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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로 왕을 위한 애가 (겔 2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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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 왕을 위한 애가 (겔 28:12-19)

  
에스겔서 26장과 27장은 두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 28장은 두로 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과 나라는 하나의 운명체였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왕을 사랑했고, 왕을 사랑했던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던 당시에 두로의 왕은 엣바알 3세였습니다. 9세기 중반에 아합의 부인이었던 이세벨의 아버지가 엣바알 1세였고, 엣바알 3세는 엣바알 1세의 영적인 후손입니다. 엣바알의 의미는 바알 신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귀신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에스겔 28장 2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찌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엣바알 3세는 자신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다 중심에 앉았으니 자신의 덕 없이는 어떤 나라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세계 중심에 있는 것처럼, 바다 중심에 있는 신인 것처럼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든지 간에 정치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나라는 모두 망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사상은 옛날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로 왕도 자신이 신이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이런 사상으로 백성을 억누르는 나라가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정치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제가 선교 사역을 위해 연길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 북한 식당에서 식사를 한번 했는데 종업원들이 모두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닙니다. 제가 종업원에게 물었습니다.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인데 왜 배지를 달고 다닙니까?” 종업원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분이 내 영혼 안에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김일성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요즘은 김정일 신, 김정은 신이 등장할 판국입니다. 삼위일체를 흉내 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인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나라는 역사에 흥한 나라가 없었고, 망했습니다. 또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망하게 됩니다. 엣바알 3세는 한동안 권력을 잡았습니다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B. C. 587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두로를 침공하여 13년 포위시킨 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엣바알 3세도 죽었습니다. 

에스겔 28장 8절입니다.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육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찌라” 엣바알이 바다 중심에 있다고 하니깐 그를 바다 중심에서 살육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로 왕을 위해서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애가는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로 왕이 교만하여 멸망한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Ⅰ. 애가의 주제

애가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였던 오리겐이 이 본문은 사단의 기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17세기 영국의 사상가인 존 밀턴도 「실낙원」에서 사단의 기원을 말한다고 해석했습니다. 20세기를 풍비했던 세대주의 종말론주의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사단의 기원을 말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 있지는 않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사단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가 아담의 타락을 말한다는 해석에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지음 받은 존재는 아담이지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도 사단이 아니라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을 가리켜서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고 했습니까? 시적인 노래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종종 천사에 비유합니다. 애가가 노래이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천사라고 할 수 있다는 논거입니다. 이 본문이 사단의 기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고, 아담의 타락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이 노래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두 가지는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생각한 것은 동일한 패러다임(paradigm)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패러다임은 동사 변화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서 모든 동사가 같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즉 에스겔 28장은 하나의 변화의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에게 영광을 주시면, 영광을 받은 존재가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심판하시면 멸망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서 사단도 덮는 그룹이고, 계명성이었는데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결국은 천국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셨는데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는 말입니다. 두로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주었더니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이사야 14장의 바벨론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바벨론의 멸망은 사단의 멸망과 패턴이 같고, 에스겔 28장의 두로 왕의 멸망은 사단의 멸망과 패턴이 같으며, 에덴동산의 아담의 멸망도 사단의 멸망과 같은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즉 애가의 주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잠16:18)’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애가는 두로 왕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살육당하고, 심판당하고, 멸망하고, 열방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우주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Ⅱ. 애가를 지은 목적

두로 왕의 멸망을 보고 있는 유다 백성을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문제 삼고 있는 두로 왕의 교만이 아니고 유다 백성의 교만입니다.

두로 왕의 교만을 볼 때에 교만은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고 있습니다. 

첫째, 교만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자기 자신을 높입니다. 히브리어로 교만을 의미하는 단어는 10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 단어에 공통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입니다. 삶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에서 몰아내고 자기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교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면 나 자신이 들어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셋째, 교만은 뿌리에 해당하는 죄(mother sin)입니다. 죄중의 우두머리 죄는 교만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껍질을 벗기고 나면 가운데에는 교만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른 죄는 교만의 증세에 불과하고 그 뿌리는 교만입니다. 

넷째, 인간이 교만하면 사단이 받은 형벌과 같은 종류의 벌을 받게 욉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마귀를 정죄하는 정죄는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벌을 주었듯이 두로 왕도 교만하여 벌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다섯째, 교만은 스스로 속이고, 속습니다.(self-delusion) 두로 왕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신이라고 말했습니다.(겔 28:2) 그러자 하나님께서 신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겔 28:2)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에스겔 28장 9절입니다. “너를 살육하는 자 앞에서 네가 그래도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의 수중에서 사람뿐이요 신이 아니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엣바알 3세를 죽이려고 하는데, ‘나는 신이다. 신을 죽이려고 하느냐’ 이렇게 하고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두로 왕을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살육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만은 인간이 피조물이요, 유한한 존재요, 죄인임을 잊어버리는 데서 온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성을 안다면 교만에 빠질 수 없습니다. 16세기 스페인에서 성녀로 추앙받는 여자인 Teresa of Avila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공격하지만 나에 대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나는 정말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 진실을 알았다면 더 크게 공격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William Law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부끄러워서 차라리 늪지대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우리 속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교만이 있습니다. 이 교만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바꾸는 것은 스스로 평생 해야 할 영적인 싸움입니다. 

에스겔 28장에서 두로가 망한 이유는 하나님 보다 물질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8에서 두로 왕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유다 백성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이 고통이 오게 되었고, 포로 생활의 고통은 교만을 꺾고, 겸손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 과정인 것을 알아야 한다.’ 


Ⅲ. 교만의 원인

두로 왕은 지혜와 총명으로 교만했습니다.(4절) 큰 재물을 있어 교만했습니다.(5절) 지혜가 충족하고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교만이 왔습니다.(12절) 두로 왕은 하나님께서 갖가지 축복을 주셨는데 그 축복으로 교만이 온 것입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 마이클 칸즈(Michael karns)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교만의 다섯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내용에는 두로 왕의 경우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위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Position). 사람이 높아지면 교만해집니다. 바벨론 왕도 지위가 높아져 교만해졌습니다. 이사야 13장 13절로 14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바벨론 왕의 교만이 루시터의 교만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원래 루시퍼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지키는 경호실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보니 너무나 영광스러워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다가 마귀가 되고, 음부 구덩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업적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Achievement). 다니엘 4장 30절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이 소처럼 풀을 먹는 신세가 되게 하고, 머리털이 독수리 같은 신세가 되게 하고, 네 손톱이 새 발톱처럼 되게 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짐승처럼 살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이 말씀처럼 7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7년이 지난 후에 재정신이 돌아오자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단 4:27)
 
셋째, 부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Richness). 예레미야 9장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디모데전서 6장 17절로 18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부는 좋은 것이요 선한 일의 자원이 되지만, 부가 교만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넷째, 지식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Knowledge). 고린도전서 8장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사야 47장 10절입니다.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지식이 많아도 교만해지면 도리어 손해입니다. 
 
다섯째, 영적인 일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Spiritual Attainment). 성경을 많이 읽었고, 기도도 많이 하고, 40일 금식 기도도 했다고 명함에 써서 다닙니다. 모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교만의 원인이 되면 도리어 해가 됩니다. 


결론

현대 심리학에서 인간의 문제는 낮은 자존감(Sow Self-Esteem)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문제는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타임스지의 한 기자가 여섯 나라의 학생들을 초청해 수학 경시대회를 열었습니다. 경시 대회가 끝나고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설문지 내용은 ‘당신은 수학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미국 학생이 가장 자신 있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학생이 가장 자신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막상 성적이 나온 것을 보니 대한민국 학생이 1등이고, 미국은 6등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타임스지 기자는 미국의 교육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력은 길러주지 않고, 자존감만 높여 주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 위험한 위치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내 영혼을 채워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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