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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된 사역자(2) (빌 2: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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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사역자(2) (빌 2:19-24)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빌립보서 2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건강한 교회-자랑스런 성도-충성된 사역 자"에 대해서 연이어 살핀 바 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충성된 사역자의 사역의 원리를 사도 바울 자신을 통해서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충성된 사역자, 어떤 사람인지 살피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의 흐름과 전체적인 구조를 살피고 이어서 일반적인 교훈을 오늘 도출한 다음 충성된 사역자 디모데를 다음 주일 집중적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 동역자 디모데에 관해서 관심을 집중하고 짧게 자기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바울은 사실 그동안 빌립보 교인들이 너무 자기 자신들의 관심사에 관해서만 마음을 쓰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실로 인해서 답답해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종되신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는 찬송을 통해서 그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2:6-11).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관제와 같이 쏟아 붓는(2:18) 자신의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관심보다 빌립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2:20) 섬기는 자리에 자신을 내놓는 디모데의 모범(2:22)과 에바브라 디도를 통해서(2:25-30) 그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얼핏보면 빌립보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보낼 계획을 알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계속해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디모데의 충성된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찬송속에 나타난 주제를 여기서는 젊은 사역자 디모데를 통해서 뒤에는 평신도 사역자 에바브라 디도를 통해서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표준 새 번역으로 한 번 더 읽은 다음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봅시다.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알고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아서 그를 곧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곧 가게 되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이 19절에는 기본 일정과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알고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디모데를 보내려고 잠정적인 결정을 한 것은 우선 바울 자신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지금 에바브라디도 편으로 보낼 편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들의 형편을 앎으로 격려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20절에서 22절에 좀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나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디모데를 보내는 것이 당연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20절에서는 디모데만이 그 일의 적격자인지를 밝히고 이어서 21절에서는 디모데 말고는 도무지 부적격자들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덧붙인 다음 22절에는 복음을 위해서 바울과 함께 수년간 동역한 디모데의 사람됨은 그들 자신이 아는 사실임을 상기시킵니다. 

디모데를 소개하는 이 세 문장은 마치 디모데에 대한 추천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편지가 도착한 뒤에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디모데를 보내게 될 것인지를 바울의 입장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에바브라디도 편에 보낸 편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디모데는 가서 그 결과를 전해줄 것입니다. 

23절, 2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의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아서, 그를 곧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곧 가게 되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본래 일정을 다시 언급하면서 몇 가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형편이 어느 정도 방향이 정해진 다음 보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 자신도 가능한 한 빨리 빌립보에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본문 가운데 19절과 23-24절은 여행 일정에 대한 기록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바울은 복음에 대한 그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 모든 계획을 주 예수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1장 12절 이하에서는 자신을, 2장 5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을,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을 위한 충성된 사역자인 디모데를 모델로 제시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충성된 사역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배되는 삶을 산다는 사실입니다. 19절과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바울은 여기 놀랍게도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내는 일을 두고 "바란다"(19, 23절) 고 말하면서 자신의 빌립보 방문 계획에 대해서는 "확신한다"(24절)고 표현합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지 문장의 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변화의 의도를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를 통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디모데의 예기된 방문보다 더 확실하게 다시금 자신이 직접 그들을 방문하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려고 의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꼭 방문하리라는 확신을 갖도록 디모데의 방문과 관련한 "바란다"보다 강한 단어를 골라 "확신한다"는 단어를 자기의 방문 계획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는 일이나 자신이 방문하는 계획 모두가 단순한 인간적인 수준의 일이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둘 다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를 보내는 계획이나 자신이 방문에 대한 확신이 모두 "주 안에서" 되어지는 일임을 밝힙니다. 

"주 안에서"라는 구절은 그냥 관습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지나친 겸양의 표현이 아닙니다. 미래는 모두 주님께 달려 있기에 바울로서는 아무 것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기 비하적인 표현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 안에서"라는 표현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좋은 때나 나쁜 때나 바울이 믿고 실행하는 바는 주님의 주권 아래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모든 바램이나 확신조차도, 그의 계획이나 기대조차도 주님의 주님되심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바라는 것이나 확신하는 모든 것이, 앞날에 기다리는 어떤 일도 정확히 주님께서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자신을 주께 드렸기에 그의 앞날은 전적으로 주께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충성된 사역자 바울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결정에도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 전체를 통제하는 분이십니다. 그가 디모데를 보낼지 여부를 결정하실 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요 자신이 그들에게 속히 갈지 여부를 결정하는 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대한 특징입니다. 충성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통제되는 삶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말미암아 함께 묶이고 다스려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뜻을 아는 자이며 그 뜻을 떠나서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그 뜻으로 말미암아 지배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며 모든 행동이 그 분의 지시를 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께만 통제된 삶은 무한한 자유를 부여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통제된 삶은 또한 헌신의 기쁨을 만끽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부터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만 통제된 삶을 사지지 아니하시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단을 지금 내리십시오. 

주님께만 통제되기로 작정하면 여러분의 삶은 변합니다. 향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10%만 주님께 통제된 삶을 살기로 작정하면 울산교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 내부 공간이 달라진 것을 목도하며 우리 모두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달라지면 백만 울산시민에게 감동을 끼칠 것입니다. 백만 시민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습니까? 이제라도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신뢰하십시오. 한 걸음 움직이는 것도 주관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한 평생 사는 것도 우리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므로 언제나 "주 안에서" 여러분의 내일을 설계하십시오. 진학도, 취직도, 결혼도, 이사도 모두 "주 안에서" 결정되는 것임을 신뢰하십시오. 바울은 "주 안에서" 디모데를 속히 보내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이 곧 가기를 확신하면서도 "주 안에서" 되어질 미래임을 고백합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네로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변덕스런 네로가 내리는 결정조차도 궁극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뜻에 의해 지배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신뢰하십시오. 성공과 실패조차도, 삶과 죽음조차도 크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미래를 준비하신분이십니다. 

역사를 이러한 시각에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여정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원하시면 옥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그의 뜻에 따라서 처형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역자는 기적적으로 구출해서 사용하시고 어떤 사역자는 순교의 제물로 받으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최고 통치자들의 마음조차 우리 하나님은 보의 물과 같이 당신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능하신 그 분의 뜻이며 그 뜻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하나 본문을 통해 일반적으로 살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상하고 영적인 동시에 너무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 때문에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고백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교제 가운데 살고 있지만 빌립보 성도에 대한 직접적인 보고를 듣고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입니까? 

뒤에 나오는 에바브라디도에 관한 기록을 보아도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고향 빌립보 성도들로 인해서 향수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자연스런 감정을 포기해야 비로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생각은 아주 불건전한 것입니다. 예컨데 선교지로 떠나게 되면 부모님과 헤어지는 일로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결코 헌신이나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올해 우리는 "헌신․훈련․파송의 해"를 맞이해서 자녀를 선교지로 보낸 부모들을 위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5월 부모님 주일이 오면 선교지로 떠난 그 분들의 자녀를 대신해서 선교사님의 부모를 모시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원해서 선교위원회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님들 가운데는 심지어 아직 복음을 모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 딸들이 문화가 다른 곳까지 가서 전하길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냥 예수 때문에 자식 하나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서 그 분들을 하룻밤이라도 모시고 예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분은 없습니까? 

혹시 아직도 이런 일로 여러분 자신을 학대하는 분은 없습니까? 자연스런 감정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을 부족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더 이상 향수병이란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되어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향수병을 알고 고향 교회 성도들을 만나 보기를 간절히 원한 하나님의 충성된 사역자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여기 에바브라디도의 병든 것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는 사도를 보십시오. "너희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본래적인 감정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재능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되는 것은 잘못된 것들입니다. 고귀하고 참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합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절망적으로 아픈 사랑하는 형제 때문에 근심했으며 그의 생명이 보존된 데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러한 놀라운 위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여기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분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에바브로 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냅니다. 그것은 그가 빌립보에 도착한 모습을 볼 때, 여러분이 크게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크게 기뻐하리라는 사실은 나의 슬픔 또한 덜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에바브라디도의 얼굴을 볼 때의 모습과 기쁨을 생각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잊고 주 안에서 기뻐하는 자로 기뻐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배되고 하늘의 영역 안에 거하는 이 놀라운 삶이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순간에도 하늘과 땅에 충실한 삶입니다.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날마다의 삶에서 볼 수 있으며 거기서 주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또 보십시오. 그처럼 엄청난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바울 사도도 에바브라디도의 병을 기적적으로 고칠 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성령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가 어느 때에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밤에는 어떤 병이 모두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은사를 베푸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은 기적적으로 치유하시기로 작정하시는 한편 다른 사람은 그 병으로 죽는 것이 허락되기도 합니다.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지 못했다고 병자의 믿음이나, 가족과 친구들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치유 문제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이 자주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그 가운데는 어떤 병을 앓고 있든지 간에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충성된 신앙 인입니다만 치유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도 그를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기적적인 치유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원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반복해서 말합니다만 기적적인 치유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병으로 죽는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모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우리 가운데 병든 분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려워지는 데도 손놓고 앉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분들의 아픈 처지를 놓고 우리를 향한 최선의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해야 할 마땅한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우리의 절박한 상황을 아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맙시다. 우리의 딱한 형편을 두고 부르짖는 일에 열심을 냅시다. 이제 공간이 단장이 되었습니다. 기도실도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삼삼오오로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그룹 기도실도 준비되었습니다. 혼자서 어느 때라도 부르짖을 수 있는 개인기도실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부르짖는 일을 시작합시다.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를 기다리지 맙시다. 누구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께 나아와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울산 교회의 새로운 역사는 주권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한 수개월의 공사는 모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기를 위해서 한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충성된 사역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답게 충성된 사역을 감당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밤부터 개원하는 제자훈련원과 성경대학이 우리를 충성된 사역자로 만드는 좋은 훈련과정이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성취될 아름다운 내일을 여러분과 함께 꿈꾸는 복된 한 해가 이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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