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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년을 사는 사람들 (행 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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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을 사는 사람들 (행 2:43-47)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 희년법

가을바람 선선하더니, 장마처럼 지루하게 비가 내립니다. 옛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백로 추분 절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백곡이 열매 맺고…백곡이 이삭 패고 여물 들어 고개 숙이니, 西風에 익은 빛은 黃雲이 일어난다.” 명랑한 가을볕은 아직 저 모퉁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듯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름답게 무르익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늘은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내려줍니다. 하지만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해와 비는 누군가에게는 기쁨이고 은총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이고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여유로운 사람들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시 한 자락을 읊을 수도 있겠지만,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는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같은 조건이라 해도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그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요즘 와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계층과 계급으로 갈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와 특권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강남’이라는 말은 이제 서울의 한강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부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기표(記標, signifiant))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공정 사회라는 화두를 던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위층 자제들이 누린 취업 특혜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공정함이 없는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남는 일에 몰두할 때 우리는 하늘을 잊게 마련입니다. 삶에 대한 외경심은 사라지고, 전쟁터로 변한 세상에서 마음은 황폐해지고 맙니다. 냉소주의가 판을 치고, 신뢰의 토대가 무너지고 나면 사회 통합은 불가능해집니다. 

성경은 이런 세상의 불공평함을 주기적으로 갱신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희년법입니다. 희년禧年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이면 49년이 되고, 그 다음 해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뿔 나팔을 길게 불어 희년이 도래했음을 알렸습니다. 희년이 되면 남의 종살이 하던 사람들은 자유인으로 돌아갔고, 빚에 몰려 남에게 넘어갔던 땅도 원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피치 못하게 지게 되었던 빚도 다 탕감되었습니다. 

희년의 소식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음입니다. 꿈에라도 수양의 나팔 소리가 들려와 이 땅의 불공평함이 지양되는 날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희년법의 신학적 근거는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요 거류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의 주인이신 주님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사람살이의 마당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희년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불가능한 꿈이라고 도외시하기 전에 진지하게 성경의 정신을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취임설교라고 일컬어지는 나사렛 설교는 예수의 삶이 희년의 꿈을 실현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다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고는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4:21)고 선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죄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희년을 실현하는 일에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 ‘서로 함께’의 공동체

희년을 구현한다는 것은 ‘더불어 삶’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여러 가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기본은 부모형제 일가친척이지만, 살아가면서 그물코는 더 늘어납니다. 학교, 직장, 동창회, 향우회, 동호회, 군대, 교회, NGO 단체…. 우리 삶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계 속에서 영위됩니다. 그러다보니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한 모임도 있지만, 사회적 문화적 여건에 의해 주어진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에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남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개체가 아닙니다. 무인도에 떠밀려 간 로빈슨 크루소도 문명 세계에서의 기억을 통해 불확실한 시간의 공포를 이겨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는 인생길에서 만나온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맺어온 관계의 흔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커피를 좋아하는 누군가와 만났기 때문일 것이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책을 가까이 하는 이들과 가까이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속에는 부모님도 계시고, 형제자매도 있고, 벗들과 교우들도 있고, 일상 속에서 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타자들이 고마울 때도 있지만 싫을 때도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징역살이는 여름보다 겨울이 낫다고 말합니다. 겨울에는 서로의 체온에 감사하며 밤을 지나지만, 여름이면 옆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진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마치 화로 하나가 옆에 있는 것 같을 테니 말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 공동체는 사랑과 이해와 관용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감사를 통해 유지됩니다. 이 마음이 무너지면 공동체는 와해되고 맙니다.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는 바로 미움과 불신 그리고 원망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잠15:17)는 말씀에 모두 동의하실 줄 압니다. 

하지만 삶이 어려워질수록 공동체와의 일체감은 점점 옅어져 갑니다. 먹고 살기 바빠 미처 남을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해합니다. 그 곤고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예수님이 꿈꾸셨던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어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함께 지향해야 할 가치를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가다가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줄 이웃이 있음을 믿으며 가야 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서로’(allenron)라는 단어입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읽어보겠습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12:10)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롬12:16)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롬15:7)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6:2)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살전5:11) 

저는 이 구절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낭독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 성령이 중심

우리에게는 이런 공동체의 모범이 있습니다. 성령 강림절 이후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인류였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능력 안에서 그들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을 기쁘게 선택했습니다.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들은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은 삶의 방편이 아니라, 진실의 문제였습니다. 

‘어떻게’라는 물음보다는 ‘왜’라는 물음이 그들에게는 더욱 긴박했습니다. 성령이 일으키신 변화입니다. 그들은 비천한 이들과 사귀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서로의 말을 즐겁게 경청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나 됨을 경험한 이들은 이미 한 식구였습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선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얼핏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경계선을 긋는 데 명수입니다. 어린 시절 책상에 칼로 금을 긋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의 금 긋기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놀이를 해도 내 편은 좋은 편이고, 네 편은 늘 나쁜 편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 경계선은 학벌로 변형되어 나타났고, 연봉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릴 때 그었던 눈에 보이는 경계선은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우리 삶을 조각내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경계선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 속에 있는 목마름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가르며 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 됨의 열망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은 ‘주님의 마음’으로도 표현됩니다. 우리 속에 주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우리는 경계심을 풀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짜 기적은 돌이 떡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 같은 우리 마음이 부드럽게 풀려 이웃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성령은 자기중심성을 무너뜨리는 힘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아시지요?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어느 날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원숭이들은 모두 성을 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은 원숭이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주인은 원숭이들의 반대에 부딪쳤을 때 당혹감을 느꼈지만 원숭이들을 윽박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생각을 원숭이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하나 됨의 기본입니다. 

• 진정한 회심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은 희년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쁨은 그들로 하여금 곤고한 형제자매들의 삶에 대한 한없는 연민으로 이끌었고, 부유한 이들은 잉여재산들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었던 요셉입니다. 그는 사도들로부터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자리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길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 길’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현종 선생님의 시 <回心이여>가 떠오릅니다. 시인은 “희망은 많이 허황하지만/허황함 없이 또한 살림살이가/어떻게 굴러 가겠느냐”면서 낡은 생각을 여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꿈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헌 세상 시들한 시간에 새살 나게 하는/回心의 시간은 참 만나기 어렵구나” 하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회심을 찬미합니다. “나 살리니 너 살고/너 살리니 나 사는 회심이여.” 시인은 진정한 회심이란 이 사실 하나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제대로 살아야 너도 사는 것이고, 너를 살리는 것이 나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생명은 본래 이런 되먹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 살고 너 죽자’는 식으로 마음에 칼을 품고 살면 결국 그 칼에 자기가 찔리게 마련입니다. 원효는 ‘一切唯心造’라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구절을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풀지만, 사실 이 구절은 마음을 갈고 닦아 잘 쓰면 창조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희년을 산다는 것, 그것은 너를 살려 나도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자를 찾아가고, 삶의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의 벗이 되어주는 일, 바로 그것이 일상 속에서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희년입니다. 씀씀이를 조금 줄여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보태고, 아름다운 세상 만드는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속에는 우주의 중심과 하나가 되는 기쁨이 깃들게 됩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질병이 교회 성장주의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영혼을 구한다’는 미명하에 자기 증식을 꾀하는 교회들로 인해 주님은 지금 또 다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끼리 행복한 교회가 아니라,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 세상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 가난한 이들을 더욱 살기 힘들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려는 옹골찬 결의로 뭉친 교회야말로 하늘나라에서 큰 교회로 여겨질 것입니다. 

저는 이런 희년의 꿈을 여러분과 함께 살아내고 싶습니다. 우리의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 연구에 몰두하고, 엎드려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희년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우리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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