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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 뿌리는 비유(3) (눅 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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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비유(3) (눅 8:11-15)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상고해 보는 중에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한 심령이니, 곧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단에게 진리의 말씀을 빼앗길까요? 주님은 ‘깨닫지 못할 때’ 빼앗긴다고 했습니다. 깨닫는 것은 말씀을 경청한 결과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 말씀을 나를 향해 하시는 말씀으로 받았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자세로 말씀을 보고 들어야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깊숙하게 심겨진 씨를 새가 먹을 수 있습니까? 들은 말씀을 한 쪽 귀로 흘리는 사람들, 말씀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단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바닥 같은 마음 밭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정신을 차려서 듣고, 그리고 언제나 말씀을 들을 때 나를 행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곧 싹이 나오긴 했으나, 해가 돋은 후에 뿌리가 깊지 못하므로 타져서 말라 죽어버렸다고 했는데, 이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했습니다. 

옛날 한국에 자동차가 별로 없을 때 한 트럭 운전사가 몹시 추운 겨울날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한 시골 아주머니가 등에 아기를 업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너무너무 추워서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트럭 운전사는 차를 세우고 ‘아줌마, 너무 추운데 이 트럭에 타고 가십시오. 그런데 그 애기부터 이리 주고 타십시오!’ 하고는 아기를 받아놓고서 자동차를 천천히 몰고 갔습니다. 그 때 빈사상태에 이르렀던 아기 엄마는 아기를 빼앗기는 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하여 따라오며 ‘내 애기 주세요!’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면 트럭 운전사는 멈추는 듯하다가 아주머니가 가까이 오면 또 자동차를 몰았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하고 나니까 그 아기 엄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그제야 차를 멈추고 아주머니를 태운 후 아기를 돌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 원망스러웠지만, 그것이 아기도 살리고 엄마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아무 어려움을 모르고 편안히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쉽고, 영혼이 빈사상태에 이르고 정신은 부패하여 영육이 망하게 될 위험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세시는 하나님께서는, 현재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미래도 보시기 때문에, 영원불멸의 영혼이 먼저 잘 되게 하시려고 때로는 환난도 쓰디쓴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타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세 번째의 밭 곧 가시밭과 같은 마음 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가시떨기는 팔레스틴에서 사시사철 볼 수 있는 잡초입니다. 그 종류도 약 20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가시떨기는 밭에도 산에도 우거져 있습니다. 모세도 불붙는 가시떨기 속에 계신 하나님을 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떨기는 다른 식물에 비해 성장 속도가 빠르고 햇볕을 가릴 뿐만 아니라 또 가시들이 많기 때문에, 가시떨기가 자라는 곳에 떨어진 씨는 비록 싹이 튼다 할지라도 재대로 자라지 못하고 결실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가시떨기는 곧 말씀 씨앗의 성장을 방해하고, 결실치 못하게 하는 신앙적 장애 요소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요소들을 본문에서는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고 했습니다.

잎만 무성해서 주님께 혼이 난 나무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제때도 아닌데 잎사귀가 무성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폼 잡고 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것을 미워합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얼마나 무성한가를 묻지 않습니다. 나무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나무의 위세가 얼마나 좋은가를 묻지 않습니다. 다만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를 맺었는가고 묻습니다.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 맺기를 간곡하게 권고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그러니까 잎사귀가 문제가 아니라 열매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무서운 요소는 밖에서 오는 환난이나 핍박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이란 사실입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오히려 핍박을 통해서 불길 같은 기세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 중 ‘밖의 것들’은 ‘안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참으로 좋은 환경을 주셨지만,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 내 속에 있는 근심, 내 속에 있는 유혹과 탐심이 마지막 결실을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1. 이생의 염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염려란 무엇입니까? 염려란 어떤 일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안달하며 속을 썩이는 걱정들을 말합니다. 이 걱정이나 염려라는 말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운다거나, 사전에 조사를 한다는 그런 말과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으로 전후좌우를 깊이 생각하여야 하며 지혜롭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우리의 지혜가 날마다 장성해가야 합니다. 성경은 다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 염려라는 말의 의미는 ‘분열’이란 뜻입니다. 염려란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마음이 나누임을 의미합니다.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서 오는 것이요, 그러므로 염려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염려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마 6:27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했고, 잠 17:22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염려란 대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살까?’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질병의 염려도 큰 것 중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염려와 걱정이 우리를 휩싸버리면 우리는 주님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염려 근심 걱정은 우리를 주님의 귀한 축복에서 끊어버리게 하는 무서운 장벽이 되고 맙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할 시간, 염려할 기력이 있으면 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빌 4:6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2. 재물의 유혹 곧 돈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돈은 우리 생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일부입니다. 그 때문에 돈에 대한 견해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생활이 절대로 바르지 못합니다. 돈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 다음으로 능력이 있는 듯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mighty 하지만 almighty 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 전능하시다.” 돈이 못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복음송가 중에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은 돈으로 못갑니다. 또 모든 부자들이 한결같이 고백하고 있듯이 행복도 돈으로는 못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물의 유혹이란 것은, 마치 돈이 우리로 하여금 이것만 가지면 우리가 행복하고 만사형통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재물의 유혹이란 말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채울 수 없는 만족을 약속해 주며,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든지 동경하는 사람에게, 이것만이 진실로 행복을 준다고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성경의 귀한 진리 앞에 서있습니다. 성경은 재물의 유혹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의 유혹이 그로 하여금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지 못하게 했고, 영생에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재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은 30에 주님을 팔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 재물의 유혹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수많은 사기 사건을 낳고, 돈에 팔려 결혼을 하거나 돈 때문에 이혼을 하고, 돈 때문에 위증을 하고, 돈 때문에 강도를 하고, 돈 때문에 독살을 하고 살인을 합니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전쟁을 일으킵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은 이렇게 무서운 악을 낳게 하고, 사람들을 이렇게 악독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 재물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서 믿음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믿고 의지할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했습니다. 여기 ‘떠났다’라는 원어의 뜻은 ‘방랑자’라는 뜻입니다. 정함이 없이 이곳저곳 정처 없이 다니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궤도를 돌아야 할 별이 궤도를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험천만한 모습입니까? 이 재물의 유혹이 어떤 때는 고백한 진리의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도록 만듭니다. 진리를 떠나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듭니다.

그런데 재물의 유혹은 돈이 우리에게 참 만족을 줄 것처럼 환상만 줄 뿐, 실제로 그러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유명한 부자가 자살을 했습니다. 호텔에서 투숙하다가 자살을 했는데 소지품을 살펴보니까 3만 달러가 그의 지갑 속에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편지를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돈더미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고독과 권태를 이겨 낼 수 없어서 죽는다. 

내가 뉴욕에서 평범한 일군이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런데 이제 백만장자가 되고 보니 한없이 슬프기에 나는 죽음을 선택했다.” 이것은 신문에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재물의 유혹은 우리에게 한없는 환상만 일으킵니다. 끝없는 탐욕만 일으킵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더 재물을 사모합니다. 재물이 적은 사람은 많아지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합니다. 그래서 무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된 자녀들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한 때 지상 최대의 부자였던 미국의 폴 게티가 “내가 두 달만이라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내 전 재산을 다 주겠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부인을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그리스의 대부호 오나시스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라는 말을, 그의 자서전에서 가장 큰 글씨로 써서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돈이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 행복이 아닐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재물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우리의 곁을 떠나는 것을 성경은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금고를 만들고, 열쇠를 채우고, 그렇게 해놓으면 도둑이 안 들것 같은데 그래도 도둑이 뚫고 들어옵니다. 세상의 도둑들만 우리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화재가 나서, 어떤 때는 병마가 와서, 어떤 때는 뜻하지 않았던 우환질고로, 어떤 때는 전쟁이 일어나서 다 가져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내게 주신 재물을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언젠가 재물을 빼앗기는 날이 옵니다. 아니 내가 아무리 쌓아 놓아도 그 재물을 손 하나 대보지 못하고 놔둔 채 세상을 떠날 때가옵니다. 그래서 “돈은 내가 쓴 것만이 내 돈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쌓아 놓은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경고할 때는 모르다가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사람들은 “아, 성경말씀이 맞구나!”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아요?

2)땅에 쌓아 둔 재물은 동록이 해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보화라고 생각했던 것은 언젠가 빼앗기게 될 날이 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꺾어 놓아도 그 꽃은 이내 시드는 것처럼, 가장 요긴한 우리의 건강도 곧 시들고야 맙니다. 아름다운 용모도 후패의 과정을 지날 때 추해져만 갑니다. 이렇게 우리의 보화들은 다 시들고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보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내 시간과 내 돈을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주님께서 맡긴 이 재물을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생활이 어려우면 곧장 줄이고 싶어 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송아지’ 이야기를 여러분 들어보셨지요? 어떤 사람이 암소를 길렀는데 어느 날 이 암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 낳았습니다. 농부는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잘 기른 다음에 팔아서 하나님께 드려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부인이 옆에서 “여보,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 드릴 송아지를 아예 정하세요!” 라고 했지만 남편은 “어느 것을 드려야 할까 미리 정해 두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 잘 키운 다음에 한 마리를 팔아서 드려야지!” 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들에서 돌아와 비참한 음성으로 한다는 소리가 “여보, 오늘 하필이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라고 했습니다. 그 때 부인이 “여보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정한 바 없지 않아요?” 라고 하니까 남편은 “그렇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벌써 죽은 송아지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었거든”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송아지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드려야 할 부분을 이런 식으로 떼먹지 않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의 향락이라고 했습니다. 

향락이란 세상의 쾌락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유익한 것 같고 천국의 복락도 좋은 것 같지만, 우선 당장 이 세상의 달콤한 쾌락을 포기할 수 없어 신앙과 바꾸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향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타고르는 쾌락을 두고 이슬방울처럼 덧없다고 했고, 또 그것은 웃는 동안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은 혈기왕성한 젊은 요셉에게 있어서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유혹은 매우 노골적이었습니다. 요셉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모르게 쾌락을 즐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요셉이 능히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입니다. 요셉은 여인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는 말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둘째, 주인에 대한 의리였습니다. 주인은 요셉을 믿고 집안의 모든 것을 다 위임하였으나 자기 아내까지 맡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요셉은 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망보다, 영원한 꿈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이후 자기 민족을 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꿈을 가진 사람은 세상 향락에 순간의 쾌락에 유혹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 중 세 번째로 가시밭에 떨어진 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그리고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시밭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래서 불신앙과 같은 염려를 하는 대신,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 유혹을 이기려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임을 명심할 것이며, 또한 돈이 우리에게 결코 참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세상의 향락보다 교회의 풍속과 구주와 맺은 언약을 더 좋아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아름다운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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