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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됨을 힘써 지킨 에베소교회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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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힘써 지킨 에베소교회 (엡 4:1-6) 

 
❚에베소교회

만약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유언장을 쓰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기분 나빠 하겠지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멀쩡한데 재수 없게 웬 유언장이냐?” 할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요즘엔 이렇게 젊을 때 건강할 때 미리미리 유언장을 써두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내 사후에 자녀들이 재산 분배 문제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언에 유산 문제를 미리 정리해 두는 분들이 많다고 하네요. 해마다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법정에 서는 형제들이 급속도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혈육이라 해도 재산 문제 때문에 법정에 한 번 섰다 하면 평생 원수가 된다고 하니 남의 일만은 아닌 게지요. 그래서 부모가 아예 건강할 때 유산 문제를 정확하게 정리해서 나중에 자녀들이 이 문제로 인해 화목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 앞에서는 형제도 없고 가족도 없는 모양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화목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화목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차 내가 세상을 떠난 후 어떻게 하면 자녀들끼리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까 이것이 부모의 중요한 관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가요? 부모가 돌아가실 때 유언의 99%는 형제들끼리 싸우지 말고 돈독히 살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잠언 17: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동생이 병에 걸려 수술비가 부족할 때 수술비를 대주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형이 대주지요. 형은 부모를 대신해서 형제가 위급할 때 도와야 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 잠언 18:1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고 다투고 갈등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마음의 문이 더 닫혀서 산성의 문빗장을 열기보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제는 반드시 화목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부모님의 가슴은 정말 찢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어떻게든 형제끼리 화목하고 잘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피를 나눈 혈육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한 자녀요 믿음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우리는 진정 하나 되고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등장합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다 가보았는데 그 중에 에베소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역은 대부분 터만 남아있거나 아예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데 에베소만은 지금도 로마 시대에 지은 거대한 원형극장과 유적이 너무도 웅장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 시대에 지중해 동부 지역의 중심도시로서 로마 식민지인 아시아 주(州)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항구 도시로서 동방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두 개의 도로가 있어서 상업이 성행하고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거대한 아데미 여신 신전이 있었고 인구도 십만 명이 넘는 커다란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2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세워진 에베소교회는 잘 부흥했는데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에베소에 편지를 썼고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더불어 감옥 안에서 쓴 편지라 해서 ‘옥중서신’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에베소서에서는 여러 가지를 강조하지만 특히 ‘하나’라는 낱말이 자주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 됨’ ‘한 믿음’ ‘한 세례’ ‘한 몸’ 등의 표현이 에베소서에는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왜일까요? 분명합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일이 에베소교회에 많았기 때문이지요. 공부 못 하는 자녀에게 부모는 만날 ‘공부, 공부’ 소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못하면 그 말을 자꾸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분명히 에베소교회도 하나 되지 못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자꾸 ‘하나’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에베소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그리도 많았기에 사도 바울이 하나 됨을 그토록 강조한 것일까요?

❚하나 되어야 할 까닭

이것을 알려면 에베소서 2:11~13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찾아서 읽읍시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당시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일찍이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 믿고 교회 다닌 사람들이 있었고 본디 그 지역 출신으로 예수 믿게 된 이방인 신자들이 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를 무시하고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 때문에 시험 들고 상처 받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 율법이니 할례니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데 여전히 할례에 매여서 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방인들을 ‘무할례당’ 즉 할례도 안 받은 자들이라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차별 받은 이방인들인들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각자 패를 지어 자기 사람만 챙기고 저쪽 사람은 배척하고 따돌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 바울은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자신은 비록 지금 감옥 안에 갇힌 몸이지만 내 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기가 피와 땀으로 세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반목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치 부모가 자녀들끼리 싸우고 불화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부모 아닙니까? 감옥 안에서 바울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잠도 못 이루다가 드디어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2장 13~14절에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너희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전에는 서로 원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되지 않았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너희 둘 사이를 하나로 만드시고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지 않으셨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둘 사이를 화목하게 만드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싸우고 갈등하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 된 너희에게 도대체 율법이 무슨 소용이며 할례 받았냐 안 받았냐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율법도 할례도 세상의 그 어떤 기준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 되고 주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된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는데 그 십자가를 믿는 너희가 어떻게 그 아무 것도 아닌 율법이니 할례니 또 유대인이니 이방인이니 따지며 교회 안에서 갈등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지금 비록 감옥에 갇혀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너희에게 권면한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2절, 3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다른 건 몰라도 교회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품고 서로 오래 참아주고 사랑 가운데 서로 품어주고 용납해라. 그래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4절부터 볼까요? ‘하나’라는 말이 참 많이도 나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도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어떤 이유라고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려고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도 한 분이고 예수님도 한 분이고 성령님도 한 분이신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한 믿음을 주시고, 한 세례를 받게 하시고, 한 교회에 다니게 하시고, 한 예배를 드리고, 한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아름답게 함께 신앙생활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지만, 전에는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원수 사이였는데 믿음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를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혈통과 민족은 다를지라도, 또 어떤 이는 할례를 받고 어떤 이는 안 받았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깨지면,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 분열하고 갈등하고 불화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깨뜨리는 죄인이 되고 맙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고 깨뜨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려면...

지금까지 에베소교회 이야기를 했고 지금부터는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 된 교회요 성도입니까? 우리 교회는 진정 십자가 안에서 화목하고 모든 것을 떠나 서로 화합하고 하나 된 형제자매들입니까?

우리 교회가 참 잘 하는 일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감동하는 것은 경조사를 서로 챙겨주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주고, 환자나 어려운 일을 겪는 성도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는 일들입니다. 다른 교회보다 이 부분에서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에베소교회 안에 일어났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을 요즘 식으로 해석해보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오래 다닌 기존 성도들과 새로 온 성도들 사이, 출신지역이나 출신 학교 등에 따른 구분, 구역이나 선교회, 혹은 클럽 등 가깝게 지내는 성도들 사이, 이런 것들이 에베소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마음속으로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며칠 전 제가 인도하는 일대일 양육자반에서 새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우리 교회 수십 년 이상 다닌 분도 계시고 우리 교회 온 지 몇 년 안 되는 분도 계셨는데, 우리 교회 오래 다닌 분들은 새가족들에게 먼저 찾아가 인사도 하고 또 좋은 관계를 형성해서 그들이 우리 교회에 정착하도록 돕는 일을 잘 못했다고,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교회에 온 분들 중에는 우리 교회가 장점도 많고 참 따뜻한 교회지만 반면 아직도 성도들 사이에 벽이 높다고 합니다. 

뭔지 모르지만 자기가 교회 와서 기존 성도들과 사이에 벽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말입니다. 그 벽 때문에 정착하는 데 쉽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다른 교회로 간 분들을 보며 너무 안타까웠다는 말도 나옵니다. 분명 에베소서 2장 14절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했는데 아직도 우리 사이에 벽이 있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이 허신 담을 다시 쌓은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 오래 다닌 사람과 새로 온 사람 사이에 우리가 일부러 담을 다시 쌓은 것이지요.

서울의 어떤 교회는 “우리 교회는 성도의 대부분이 경상도 사람, 반대로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지역 출신 목회자를 뽑겠다”고 했답니다. 그 지역 출신이 아니면 아예 부목사로도 안 뽑는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무신 담을 우리가 ‘출신지역’이라는 벽돌로 다시 쌓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 크고 적은 친교 그룹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출신 지역 따지고, 직장 따지고, 사는 동네 따지며 끼리끼리 너무 똘똘 뭉쳐서 누구도 그 틈에 끼어들지 못하는 일이 우리 안에도 있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끼리, 친한 사람끼리 똘똘 뭉쳐서 주님이 허신 담을 패거리라는 벽돌로 다시 쌓은 것입니다. 

사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래 동안 같은 교회 다닌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 당연하지 않냐? 같은 동네 출신, 같은 회사 소속, 같은 지역 사는 사람끼리 가깝게 지내는 데 뭐가 문제냐?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내 태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벽을 느끼고 불편해 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아니 큰 문제입니다. 이런 태도로 인해 성도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갈등한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만약 같은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그래서 주님 안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면서 우리 안에 여전히 이런 담이 있고 이런 갈등이 있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자녀들끼리 불화하거나 갈등하는 일, 혹은 패거리를 지어 끼리끼리 뭉치는 일을 보신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겠습니까? 이런 일들로 인해 우리 안에 십자가의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소멸되고 부인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우리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참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피를 토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 되라고, 말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형제자매라 하고, 말로만 하나 되지 말고 진정 하나 되어야 너희 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만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관광객의 가장 눈길을 끄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은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었는데 그 밑에 ‘오봉 미셔너리’ 즉 ‘오봉 선교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봉이라는 중국 선교사가 지금의 대만(타이페이)에 선교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대만의 산간마을에는 그때까지도 사람의 목을 베어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었습니다. 오봉 선교사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열심히 선교해서 원주민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원주민들에게 살인은 가장 큰 죄기 때문에 사람의 목을 베어 제사 드리는 일은 절대 하지 말도록 가르쳐서 잠깐은 그런 풍습이 없어졌다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런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봉 선교사는 원주민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 그렇다면 언제 어느 곳에 가면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있을 테니 그의 목을 베어서 제사를 지내고 그 후에는 다시는 하지 마라.” 

원주민들이 그 장소에 가보니 과연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옷을 입은 사나이가 있기에 그를 잡아 목을 벱니다. 그런데 벤 목을 보니 자신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오봉 선교사였습니다. 원주민들은 통곡하며 그 뒤로부터는 그 풍습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요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내가 죽어 남을 살리고 내가 죽어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희생하면 다른 이들이 삽니다. 이것이 진짜 십자가의 사랑이요 성숙한 믿음입니다. 

불화하고 갈등하려면 내 생각만 앞세우고 내 고집만 부리십시오. 내가 내키는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진정 하나 되고 화목하려면 내가 죽고 희생하고 내가 감싸고 이해하고 풀어야 합니다. 두주 전 고린도교회에 대해 설교하면서 교회 오래 다닌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은사 많이 받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숙한 사랑의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아무쪼록 우리 교회가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십자가 안에서 진정한 사랑과 화목과 하나 됨을 이루어가는 성숙한 교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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