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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 앞에 엎드린 죄 (창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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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엎드린 죄 (창 4:1-12)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오늘 말씀은 영화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최고의 명작 중의 명작인 스티번 스필버거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주인공은 독일 사람인 오스카 쉰들러입니다. 쉰들러는 자기 전 재산을 팔아 가스실로 실려 가는 유대인들을 구해주는데 그 수가 무려 1,100명이나 됩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자기가 돈으로 산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다 다시 뒤로 나와서 생명을 구원받게 되는 장면은 대단히 감격스러웠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쉰들러로 인해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이 쉰들러에게 금반지를 선물합니다. 그런데 그 금반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기억나십니까? 유대인들에게서 뽑은 금이빨에서 벗겨낸 금이었습니다. 그것을 선물한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쉰들러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타고 다니던 저 자동차를 팔았더라면 열 명의 목숨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독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달고 있는 핀을 보면서 “내가 이 핀을 팔았더라면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슬프게 후회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쉰들러가 죽었습니다. 죽고 난 후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무덤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엄숙한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꽃을 든 사람도 있고 그냥 온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무덤에 가서 존경심으로 애도합니다. 그 얼굴들을 보면 정말로 진지합니다. 어느 자식이 부모님 무덤에 가서 애도하는 표정들입니다. 

‘쉰들러 리스터’에는 쉰들러 외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 소장인 독일사람 아몬 궤터입니다. 아주 멋쟁이고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미남입니다. 아몬 궤터는 가정부로 선택한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여인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관객들을 참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몬 궤터는 가정부인 히러시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무자비하게 구타합니다. 참 무자비하게 때리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궤터는 동물만큼도 취급되지 않는 유대인 여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좋은 집에 살게 해주면서 사랑합니다. 그렇게 챙겨주고 사랑하면서 그 여인이 자기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헬렌 히러시는 아몬 궤터를 사랑하기는 커녕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혐오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알게 된 아몬 궤터는 너무 괴로워합니다. 그 여인은 다른 것은 다 아몬 궤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만큼은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알고 난 아몬 궤터는 너무 괴로워했고, 그 괴로움은 끝내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이 터져 구타로 나온 것입니다. 

이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포로 수용소장 아몬 궤터를 보면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본래 쉰들러도 돈을 좋아하고 옷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아몬 궤터처럼 똑같이 존경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쉰들러는 나중에 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에 반해 아몬 궤터는 끝까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혐오를 받고 끝내는 처참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은 궤터가 쉰들러보다 존경받고 사랑받을 기회나 그렇게 할 방법이 적었던 것인가? 또는 그런 기회가 아예 없었던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쳐도 그런 돈을 모을 수 있었고, 권력으로 쳐도 쉰들러 못지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몬 궤터는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 삶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궤터가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 라는 안타까움을 가집니다. 

제가 이처럼 영화를 보고 이런 안타까움을 가지는 이유는 ‘쉰들러 리스터’에 나오는 아몬 궤터와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몬 궤터처럼 인간 대접,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인류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셨는데 형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무서운 일이 생겼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때 그 장면을 그대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는 그 부모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형제 가인과 아벨밖에 없었는데, 이 네 사람밖에 없던 시대에 자기가 사랑해야할 동생을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면서 그런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사랑해야할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 하고 죽이거나 죽음과 같은 일로 끌고 가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있고, 형제간에도 있고 자매간에도 그런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살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것이 과연 가인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그렇게 화를 이기지 못하여 동생을 죽일만한 일인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인은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둘밖에 없는데 한 사람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또 다른 사람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았으므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로 그런 일을 해야 할 정도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아니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나쁜 행동들, 악한 일들을 하는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게 미워하고 속상해할 것 없고, 화낼 것도 없고 그렇게 괴로워할 것도 자책할 것도 없을 텐데 왜 그런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심리적 방어기제라는 문제입니다. 좀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아주 쉽습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 방어막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있다가는 내가 너무 괴롭고 부끄럽고 패배주의에 빠질 것 같기 때문에, 나만 버림받을 것 같은 괴로움 때문에 그 괴로움을 이기려고 방어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내 속에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꼭 내가 죽을 것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치는 방어막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고 말합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남편들이 아내에게 당신이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이렇게 키웠다고 책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꼭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야 늘 그렇지만 한 순간도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장관이 되지 못하거나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을 것 같으므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런 심리적 방어기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치인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사랑해야할 사람들끼리, 함께 힘을 합하여 회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사람들까지도 왜 이렇게 탓,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을까요? 심리적 방어기제를 동원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이유는 정직하지 못해서입니다. 아주 큰 문제입니다. 부정직 때문입니다. 실수했을지라도 그때 잘못이라고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방어기제를 편다고 계속해서 편할 것 같습니까? 잠시는 내가 견딜지 몰라도 절대로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정치인들이 정직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정직하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정직하지 못하는가? 입니다. 

우리들에게 심한 잘못이 있을 때에 끝까지 인정하지 아니하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을 어떤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다른 사람의 탓을 하고 있는가?’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제가 쉬이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문제 나라문제가 해결 날 텐데 탓을 돌리기 때문에 해결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심각하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가인에게 참으로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왜 좀 편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분을 내는가?’ 입니다. ‘인생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면 참 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으셨을 때,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그래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꼭 내 제사는 다 받아주셔야 합니까? 꼭 내 기도는 들어주셔야합니까? 어떻게 다 그럴 수 있습니까? 이유는 나중에 생각하면 됩니다. 

형제간에도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왜 문제가 생겨납니까? 내 동생이 나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 부모 탓으로 돌립니다. 장남이라고 또는 동생이라고 편애해서 그렇다고 탓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도 탓을 돌립니다. 나는 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다면 하나님께 탓을 돌립니다. ‘똑같이 공부했는데 왜 내 성적이 좋지 않습니까?’ ‘나는 얼굴이 왜 이렇게 생겼습니까?’ ‘나는 하는 일마다 왜 이렇게 막힙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 쉽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편합니다. 

옛날 대중가요 중에 ‘다 그런 거지 뭐’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찾아봤는데 그렇게 재미있는 가사는 아니었습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강단에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용 자체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노래 중간 중간에 ‘그러니까 미안 미안해’ 라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참 쉬울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도 “여보, 미안해요. 나 이런 것 알고 장가왔잖아.” 이렇게 인정하면 됩니다. 남편도 사업하다 실패하면 아내에게 “원래 그렇잖아, 당신이 나한테 속은 거야.” 라고 말하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 속았다고 소송 걸 아내가 있습니까?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우가 포도나무 밑으로 가다가 포도가 탐스럽게 열매 맺혀 있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뛰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도 포도송이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한참 동안 포도나무를 노려보다 “저 포도는 시다.” 라고 말합니다. 주어도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배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안 받아주셨을 때, 조금 심하다싶을 정도로 편하게 생각한다면 “좋습니다. 알았습니다. 안 받아주셔도 됩니다.” 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안 받아주셨는가?’ 라는 것입니다. ‘왜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는가?’ ‘왜 내가 회사를 잘못 이끌었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나를 외면하는가?’ 이런 심각함이 있어야 합니다. 앞의 문제까지만 생각하면 너무 경박한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가야합니다. 

‘왜 그런가?’ 라고 고민해야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아내에게 주었는데, 그리고 저 여자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저 여자는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가?’ ‘왜 저 아들은 나에게 인정과 존경을 주지 않는가?’ 심각하게 고뇌를 해야 합니다. 고뇌하는 인간이 인생 살맛이 있습니다. 이 정도 고뇌가 없을 때는 양념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 정도의 고뇌가 있을 때 양념 있는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셨는데, 제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습니까?’ ‘내 동생은 저렇게 멋진데 왜 나는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에 그럴 수 있습니까? 왜 내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으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르쳐 주시고 난 후 그렇게 해야지 그 말씀도 안 해주시고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항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말씀드리는데, 저도 하나님께 항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능력 있게 잘 하시는데, 저는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으면서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분들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 “하나님, 왜 저에게는 그런 재주를 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항의하였습니다. 참으로 못난 부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너한테 그 재주를 주지 않았다면 다른 재주를 주지 않았겠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각 하나님께“알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물을 수 있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뇌하면 대강의 답은 알게 됩니다. ‘왜 내 제사를 안 받아주셨을까?’ ‘왜 내 인생이 이러한가?’ ‘가장 사랑받고 인정받아야할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가인의 경우 하나님께서 제사를 지낼 때 동물의 피로 제사를 지내라고 말씀하셨는데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똑같은 제사를 지내면서도 성의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주일날 하나님께 헌금할 때에도 성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하는 헌금의 양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워낙 많으시고 여러분이 아무리 내어보아야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그것입니다. 단지 거기에 마음이 실려 있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일날 옷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워서 좀 편한 옷을 입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 없이 정장을 하는 것보다 반바지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오늘 너무 더우니까 이렇게 입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입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저는 소위 대표기도라고 하는 기도를 인도할 때에 ‘하나님, 참 죄송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 알아듣기 쉬우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지 않던 거룩한 말만, 이상한 말만 골라서 거룩하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별로 못 알아들으실 것 같습니다. 늘 하던 말이어야지 잘 알아들으실 텐데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음부터는 틀림없이 잘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원인이 잘못되었고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딸로 아들로 서야합니다. 종놈으로 서면 안 됩니다. 

조그마한 아이가 잘못하여 엄마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맞은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실컷 맞고 난 후 진짜 아들은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울고 나니 배가 고파 “엄마 나 밥줘. 그런데 오늘 너무 맞았으니까 그냥 밥은 안 되고 만두를 해줘. 그것도 군만두 말고 맛있는 소스에 물만두로 해줘”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진짜 아들입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니까요.” 라고 말하는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하나님을 잘 아십시오. 하나님을 느껴보십시오. 너무 생각 없이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잘 안 보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가인은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제가 묻습니다. 이제 가인에게 길이 없을 것 같습니까?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까? 우리 인생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잘못, 실수를 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방법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물으셨습니까? 하나님이 가인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짓고 그것으로 끝낼 수 없으니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용서로의 초대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바세바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이것과 비교하는 것은 뭐하지만 다윗에게 죄를 물으신 것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문제였습니다. 다윗이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불렀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그렇게 충직스러운 우리아를 처참하게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화가 나셔서 종을 부르셔서 네가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푹 엎드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용서했다고 즉각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끝낼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간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대로 끝낼 수 없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셨을 때 찾아오는 사람, 당신을 찾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집나간 탕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악합니까? 아버지가 살아계셨음에도 유산을 달라고 하여 탕진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빌어먹을 데도 없으니 돌아와서 아들이 아니라 하인으로 써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행동을 성경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먹자’ 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회복하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창세기 4장 그리고 3장을 보면서 죄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죄가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가만히 두었습니까? 기어이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다음 가인 세대입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가인을 유혹하여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죄란 참으로 고약합니다. 무섭기도 합니다. 얼마나 악한 것인가에 대해서 7절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죄가 너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죄는 여러분을 삼키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마치 맹수가 문 앞에서 기다리듯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향하여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무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죄가 이처럼 무섭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끝내고 죄를 이길 방법은 주시지 않는가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 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길 방법을 주시고 다스릴 방법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요? 7절에서 똑같이 답을 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있고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죄가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선인가?’ 라는 이 질문까지 가야합니다. 무엇이 선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셨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자기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선입니다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알았습니다.’ 한 대 때리시겠다고 하시면 ‘알았습니다. 많이 때리십시오.’ 이것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알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데르센 동화에 ‘영감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 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아마 영감님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는 일마다 엉터리였습니다. 돼지를 가지고 가서 닭 한 마리로 바꿔 오는 그 영감은 아직도 자기가 잘 하는 줄 압니다. 돼지는 한참 있어도 새끼 하나 낳을까 말까 하는데 닭은 매번 알을 낳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 때 할머니는 ‘영감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배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성경에서 그만큼 경건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욥은 ‘하나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까닭 없이 잘못 없이 이 욥의 전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일곱 아들과 딸 셋 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욥이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렇게 끝내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재산은 배로 주었습니다. 자식은 아들 일곱 딸 셋을 잃어버렸는데, 또 아들 일곱 딸 셋을 주었습니다. 이미 죽은 열 자식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선을 행하십시오. 어떤 선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만 있으면 절대로 죄가 여러분에게 덤벼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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