생각지도 말아야합니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20장에 보면 포도원에 일꾼들을 모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벽에 온 사람이 있고, 아홉시에, 열두시에, 오후세시에, 오후 다섯 시에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치고 삯을 줄 때 맨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똑 같은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일찍 와서 일을 더 한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그때 주인의 말이 아주 냉정합니다. “너와 약속한 게 한 데나리온이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다른 사람 더 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내 마음이다.” 여러분, 여기에서 충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뭐 마음에 든다, 안 든다하지 말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해야 할 일만 내가 하는 겁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은 직선적인 것입니다. 다만 오직 하나님 앞에 내가 묵묵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함에서 생기고, 지혜는 고요한 생각에서 생기고,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고, 허물은 경망한 행동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함에서 생기고, 절망은 불신앙에서 생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충성이 무엇입니까? 곧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은 우리의 충성을 믿을 수 있을 때 복을 주시는 겁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한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을 시원케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는 목말라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충성에 목말라하십니다. 더운 여름 추수하는 날 얼음냉수를 기다리시듯이 우리의 충성을 기다리십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충성 된 자로 부끄럽지 않게 하나님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의 아름다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