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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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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말가리다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고아원을 운영하다 보니까 종종 재정난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특별히 그 지역이 흑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흑인 빈민가였기 때문에 모금을 하는데도 한계가 따르고는 했습니다. 어느 연말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아이들에게 성탄절 선물은 해줘야하는데 재정적으로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말가리다여사는 원장이지만 모금함을 들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연말분위기에 한창 들떠있는 분위기입니다. 거기가서 모금을 하니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지나가다보니 술집이 있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 흥청망청하는 술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저리로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술취해 떠드는 사람들에게 연말을 맞아서 추위에 떨며 배고파하는 고아원 어린이들을 위해서 조금씩 도와주세요 했더니 대부분 무관심한데 한두사람 동전을 던져 넣는 겁니다. 

사람들 숲을 뚫고 지나가는데 탁자에 앉아 술을 먹고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다른 무슨일에 화가났던지 자기가 먹던 맥주잔을 말가리다 원장에게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왜 재수없게 술맛없게 왜 와서 방해하느냐 하며 소리치는 겁니다. 맥주잔이 원장님의 얼굴에 맞았고 그것이 깨졌습니다. 얼굴에서는 피가흘렀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제 무슨일이 일어날까. 큰일났습니다. 그런데 말가리다원장은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서 피를 닦습니다. 그리고는 떨어진 컵조각을 하나하나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던 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제게주신 성탄절 선물로 알고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추위에 떨고 있고 굶주려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선물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다 놀랐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싸울줄 알았는데 이 여인이 너무나 조용하게 감사하면서 그에게 모금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동전을 통에 던져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폐를 던지고 어떤사람은 봉투에 든것을 모금함에 넣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돌아보니 맥주컵을 던진 사람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지갑이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갑옆에 작은 메모지가 있었는데 이 돈을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써주십시오. 그렇게하고 그는 나가버렸습니다. 

이 원장은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라면 같이 싸웠을 것입니다. 경찰을 부르던가 고소를 하던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을 대했을 때 오히려 그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모금을 받을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방식은 세상사람들의 방식과는 뭔가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사람들이 하듯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믿는사람이나 믿지않는 사람이나 차이가 뭐가 있습니까. 오히려 더할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진정 그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불신자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1절 마지막에 보면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에게 지지말고 세상은 때로 악한 것입니다. 또 세상은 공중권세잡은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선한것을 내 놓을 수 없습니다. 악이 그 배후를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악에 대해 무릎꿇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악에게 또 다른 악으로 대항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 악의 배후에 있는 사탄과 악령과 마귀의 세력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마음으로 악을 이기고 정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디디며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와 인간관계의 갈등속에 부딪힐 수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인가하는 겁니다. 

그 방법의 첫 번째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말씀이 가장 필요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초대교회때는 핍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다는 것 자체 때문에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직장에서 예수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해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시어머니나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박해하고 핍박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같이 미워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줍하지 말라. 축복의 반대가 저주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축복할수도 있고 저주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축복할 의무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그 축복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이삭을 축복하시고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그들의 자식을 축복하는 것이고 이웃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축복할 수 있는 놀라운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때문에 시어머니께 핍박당하는 분들 있으면 그 시어머니를 많이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남편에게 박해받는 분들 계시면 남편을 더 많이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에게 핍박받는 분들 있으면 형제들을 축복하라. 우리에게는 축복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자녀를 축복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꾸짖고 때리고 훈계하는 것 보다 축복하는 것이 더 빨리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의 자서전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디 목사님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즐겨하고 축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말씀을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축복했더니 그 아아가 커서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또 술주정뱅이를 축복했더니 신실한 성도가 되었다. 어떻게 저런 술주정뱅이를 축복해 축복할만한 조건이 있어야지.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그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신실한 성도로 변하더라는 겁니다. 깡패를 축복했더니 충성스런 교회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혹은 여러분들을 박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멀리갈 것 없이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 가족을 축복하고 같은 성도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왜 축복해야 합니까? 

누가복음 10장 5절 이하에 보니까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집에 평안이 있을지어다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가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하면 누군가가 축복을 받는데 그가 그 축복을 받지않으면 거절하면 축복이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생각하면 놀라운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저주하면 만을 그 사람이 저주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저주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저주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을 빌고 축복을 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그러했습니다. 자기를 돌로치는 무리들을 향해서 오히려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을 보니까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기를 돌로치는 이들을 위해 주님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이 축복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축복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들을 축복하는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울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 사도바울이 됐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되기전에 거기서 증인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축복가운데서 그는 놀라운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저기 미워서 돌로치는데 죽으면서 우리를 축복을 해 그게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사울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저럴수가 있을까? 자기들을 돌로치는 무리들을 축복하며 죽어갈 수 있을까. 저게 그리스도인이란 말인가? 그는 그런 마음의 갈등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출발은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할 때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은 정말 쉬원일이 아닐겁니다. 어떤 사람이 내 가정을 파괴했다면 그리고 중상모략으로 나를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이라면 또 사랑하는 내 딸을 돈 몇푼 때문에 사창가로 팔아먹은 그런 사람이라면 아니면 술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하나밖에 없는 외 아들을 차로치여 죽였다면 그런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제정신으로는 그렇게 할수 없지만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니까 너희마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원수까지도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그 사람을 향해서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주대신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보니까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향해 축복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영광된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저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축복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축복할 수 없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보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를 복받게 하기위해 너희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악을 악으로 갚지말고 복을 빌어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축복할 때 그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두 번째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친히 원수갚지 말라입니다. 이말은 다시말하면 친히 복수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두고보자 두고보자 언젠가 내게 기회가 오면 두고보자.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갚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구약에는 동형복수법이라는게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율법에서는. 그러나 이것이 어찌보면 잔인한법이 아니라 동시에 자비의 법인것도 알수가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내가 미워 내 눈을 뺐다. 그러면 내가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눈하나만 빼겠습니까. 두 개 다 뺄지도 모릅니다. 누가 한 대치면 한 대쳤지 나도 똑같이 한 대칠거야 그러나요? 한 대를 치면 세대는 때려야지 직성이 풀립니다. 눈하다 뺐다고해서 나도 네 눈 하나 빼는 사람 없습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두 개 아니라 몇 개라도 뺄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계속적인 복수의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내 이 하나 부러뜨렸지 나도 한 개 부러뜨릴거야 안됩니다. 때리다보면 두 개 세 개도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복수를 막기위해서 성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반대하십니다.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너희는 원수를 갚지말고 원수를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원수갚는 일은 내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복수한다는 것은 우리가 심판자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심판자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실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반드시 복수하실 것입니다. 나는 복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고 축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친히 갚지 않은 인물을 꼽으라면 우리는 대표적으로 다윗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미워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의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격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동굴에서 사울왕이 용변을 보고 있었는데 동굴속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가까이서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번은 사울왕이 잠을 자는데 창과 물병을 옆에 두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지키지 않고 병사들도 잠들었습니다. 다윗은 얼마든지 가서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이지 않고 창과 물병만 들고 갔습니다. 증거로 삼기 위해서. 왜? 하나님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이면 그 죄가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차마 죽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친히 원수갚지 아니했습니다. 마지막 누가 원수갚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왕은 그 죄값을 다 뒤집어쓰고 결국 그는 길브아산 전투에서 적의 화살에 맞고 자결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남에게 복수하려 했던 사울은 결국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해 버렸는데 복수하지 않았던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복수해서 통쾌하다 그래서 기쁨을 얻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복수하지 않고 축복하는 사람이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문화는 복수를 통쾌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들 보면 복수하는 것이 굉장히 통쾌하게 나옵니다. 복수하는 것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나쁜놈은 죽어야 해 잘됐어 그런거 가지고 스릴을 느끼는 것입니다.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있습니다. 거기보면 탁구가 복수하지 않습니다. 계속 사람들은 탁구를 괴롭히고 죽이려하고 궁지로 몰아넣지만 탁구는 한번도 복수하지 않습니다. 선한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작가가 분명히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끝까지 선한방법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대결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서속에 복수에 대한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부르는 아리랑이라는 것. 남북이 만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못불러도 아리랑은 같이 부릅니다. 한이 맺힌 노래입니다. 그런데 아리랑 마지막에 가면 어떻습니까. 가사를 보면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분 은 뭔가 안됐으면 좋겠다는 가다가 발병이 나서 못갔으면 좋겠다는 이런 한 맺힌 정서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복수의 감정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가서 네가 잘될것 같아. 가다가 분명히 넘어질거야. 이런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민족에게도 이런 복수의 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네 원수를 축복하라. 그를 위해서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빅토르위고가 쓴 레미제라블 그 문학작품을 보면 장발장이 나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어느 겨울날 너무가난하고 배고파서 제과점에서 빵하나 훔쳤습니다. 배고파 죽을것 같아서, 그런데 그게 죄가 되어서 감옥에 가서 죄수생활을 수 십년동안 합니다. 빵 하나 훔친것 때문에. 어느 시에서 그는 시장이 되어서 가장 존경받는 시장이 됩니다. 

그런데 자벨이라는 형사가 계속 장발장을 따라다닙니다. 탈옥한 장발장 그의 정체를 파서 다시 집어넣기 위해서 끈질기게 그를 괴롭힙니다. 그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장발장을 추종하는 젊은이들이 못된 자벨형사를 잡아왔습니다. 이 사람 죽입시다. 이 형사는 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괴롭혀온 악질 형사입니다. 

그때 장발장이 그것을 만류합니다. 여보게 이사람들 이사람을 보내주세. 풀어줍니다. 그랬더니 자벨형사가 장발장을 향해 그럽니다. 당신은 내가 죽도록 미울텐데 나를 어떻게 죽이지 않고 보내주느냐고 합니다. 그때 장발장이 말합니다. 여보시오 세상에는 넓은 것이 있습니다. 바다는 땅보다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는데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입니다.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은 하늘보다 넓습니다. 하늘이 그를 용서하고 풀어줍니다. 

그때 자벨형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끄러워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하는 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원수갚고 보복하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것이 성경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수하지 말고 축복하는 이기 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원수가 주릴때 먹여주라. 목마르거든 마시게하라는 겁니다. 이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미워죽겠는데 이 사람이 굶주립니다. 먹을것을 주시겠습니까. 그가 목마른데 마실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참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것과 같다. 

초대교회시대에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중에 하나가 숯불을 냄비에 넣어서 냄비채로 머리에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숯불이 들어있는 냄비가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머리에 올려놓으면 머리가 타들어 갈 것입니다. 그런 작혹한 고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어려워할 때 그들을 도와주고 선을 베푸는 것은 그로 하여금 마음에 고통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뜨거운것을 올려놓으면 얼굴이 후꾼후꾼달아오를 것입니다. 그로하여금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가장 좋은 복수의 방법은 그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미운놈에게 떡하나 더준다고 합니다. 그런 속담은 참 마음에 듭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하라. 그것이 네가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를 모함하고 구덩이에 던져넣고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나중에 노예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형들을 선대합니다.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들에게 사랑을 베풂니다. 창세기 45장에 보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오히려 형들의 자녀들을 책임지고 훌륭한 학교에 보내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친히 복수하지 마십시오. 원수에게 선대하십시오. 그 외에도 성경은 아름다운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십시오. 우는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형제가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슬퍼하는 자와 슬퍼하는 것보다 즐거워하는 자와 즐거워하는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잘되고 성공할 때 정말 축복해주고 함께 기뻐하는 것 그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아프다. 사촌이 땅을 사면 이제 배가 아프면 안됩니다. 오히려 함께 즐거워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잘될때 오히려 축복해주고 격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너희는 아는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예전성경에는 평화하라 그랬는데 여러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평화의 관계를 가지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면 안됩니다. 화해의 기회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십시오. 친히 원수갚지 마십시오. 그리고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대하십시오. 이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바로 이런 축복의 사람들이 평화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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