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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들에게 보내는 편지 (벧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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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들에게 보내는 편지 (벧전 1:1-12)

    
지난 주일에 마친 빌립보서를 비롯하여 그동안 바울의 편지를 주로 읽고 설교하였습니다.  이유는, 바울의 편지가 신약에 나오는 다른 저자들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2개의 서신서를 썼고 그 분량도 신약 성경의 삼분의 일을 차지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썼고 분량도 짧은 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저자들을 필요적절하게 일군으로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은 한 가지도 잘 못하는데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은 참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베드로보다는  글을 더 많이 쓰고 잘 쓸 수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베드로는 글보다는 용기있게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내가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후11:16) 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변호할 때 했던 말입니다.   말보다는 글로 생각을 전달하는 일이 더 편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베드로는 우직한 성격에 그때그때 성령께서 감동하여 주신 말씀을 담대하게 전한 사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손으로 만져보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며 칭찬도 받고 꾸중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그 앞에서 고민하고 슬퍼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연약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하여 주께서 주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하며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신앙고백과 사도로서의 사명감을 봅니다.

오늘부터 차례대로 읽어가며 설교하려고 하는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로마(바벨론)에 있을 때 실루아노의 도움을 받아 쓴 편지입니다(벧전5:12).   실루아노는 실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바울과 함께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며 빌립보 성에서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고 복음 전하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터어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나그네들이 이 편지의 일차 수신자들이었습니다.   

8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한 것을 보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일찍 고국을 떠나온 유대인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거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 기독교도들을 포함하여 통틀어 부르는 호칭일 수도 있습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난 유랑인 혹은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나그네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서글픈 느낌이 드는데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는 나그네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 나그네의 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그네는 오래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하여 자기 백성 삼으려고 계획하셨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왜 특별히 선택하셨고 또 거룩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가는 그 밤에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히브리인들의 집은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어린양의 피뿌림이 구원의 증표였습니다.  천사들이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한 후 제물로 드려진 소의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출애굽기 24:1-8).   그 피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세우신 언약의 피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짐승의 피가 백성들의 생명을 대신하였으니 이스라엘은 피뿌림으로 세워진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로 거룩하게 구별된 언약의 백성이었다면,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고 순종하는 자를 가리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은 백성이라고 합니다.   죄의 삯으로 받는 사망의 권세와 영원한 심판이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넘어갑니다.   나의 의로움과 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정결하게 씻어 영원한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인들을 택하여 나그네로 부르심은 이 피뿌려 씻으심을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곧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을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택함을 받은 나그네들이 어떤 존재들입니까?    선택된 나그네는 하나님의 그 풍성한 긍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는 말은 부모님을 통하여 생명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난 자연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자연인은 세월이 흐르면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쇠하게 될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은 영원히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이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을 바라보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방랑자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땅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시 거류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항상 고향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처럼 외국에서 사는 사람은 영주권이 있고 시민권도 있지만 본토인들과 뭔가 다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낯선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그 나라 백성으로 사는 사람은 지금 머무는 이 땅을 잠시 거쳐갈 임시 처소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언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땅의 삶이 아무리 재미있고 안전하고 넉넉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낯선 타향일 뿐입니다.   더구나 타향살이가 험난하고 차갑고 매서운 고난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더욱 본향을 그리워하며 살기 마련입니다.    

나그네이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돌아갈 본향이 그 마음 속에 있으며 돌아갈 수 있는 확신이 있고 또 나를 기쁨으로 맞이할 부모형제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타향의 설움은 고통스럽지만 견딜만 합니다.   이 소망은 만세 전에 나를 택하여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선물이며 시련 가운데 살아가는 나그네들에게는 빼앗길 수 없는 산 소망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복입니다.   거듭남의 기쁨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확신이 없이는 이 험하고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견뎌낼 재간이 없으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현세의 즐거움에 눌러 앉던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삶의 압박과 두려움에 굴복하여 내 영혼을 어두움에 팔아버릴 수 밖에 없는 처량한 나그네 삶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을 날마다 사모하며 그것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며 감사함으로 살지 못하고 오직 썩어질 것과 더러운 것과 쇠하여 사라질 것들에 온 마음을 두고 산다면 그는 나그네가 아니라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정착민입니다.   입술로는 중생 체험을 말하지만 그 속사람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이 세상의 정착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나그네는 이 세상을 비관하고 아무런 소망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갈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편지 전체를 읽어보면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나그네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조목조목 나열합니다.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세상이니 대충대충 살거나 세상과 등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세 천국에서 불성실한 사람은 내세 천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하루 속히 망하게 해달라 기도하며 그들과 맞서 힘으로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어떻게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땅에서 깨끗한 믿음을 지켜 살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시련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는 편지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그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편지가 나에게 보내진 편지인 줄 믿고 주의깊게 읽어가며 내가 이 마지막 때를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살펴보기 바랍니다. 

세상은 영원을 향해 통과하는 다리에 불과합니다.   다리는 통과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지 거기 집을 짓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그 다리 위에 집을 짓고 나그네들에게 통행세를 받으며 배불리고 있습니다.   나그네들은 다리를 통과하며 잠간 근심할 일도 만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자녀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삽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1-3)하신 주님의 말씀을 베드로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친히 뵙고 모시고 보고 듣고 배운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는 나그네들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것처럼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베드로보다 믿음이 더 나은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2천 년이 지난 후에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도 그 무리에 속한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깨끗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만나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 시련은 믿음을 단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필수적인 훈련과정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나그네들은 로마 황제의 잔악한 핍박에 심한 고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시련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견디어 내라고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냈습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할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삽시다.’   믿음은 시련이라는 용광로 불을 통과할 때 불순물이 제거되고 진정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평안할 때는 그 진가를 잘 알지 못하지만 시련의 때를 통과할 때 불타버릴 것은 사라지며 깨끗하고 단련된 믿음이 정금같이 드러납니다.   참 믿음은 이럴 때 빛이 납니다.   중생의 증거는 불같은 시험을 만났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기쁨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베드로는 나그네 된 성도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포합니다.  이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나의 삶을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그때부터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이별하고 힘들고 따분한 인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오해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도 절반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기쁨도 없이 늘 화난 사람 얼굴을 하고 우울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을 산다면 그 삶이 소망과 긍정과 기쁨으로 충만해야 정상입니다.   현재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약속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실 영광스런 구원을 믿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슬픈 일을 만나고 답답한 일과 육신의 아픔으로 괴로움을 당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의 썩어질 육신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덧입혀 주시는 완전한 구원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이별의 눈물이나 후회와 통한의 눈물이 없는 완전한 기쁨을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기쁨을 잃고 사는 것은 예수를 믿는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그 사람이 우울한 자신의 성격을 치료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 산 소망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우울한 인생을 사는 것 그 자체가 불신앙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나그네 길에 잠시 근심할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것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때문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사랑함은 구원의 기쁨과 영광이 어떠함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연구하여 부지런히 살피던 것입니다.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수 많은 고난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그때가 언제를 지시하신 것일까 상고하였습니다.    부지런히 연구하고 상고한 그 섬김이 자기들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에 성취될 구원이라는 것을 계시로 알게 되었고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구원이 흩어진 나그네,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된 여러분들에게 임할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또 다른 사도들은 바로 그 은혜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 복음을 또 다른 성도들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선택된 나그네들, 하늘나라에 산 소망을 둔 성도들에게 하고픈 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 다니엘과 엘리야와 이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때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과 영광을 통해 이루신 구원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보다 더 복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고난의 삶을 통하여 뿌린 복음의 열매를 여러분들은 거두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복입니까?   ‘나는 주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여러차례 주님을 의심하고 배신하며 실망시켜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처럼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뵙지 않고도 주를 믿는 여러분은 나보다 훨씬 좋은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산 소망 가운데 살고 있는 나그네 여러분, 이 땅에서 만나는 잠간의 시련이 오히려 여러분을 정금보다 더 정결한 믿음으로 단련하여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영광을 통해 이루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진 이 복음은 천사들도 관심을 가지고 궁금하여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이 땅에 임하여 자기 백성들을 아버지의 처소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 영광의 날을 기대하며 하늘의 천사들조차 그 영광스런 구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질까 궁금하여 땅을 향해 몸을 구푸려 살피고 있습니다.  

이렇게 천사들도 부러워하며 궁금하여 기다리는 영광스런 구원을 기뻐하며 성도들을 격려하려고 쓴 편지가 베드로전서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영광스런 구원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나그네들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이 편지를 받는 주인공으로 살고 있습니까?   잘 모르겠다거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이 영광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영국의 찬송 시인 윌리암 윌리암스가 지은 ‘나그네와 같은 내가 힘히 부족하오니 전능하신 나의 주여 내 손 잡아주소서’와 ‘전능하신 여호와여 나는 순례자이니 내가 연약할지라도 주는 강하옵니다’ 가사처럼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에게 주어진 나그네의 길을 힘차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나그네의 삶 가운데 불로 연단을 받는 것 같은 시련이 있을지라도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그 고난을 견디고 이기십시오!  주님은 곧 오십니다.  주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나그네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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