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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감동시키십시오! (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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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감동시키십시오!  (막 12:41-44) 


1. 아빠를 감동시킨 아이 

이 글은 “어느 아빠의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로서 주인공들은 실존인물이고 글의 내용은 실화입니다. 

아내가 우리 곁을 떠나고 1년 쯤 된 어느 날, 출장 때문에 아이에게 아침도 챙겨주지 못한 채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와 인사를 나눈 뒤에 양복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습니다. 그 순간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빨간 양념 국물과 손가락만한 라면의 면발이 이불에 퍼질러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컵라면이 이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 방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던 아이를 붙잡아 장딴지며 엉덩이며 마구 때렸습니다.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야단을 치면서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아들 녀석의 울음 섞인 몇 마디가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아빠가 가스레인지 불을 함부로 켜서는 안 된다고 하셔서 보일러 온도를 높여서 데어진 물을 컵라면에 부어서 하나는 제가 먹고 하나는 아빠 드리려고 식을까 봐 이불 속에 넣어둔 것이에요.”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틀어 놓고 울었습니다. 아내가 죽은 후, 저 나름대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같습니다. 

그 후 아이에게 또 매를 들었습니다. 일하고 있는 회사로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다급해진 마음에 조퇴를 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찾았죠. 동네를 이 잡듯 뒤지면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놈이 혼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더군요. 집으로 데리고 와 화가 나서 마구 때렸습니다. 하지만 단 한차례의 변명도 하지 않고 “잘못했다”고만 하면서 빌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날은 부모님을 불러 재롱잔치를 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7살짜리 아이는 유치원에서 글자를 배웠다며 하루 종일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아이는 초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차례 사고를 쳤습니다. 그 날은 성탄 전날,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우리 동네 우체국 출장소였는데, 우리 아이가 주소도 쓰지 않고 우표도 부치지 않은 채 300여 통의 편지를 넣는 바람에 가뜩이나 바쁜 연말 우체국 업무가 지장이 많다는 전화였습니다. ‘아이가 또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불러서 매를 들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변명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잘못 했다”는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그 편지들을 받아 온 후, 아이를 불러놓고 “왜 이런 짓을 했냐?”고 했더니, 아이는 울먹이며 “엄마한테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순간 울컥하며 나의 눈시울이 빨게 졌습니다. 아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니?” 그러자 아이는 “그 동안 우체통에 키가 닿지 않아 써오기만 했는데, 오늘 가보니깐 손이 닿아서 다시 돌아와 그 동안 써 놓은 것을 다 들고 갔다”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는 천국에 있으니 다음부턴 적어서 태워버리면 엄마가 볼 수 있다”고 한 뒤, 편지를 밖으로 들고나가 라이터 불을 켰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편지 하나를 들었습니다.
보고 싶은 엄마에게 
엄마, 지난주에 우리 유치원에서 재롱 잔치를 했어. 
근데, 난 엄마가 없어서 가지 않았어. 
아빠한테 말하면 엄마 생각날까 봐 말하지 않았어.
 
아빠가 나를 막 찾는 소리에 그냥 혼자서 재미있게 노는 척 했어. 
그래서 아빠가 날 마구 때렸는데, 얘기하면 아빠가 울까 봐 절대로 얘기 하지 않았어. 
매일 아빠가 엄마 생각하면서 우는 것을 봤어. 
근데, 엄마! 나는 이제 엄마 생각이 안나. 엄마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 
보고 싶은 사람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자면 그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고 아빠가 그랬어. 
그러니깐 엄마, 내 꿈에 한번만 나타나.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약속해야 해. 
편지를 보고 또 한 번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이하 생략)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빠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 아빠와 우리 모두를 감동케 한 아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어떻길래, 예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을까요?

2. 주님을 감동시킨 여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면 ‘이방인의 뜰’이 있고, 이어서 ‘미문’이라는 문으로 들어가면 ‘여인의 뜰’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고, 또 무리들을 가르치신 후 ‘여인의 뜰’로 가셨습니다. 그 여인의 뜰에는 13개의 헌금 궤가 있었는데, 그 중 9개는 성전 세와 각종 제물을 위한 것, 즉 제물을 위한 곡물과 포도주와 기름 등을 사기 위해서, 그리고 희생 제물을 태우는데 사용되는 나무와 제단위의 번제로 드려질 향료 및 금 그릇들의 유지비 등을 위한 헌금 궤였습니다. 

나머지 4개는 각종 구제를 위한 헌금 궤였지요. 이 헌금 궤를 ‘나팔 궤’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는 윗부분은 넓고 아랫부분은 좁아서 마치 나팔과 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이 헌금 궤에 헌금을 했고, 사람이 많을 때는 줄을 서서 헌금 궤에 헌금을 하고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헌금궤 옆에 앉아계셨는데요. 그 이유는 아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과 차례로 논쟁을 하신 후, 피곤하셔서 잠시 궤 가까이에서 쉬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헌금하는 사람들 보게 되었고, 그 중에서 아주 대조되는 사람들의 헌금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는 부자들이 헌금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부자는 “부자”라는 말에 걸맞게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헌금할 때 누가 얼마를 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헌금하는 사람들의 헌금 액수를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일설에 의하면, 헌금 궤를 관리하는 사람이 헌금 바치는 것을 보거나 직접 받아 자신이 대신 궤에 넣으면서 바치는 자에게 그 액수를 공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그 헌금 궤에 돈을 넣을 때 걸리는 시간과 떨어질 때 나는 소리 때문에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누가를 얼마를 헌금했는지가 공개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헌금 액수가 공개되면 많은 돈을 헌금한 사람은 어깨를 으쓱 하면서 거만하게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가난한 과부는 아주 적은 금액을 헌금 궤에 넣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 없이 홀로 사는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는 경제력이 전혀 없는 절대 빈곤층이었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가난했기에 그녀가 바친 헌금 액수도 정말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헌금한 적은 양의 헌금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적은 헌금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에 감동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첫 번째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액수보다 그녀의 중심이 주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부자들이 얼마의 헌금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41절에 보면 ‘여러 부자는 많이 넣었는데’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날따라 여러 명의 부자들이 제법 많은 액수를 넣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많이 드린 사람들은 칭찬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도대체 과부는 얼마의 헌금을 했길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을까요? 42절에 보면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라고 했습니다. ‘렙돈’이란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란 로마 사람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렙돈’과 ‘고드란트’는 두 나라의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을 말합니다. 이 렙돈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128이었습니다. 이것을 요즘 시세로 환산해 보니까, 최근 공사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이 평균 7만원이더라고요. 

이 7만원의 128분의 1이니까, 약 550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는 두 렙돈 즉 약 1000원 정도를 헌금한 것입니다. 부자가 한 헌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액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성전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의 1/10, 즉 10%를 성전 헌금으로 내었다고 하는데 그 만만치 않은 금액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헌금은 칭찬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금액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녀의 헌금을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1억 원이 1만원보다 크다는 것은 절대적인 명제입니다. 그렇죠? A라는 사람이 1억 원을 헌금하고, B라는 사람이 1만원을 헌금했다면, 분명 A가 B보다 훨씬 많은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볼 것이고, 따라서 A는 높이고 B는 무시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자가 드린 많은 돈과 한 가난한 과부의 렙돈 두 닢은 비교가 안 되는 액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완전 뒤집어버렸습니다. 절대적으로 적게 한 과부의 헌금이 가장 많이 한 헌금이라고요. 키에르케고르는 말했습니다. “세상은 부자가 가장 많이 내놓았다고 말한다. 세상은 돈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랑만을 생각하시는 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까지 많은 돈이 필요하시지 않다. 혹은 더 적은 액수만 있어도 된다. 그리하여 여기 참으로 야릇한 계산이 등장한다. 아니 괴상한 셈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은 어떤 수학 책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은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내었다고 하신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중의 일부, 그것도 아주 적은 일부였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전 재산이자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가 어느 누구보다 많이 드린 것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그녀의 중심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6:21). 즉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그 사람의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과부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그녀는 성전의 그 으리으리하고 웅장함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또 화려한 옷을 입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헌금하는 즉시 헌금 액수가 공개되는 현장, 거기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가운데 앞 사람이 얼마를 넣었다는 말을 듣고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실 흔한 말로 “쪽 팔리는 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헌금을 하나님과 드리는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해야지, 왜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서 사람 기를 죽이고 망신을 시키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사실 그녀는 자신의 두 ‘렙돈’이 성전 살림살이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의 거액 헌금이나 순례자들의 1/10보다 턱 없이 모자라는 액수 때문에 주눅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과부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했더라면 그녀는 헌금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과부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이 여인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돈이 그녀의 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보물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예배하는 성전이었습니다. 주님과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기에 자신의 전부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바로 이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 중심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녀는 하나님께 가장 많이 드린 여인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38~40).”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겉은 정말 화려했고, 무엇보다 경건했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본보기가 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중심에 대해서 뭐라고 지적하십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자들이며, 겉으로 길게 기도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이 없는 위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과부보다 더 많이 헌금한 사람들은 대부분 규정에 따라, 또는 체면치례로 헌금을 했을 뿐이지, 그 중심은 하나님과 멀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과부는 그 중심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 중심으로 인하여 주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겉모양이나 헌금액수가 아니라 중심으로 주님을 감동시키시기 바랍니다.

2) 둘째로 과부가 주님을 감동케 한 것은 헌금을 통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자는 거액의 헌금을 해도 생활에 큰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액을 헌금으로 드렸기에 앞으로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할 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이 여인이 두 ‘렙돈’ 중 한 렙돈만 드렸어도 예수님은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재산의 절반, 생활비의 반을 드렸으니까요! 그러나 여인은 한 ‘렙돈’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 다 드리고 싶었던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이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리게 되었을까요? 

사실 당시 공식적인 구제의 대상인 이 여인은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왜요? 자기 자신이 성전에서 지금 하는 구제헌금의 수혜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사람들이 많이 헌금할수록 나 같은 가난한 과부에게 주어질 몫도 많아지겠지? 하나님, 오늘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헌금을 많이 해서 제게 구제비로 주어질 몫이 많아지게 해주세요. 보세요. 

이제 제 생활비가 달랑 1000원밖에 남지 않았잖아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헌금 궤를 지켜보는 입장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이 헌금한 것을 얻어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받기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은 없을 것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누기를 더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과부의 모습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은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이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믿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고,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못사는 것도 아니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살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신지라, 그 주님께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는 주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감동케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연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은 가난하지만 신앙이 깊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직물 공장에서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집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을 계속해서 초청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흥회 마지막 날,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특별 헌금을 거두는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도 외국 교회들이 그렇게 헌금을 합니다만, 당시 그 교회도 둥그런 쟁반을 돌리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참석한 리빙스턴이 헌금 쟁반 위에 헌금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기에 턱하고 올라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황하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연보 쟁반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서면 어떻하니?” 그때 리빙스턴이 말했습니다. “난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내 몸을 바치는거예요.”라고 하면서 꿋꿋하게 쟁반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물론이고, 未開한 흑인들에게 文明을 가르쳤고, 의사도 약품도 없는 흑인들을 직접 치료해 주었으며, 백인들의 흑인 노예 매매를 반대하고 금지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리빙스턴으로 말미암아 全 아프리카가 감동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아프리카 대륙이 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드림에 감동하신 결과였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감동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을 감동시키는 성도

말씀을 맺겠습니다. 

웃음과 유머로 사람의 내면을 치료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웃음유머치료교실>에 오시는 80대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그 할머니는 항상 행복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셨습니다. 웃음 전문가가 보기에도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그렇게 항상 웃고 다니는 비결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건강 하시죠? 요즘 좋은 일이 많은가봐요?” 그러자 그 할머니가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응, 아주 아주 건강해. 말기 위암 빼고는 다 좋아.” 이 대답에 그 웃음치료사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백만 볼트 전기로 감전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위암 말기셨구나! 그런데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항상 웃으셨구나!’ 할머니는 계속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너무 행복해”라고.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나 지금은 집도 있고, 남편도 있고, 자식들도 다섯 명이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암이 몸에 들어와서 예정된 시간에 난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또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냐?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몸에 죽을병을 짊어지고서, 사형선고를 받은 채 살아가면서도 유머를 간직한 그 할머니는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신앙생활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예 중 하나가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참다 못하시어 ‘이제는 그들을 멸하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출32:31,32). 그는 하나님을 拒逆하고 자신에게 反抗한 이스라엘이 그 당연한 징벌로 이 땅에서 없어지고 자신의 후손이 대신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멸망하게 버려두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케 했고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셔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는 솔로몬입니다. 

이제 막 왕이 된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마리의 희생 제물로 일 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배다른 형제들과 아버지 세대의 관료들과 정적들, 그리고 외교와 안보와 국방과 경제 등 구할 것이 정말 많았을텐데도 자기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런 모습에 감동하셔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은 다른 것까지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박국서 3장 16절부터 19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 집안이 기울어 갈 때,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 생활이 불안할 때, 내 앞길이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 나라가 망해갈 때, 거의 대부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했습니다. ‘아무리 원수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내 가진 모든 것이 없어져도, 하나님만 함께하신다면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시자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 구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는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박국의 신앙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여러분도 이들의 반열에 서기를 원합니다. 어떤 반열입니까? 주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의 반열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감동시킵니까? 그 중심이 주님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중심이 주님으로 가득 찬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태도에서, 눈빛에서, 말에서, 그리고 그의 모든 것에서 ….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을 드리느냐? 얼마를 드리느냐? 어떤 방식으로 드리느냐?’는 것보다 ‘그 중심이 오직 주님을 향하고, 그 중심이 주님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중심에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느냐’는 것이 주님을 감동케 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것이 주님을 감동케 합니다. 중심 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지금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것을 주님께 드리는 삶, 그것이 주님이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중심과 전 삶이 주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주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삶을 살아 주님을 늘 감동시키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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