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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빌 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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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빌 4:10-23)


지난 주일에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혹 배우고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 가운데 한 가지라도 실천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체험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평안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오늘은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편지의 시작을 감사와 기쁨으로 출발했던 바울은 마지막도 감사와 기쁨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눈에 가장 잘 뜨이는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사랑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도 이 구절에서 얻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읽습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입니까?  혹은‘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엇일까요?   몇 년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죠엘 오스틴의‘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선물로 보내주어 읽어보았습니다. 지금도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그때 한참 인기를 모으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어가며 그렇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지 하며 긍정적으로 동의한 부분도 많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저자  노만 브이 필이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된다.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살아라.  그리하면 성공한다’고 말하는데, 죠엘 오스틴도 나의 인생은 내가 믿는대로 된다는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두 사람이 조금 다르다면 조엘 오스틴은 목사의 아들이며 본인도 목사로서 자기의 주장을 성경말씀으로 인증하려고 애쓴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갈수록 이분이 정말 성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심리치료를 하는 중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는 힘이라는 것이 그 책이 말하는 긍정의 힘입니다. 오직 성공만 하나님이 주시려고 준비하신 복이고 가난과 실패는 나에게 긍정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예수 믿어 잘 사는 비결, 혹은 성공의 비결 등 기독교인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달콤한 복음에 길들여진 입맛을 적절하게 자극하는 책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기독교 서점가의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때 모든 것이란 그런 식의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얻는 성공이 아닙니다. ‘안된다 안된다 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망하고 실패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먹으면 부자가 되고 좋은 직장에 취직되며 건강을 회복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이런 적극적 사고방식을 지지해주기 위해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를 앞뒤 문맥을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두 주 전에 읽은 4장6절의‘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할 때 그 ‘아무 것도’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할 때 ‘모든 것’이 무엇인지 빌립보서 전체 문맥을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도 있다던가, 돈이 떨어져 배고플 때 마음만 먹으면 금방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고, 밀린 할부금 채워넣을 수 있다는 식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그분을 통하여 내가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입니다.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 힘은 바울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힘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안방 벽이나 거실 벽에 오늘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새겨진 액자를 걸어놓고 매일 아침 큰 소리로 그 글을 읽으며 ‘아자! 아자! 힘내라.  너는 할 수 있다!’  이렇게 힘차게 외친다면 과연 모든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일까요? 긍정적인 사고를 무조건 배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부정적으로 말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당연히 좋습니다. 믿음생활도 기쁘고 즐거움으로 해야지 체면 때문에 직분 때문에 마지 못하여 일한다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기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의 본래 의미를 배제한채 그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구호만 외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기 최면요법이나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이지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는 자세는 아닙니다.   

10절에,‘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것이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전에도 물질로 협력한 적이 있었으며, 자신들도 어려움 중에 있지만 나누는 일에 힘쓰던 정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멀리 떠나 있는 바울을 늘 마음에 두고 있던 차에 이번에 다시 바울에 대한 염려로 교우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생각만 하고 있지 않고 에바브로디도를 직접 보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9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혹시라도 이런 사실이 고린도 교회에 알려지면 성도들에게 폐가 될까봐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고 조심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할 때 한 푼의 생활비도 받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회였음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바울을 도울 준비가 안된 교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 바울이 재정적 어려움을 말하면 도움은 그만 두고 도리어 어려운 일만 발생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어린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는 재정문제에 대한 어려움을 일절 꺼내지도 않습니다.   

그대신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는 자기 손으로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생활하였고, 그외 필요한 모든 재정은 다른 교회로부터 온 후원금으로 충당되었습니다. 그 중에 마게도냐에서 온 성도들이 바울의 사역과 생활에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내가 여러분을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은 것은 그들의 것을 탈취한 셈이다’(고후11:8)는 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의 어려움에 동참했던 이 마게도냐 교회 형제들이 바로 빌립보 교회 교우들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형편과 육체적 고난을 염려하여 여러 번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자신들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을 위하여 기꺼이 나누고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더 많이 나누고 자주 섬기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는 점을 바울이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수요일 저녁에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는 교우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영적 어린아이 교회 안에는 몇 가지 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자기 파를 자랑하고 우리 믿음이 더 좋다고 우기던 사람들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다른 파당 사람들을 비방하며 뒤에서 수군거리고 형제의 흉허물을 들추어내고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속에는 우상숭배와 음란죄가 만연했던 문제아 교회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철학과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한 교인들이 있어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하고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교회는 말만 무성하고 자기 자랑만 무성하며 실제적으로는 문제거리만 안고 있는 교만한 영혼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교회에서 무보수로 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 그랬습니다. 아직 자신들조차 감당하지 못할만큼 영적으로 미숙아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첫 머리에서부터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까지 바울의 편지 내용은 이 교회를 향한 책망과 염려입니다. 첫번째 편지를 보내고 이어 두번째 편지를 보낼 때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내가 너희에게 가기 전에 너희의 죄와 부끄럼움을 회개하여 내 손으로 너희 중에 몇 사람을 책망하고 징계할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는 경고로 편지를 마무리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가리켜 어린아이라 부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큰 소리는 하지만 아직 육신에 속하여 살고 있는 너희를 내가 영적 어린아이로 대한다. 내가 그동안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먹이지 아니한 것은 너희가 아직 밥을 소화시킬만큼 성장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기 때문이며 아직도 그러하다’ 했습니다 (고전3:1,2). 우리 교회 갖난 아기들이 아직 엄마 젖을 떼지 못하거나 이유식을 먹이는 중입니다. 이런 아기들에게 어른들이 먹는 거친 밥을 주면 금방 탈이 나고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자녀들도 같은 원리입니다. 이제 막 출생한 영적 어린아기는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는 당분간 어린아기입니다. 아무리 성급하게 단계를 뛰고 넘으려 해도 아기는 아기이고, 어린이는 어린이이며, 청년은 청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목회서신 디모데전서를 보면  ‘새로 믿은 사람(믿은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감독의 직분을 맡기지 말 것이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라’(딤전3:6) 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를 믿은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교회에서 중직을 맡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모르고 자기 자랑에 빠졌습니다. 젖을 먹고 있으며 또 더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어른이 먹는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제 손으로 끌어 당기며 보채는 영적 어린아이였습니다. 

다시 빌립보 교회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의 이런 친밀한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편지의 마지막에서 빌립보 교회의 재정적인 협력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처지가 지금 곤란하여 이런 말로 도와달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풍요로움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풍부하고 궁핍할 때 그 어떠한 형편에 있어도 나는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감사하며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도 자족할 줄 아는 행동은 철이 든 어른의 행동이지 철없는 어린아이에게서는 아직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기쁨은 아직 어린아이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받고 듣고 보면서 믿음이 자라가고 그대로 따라 실천할 수 있을때 비로소 영의 양식이 되고 내 믿음의 보약이 되며 나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합니다.  오늘 드리는 이 말씀이 여러분이 먹어 소화시키는데 문제가 없고 내 영혼에 양식이 되고 영양분이 되어 나의 믿음을 더 한층 성장시키는 보약이 되기 바랍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각각 편지할 때 왜 그의 말투가 다르고 전해지는 감정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영적인 성숙도 차이였습니다. 천방지축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젖을 먹여야 했지만, 빌립보 교회는 이제 거친 밥을 먹어도 충분히 소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하며 기대하는 바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나와 함께 어떤 형편에서든지 만족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자는 권면이 아니겠습니까?    

14절을 봅시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 안에서 내가 어떤 형편에도 만족할 수 있지만 여러분이 나의 경제적 괴로움에 동참하여 나에게 기쁨을 주었으니 참 잘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폐가 될까봐 재정적인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넉넉한 후원금이 있다고 부를 축적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집을 사고 땅을 사는 식으로 개인 생활에 투자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없다고 불평하며, 있다고 사치하고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그저 어떤 형편에든지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이번 어려움에도 잘 견디며 지내는 중이었는데 빌립보 교회가 그 사정을 알아차리고 에바브로디도 편에 물질을 보내어 나의 어려움을 도왔으니 고맙다고 칭찬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번 뿐 아니라 전에도 같은 일에 동참했던 사람들입니다.15, 16절을 봅시다.  ‘빌립보 교우 여러분, 내가 처음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시절을 여러분은 기억합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물질을 주고 받는 나의 복음 사역에 도움을 준 교회는 여러분 뿐이었습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한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 바울에게 더 많은 선물을 보내달라는 뜻입니까?  혹시 그렇게 오해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 수고한 여러분에게 더 큰 열매가 번성하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나에게 보낸 이 물질이 여러분에게 복의 씨앗이 되어 여러분의 삶에 더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합니다. 여러분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준 것을 받으니 내가 풍족합니다.  이제 충분하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보내준 물질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하신 것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 믿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나에게 보내느라 수고한 여러분이 궁핍에 처하지 않고 더 큰 은혜를 누리길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빌립보 교회의  성숙함입니다. 바울의 개인 사정을 허물없이 나누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였으며 그만큼 성숙하였고, 어려운 교회를 위해 기꺼이 협력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며 면류관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다시 이 편지의 본 주제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과 기쁨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과 넉넉한 마음 그리고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문단은 사랑하는 교우들을 위한 축복과 문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하며 모든 성도들이 안부를 전하되 특별히 로마 황실에 있는 몇몇 믿음의 형제들도 빌립보 교우들에게 문안인사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어느새 감옥을 벗어나 많은 성도들에게 확장되었고, 로마 황제의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온 목적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권력을 얻으려고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온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모으려고 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로마에 가기를 소원했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결코 실패자가 아니었고 주 안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감옥에 있다고 우울하거나 위축이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감옥이 그의 설교단이었습니다. 구명운동에 열을 올리고 석방운동을 벌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바울의 고백은 이렇게 우리에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내가 머무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내가 있는 그곳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사역장이 되기 바랍니다. 환경과 형편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또 그렇게 살기를 힘쓰는 교우 여러분 심령 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는 어려운대로 감사하며, 풍성할 때는 풍성한대로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감사하며 만족한 삶을 누리십시오. 주안에서 항상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보여지는 믿음이며 주 안에서 얻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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