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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 끝냄 (딤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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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끝냄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지난 10주 동안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10가지는 예수의 제자가 지니고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거스리는 삶, 닮음, 성숙, 동참, 단순, 비움, 의존, 열정, 붙잡힘입니다. 그리고 오늘 10번째 마지막은 “잘 끝냄”입니다. 이 잘 끝냄이 참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끝맺음은 더 중요합니다. 

저는 요즘 목회를 다 끝내고 은퇴하는 분들을 보며 참 부럽게 생각합니다. 잘 끝냈기 때문입니다. 30년 40년 목회하고 별 대과 없이 잘 끝맺음 하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고 장한 일이고 성공한 일입니다. 

한 직장에서 30년 40년 봉직하고 정년을 맞이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성공한 분들입니다. 잘 끝내지 못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두고 사람들은 낙마니 도중하차니 경질이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잘 끝맺음은 축하할 일이고 성공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험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때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오해해서 철저하게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냥 반대할 수도 있는데 그는 잔인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다 중도에 예수께서 그를 거꾸러트리셨습니다. 아주 부러진 것입니다. 엊그제 지방을 지나다 보니까 나무들이 많이 뽑히고 부러진 것을 보았습니다. 태풍에 나무들이 뽑히고 부러졌는데 하나같이 뻣뻣한 나무들은 부러져 있었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조금 수그리면 되는데 뻣뻣하게 서 있다가 그만 부러지거나 뽑힌 것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강하고 뻣뻣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 “사울이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사도행전 9장1절)”  하였습니다. 그 말은 사울이 독기가 시뻘겋게 올라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강한 광채 속에서 사울을 거꾸러트리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도 그렇게 만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강한 사람들은 대개는 그렇게 아주 요란하게 예수를 믿게 됩니다. 

김익두가 그 예입니다. 그는 희대의 깡패였습니다. 난봉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장날이 되면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모두 기도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응답도 안 되었습니다. 장날이면 김익두가 먼저 나가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반반한 여자들이 오면 머리끄덩이 잡고 입 맞추었고 김익두에게 입맞춤 하지 못한 여자들은 여자도 아니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그러던 김익두가 마지막에는 술 취해서 공동화장실의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도 누구도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쳐다보고 침 뱉고 지나갔습니다. 그의 부인이 와서 겨우 구해주었는데 나중에 술이 깬 후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비로소 그가 거듭나게 되고 개과천선 하게 됩니다. 

마침내 희대의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김익두는 물에 빠져 죽었다고 부고장을 냈고 사람들은 더럽게 살더니 죽는 것도 더럽게 죽었다고 한마디씩 하면서 장례식에 와 보니 깨끗하게 한복을 입고 세례를 받더라고 합니다. 김익두는 세례도 그렇게 요란하게 받았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보다시피 나는 오늘 물에 빠져 죽고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야단스럽게 살아가니까 사울처럼 주께서 친히 거꾸러트리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너무 요란스러우니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주께서 강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야심만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럴만한 것은 그의 좋은 출신성분 때문입니다. 그는 혈통이 훌륭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로 정통 바리새파 혈통을 지녔습니다. 또 학문도 훌륭했습니다. 당시 가장 권위 있던 학파에 속해서 공부했고 예루살렘으로 유학까지 갔습니다. 배경도 훌륭했습니다. 당시 사울의 아버지는 지주요 유지로 로마에서 시민권까지 받은 그 시대의 유지였습니다. 그러니 야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한 것은 그에게 신조도 있었지만 야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도 아주 잔인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를 거꾸러트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특별한 체질인 것은 부름 받고 회심한 후에는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열정적으로 예수를 전하는 사도로 변신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큰 사람이 되리라 기대를 하였는데 정작 바울 자신은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전도의 삶을 살고 비탈길을 걸어 다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때로 굶주리며 행색이 초라한 채 전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너무 초라하다, 가난하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은 바울은 응답하기를 “나는 세상에서 무명한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자요, 나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다 가진 자(고린도후서 6장8-10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충만한 영감을 주셨습니다. 영감으로 계시를 받아 서신서 중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총 13권의 성경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하였습니다. 

또 그의 손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 디모데, 실라, 브리스가와 아굴라, 디도, 에바브라, 빌레몬, 오네시모, 마가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전도도 요란하게 하였습니다. 전도하다 잡혀 재판을 받을 때는 제사장들 앞에서, 왕들 앞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전도도 열정적으로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와서 방해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인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까지 합세하여 방해하였는데 바울이 까딱 안하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동구 밖에 던지고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한참 후 깨어난 바울은 터지고 깨지고 찢어지고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시내로 들어가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더베로 떠납니다. 더베까지는 20km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 가는 것입니다. 아주 독한 사람(사도행전14장)입니다. 며칠 더 쉰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로마전도에 꿈을 가지고 로마로 가기로 작정합니다. 로마는 그냥 갈 수 없고 죄인이 되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나는 로마시민권자이니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항소하여 자신이 스스로 죄인이 되어 로마로 갑니다. 배 타고 로마로 가는 동안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하여 15일동안 배조각을 붙들고 표류하다가 겨우 구조되어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순교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고백한 신앙고백문 입니다. 그는 언제 순교할지 모르기 때문에 사전에 고백한 내용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신 만큼이나 만족한 고백입니다. 이제 나에게는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고백과 이 모습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모습과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시작이 좋고 도중 과정도 좋아야 하지만 마지막 모습은 이렇게 더 좋아야 합니다. 이 마지막을 잘 장식하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준비  

하나는 준비입니다. 죽음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영적생활을 잘하면 내 인생의 종말의 때를 사전에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종말이 준비된 사람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만만합니까. 그날을 위한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심음 

그리고 기쁨으로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종말의 날을 고대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준비를 다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없으면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 치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알 수 없고 불확실하고 주어질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급의 기대가 중요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에 많이 심으라고 강권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헌신과 수고 그리고 땀 흘림은 모두 천국에 심는 생활입니다.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고난당함도 천국에 심는 생활입니다. 세상에서 헌금하고 구제하고 선교 많이 하는 것도 천국에 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피 흘림과 순교함 그것도 천국에 심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천국에 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컸으니 왜 두려워 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기쁨으로 종말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지  

또 메시지를 남기는 일입니다. 신앙인의 죽음은 엄숙해야 합니다. 그 엄숙한 종말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이 장례식에 갑니다. 가면 묻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 그때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가 메시지입니다. 그때 엄숙한 메시지가 있으면 잘 끝낸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이유가 없이 숨을 거두었다 하면 메시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준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칼빈은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로마서8장18절)”는 말씀을 외우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두 신선한 고백의 메시지들입니다. 


이해 

이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죽음을 이해해야 기쁨으로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마지막이나 끝이 아닙니다. 졸업이라는 말이 영어로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듯이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이고 은혜입니다. 잠자리에 들어갈 때 얼마나 편안합니까. 잠자는 시간이 참 안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잠자는 시간이고 또 다른 안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잠에 대해서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잠은 사람됨의 시작지점이라는 점입니다. 어머니 태에서 열 달 동안 하는 일은 오직 잠자는 일 뿐입니다. 그렇게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하실 일을 다 짜 놓으십니다. 세상에서 내가 할 일과 사명과 은사와 생명의 시간 확정과 나의 외모와 성을 부여하십니다. 나는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내 존재를 다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은 사람됨의 시작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잠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아담을 잠재워 놓고 갈비뼈를 빼 내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보다 강한 것입니다. 남성은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성은 뼈로 만들어져 여성은 본 차이나 입니다. 엄마가 잠자는 동안에도 잉태한 아이는 태속에서 자랍니다. 뼈가 자라고 키가 자라고 머리가 자라고 팔 다리가 자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을 통해서 일 하시고 환상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계시를 주십니다. 마리아는 잠잘 때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또 모든 생명체는 다 잠을 잡니다. 

그런데 인간만 잠의 형태가 다양합니다. 모로 누워 몸을 오그리고 자는 잠이 있습니다. 그 잠을 새우잠이라고 합니다. 깊이 자지 못하고 설치는 잠이 있는데 그 잠이 선잠입니다. 비좁은 방에서 여럿이 끼워 자는 잠이 있는데 그 잠이 칼잠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잠은 꿀잠이고 단잠이고 숙면입니다, 좀 더 자자하고 늦게까지 자는 잠은 멸망케 하는 잠입니다.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잠은 낮에 일하고 밤에 숙면을 취하는 잠입니다. 

또 잠은 마침표입니다. 잠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쉼표의 잠이고 또 하나는 마침표의 잠입니다. 쉼표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것이 쉼표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낮에 활동하고 밤이면 쉼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쉼표의 시간에는 고요가 있어야 하고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은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시간입니다. 우리들이 깊은 안식을 누리려면 잠자리에 들어갈 때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 내려놓으면 안식하게 되고 평안하게 되고 고요가 주어집니다. 한 짐을 지고 잠자리에 들면 숙면이 없습니다. 선잠을 자게 되고 새우잠을 자게 됩니다. 깊이 잠을 자되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몸은 숙면하되 영혼이 잠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혹 몸이 깊이 잠들고 영혼도 잠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영은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잠을 가리켜서 쉼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잠은 마침표입니다. 일상의 잠은 쉼표인데 목숨이 끝나는 잠은 마침표입니다. 그러니까 잠은 쉼표이고 죽음은 마침표가 됩니다. 사람이 잠을 잔다는 것은 의미가 있고 뜻이 있고 창조질서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잠은 죽는 연습을 하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매일같이 죽는 연습을 합니다. 하루를 살고 밤이면 자리에 눕습니다. 잠을 잘 때는 모두 바닥에 누워 잠을 잡니다.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매일같이 땅바닥에 누워 자다가 어느 날 그 땅바닥에 오래 눕는 날이 옵니다. 그것이 마침표 즉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잠을 잘 때 사람들은 땅에 누워 잡니다. 

우리는 땅에 자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잔다고 우길 필요는 없습니다. 침대 밑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눕는 것은 땅에 자신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왜 땅에 맡기는가 하면 내 몸이 땅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은 하늘에서 왔고 내 몸은 땅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이 죽으면 내 영혼은 하늘로 가고 내 몸은 땅에 남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잠잘 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워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잠은 쉼표이고 죽음은 마침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쉼표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숙면 속에서 꿈을 꾸고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고 내 영혼과 몸이 활력을 입게 됩니다. 그래야 내일 또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신앙인은 마침표도 잘 찍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전하다가 웃음 띤 얼굴로 돌에 맞아 죽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처럼 십자가를 질 수 없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오늘 터키 땅에서 전도하다 잡혀 가죽이 벗겨져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도마는 주님 보기에 너무 죄송스러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인도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모두 마침표가 좋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마침표가 좋기는 바울이 으뜸입니다. 그는 마침표의 고백으로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잘 마침이고 메시지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이 마침표가 좋아야 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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