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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의 모양에서 경건의 능력으로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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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모양에서 경건의 능력으로 (약 1:19-27)


1960년대에는 스위스가 세계 시계 시장의 90% 가까이 지배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스위스는 시계 시장의 8%만을 점유하고 있을 뿐입니다.「바보는 변했다고 하고 현자는 변하자고 한다」의 저자 데이비드 바움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명의 스위스 시계 기술자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시계를 발명해 냈지만 신기술은 스위스에서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고 그 신기술이 미국의 인스트루먼트 사와 일본의 세이코 사에 팔려 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컴퓨터의 성능은 18개월마다 두 배로 상승한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평균 직장 근무 연수는 약 6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앨빈 토플러는 이제 지구촌은 강자와 약자 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고 빠른 자는 승리하고 느린 자는 패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최근에 내놓은 책 생각의 속도에서 다가올 10년의 변화가 지난 50년의 변화속도를 압도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세가지로 진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경계의 무너지는 시대 둘째 환경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 예측 불가능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난 10년 세계적인 기업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포브스지에 의하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100대 기업 가운데 18개 기업만이 상위 100대 기업 안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난 10년 사이에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중에 30%가 망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강자 기업인 GM, 포드, 시티그룹, 골드만 삭스, 소니 등이 무너집니다. 20-30년 동안 글로벌 1위 기업들 산업을 선도했던 전설적인 기업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글이 뜹니다. 아마존, 이베이, 애플 같은 회사가 뜨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규칙, 방법, 본질, 요건 등이 바뀐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사업사회로, 정보화 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입니다. 기계에서 인간으로, 정보에서 지식으로, 합리성에서 창조성으로, 경제적 가치에서 문화적 생태적 가치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바뀐 패러다임을 따라가지 못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그들의 책 [창조적 파괴]에서 "변하지 않는 비전은 기업을 망친다" 창조적 경영을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살고 있을 때 패러다임이 바뀌는 때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때입니다. 아직은 기독교가 미미하고 핍박을 받으며 흩어져 살고 있을 때입니다. 핍박도 많고 유혹도 많을 때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유혹에 대하여 교훈한 후 이제 기독교적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경건의 삶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신자 중에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과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들은 우리는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신앙인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답지 않는 신앙인을 경건의 모양만 있는 신앙인이라 말합니다. 

오늘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참된 경건과 헛된 경건의 신앙인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지는 삶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자기의 뜻이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 정신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함으로서 자기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부분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차피 짧은 한 평생 신앙 생활합니다.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살겠습니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6절 이하입니다. 참된 경건의 신앙인과 헛된 경건의 신앙인이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1.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의 차이

1)경건의 모양(헛된 경건)만 있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경건의 모양만 있는 헛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기도도 합니다. 직분도 있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혀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말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입이 거칠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속인다는 것입니다. 옳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옳은 길을 따르지 않고 그릇된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기만입니다. 율법의 자로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의인으로 생각할 수 있고 결국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2) 경건의 능력(참된 경건)이 있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즉 참된 경건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경건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참된 경건, 능력있는 경건의 삶은 무엇입니까? 

첫째가 이웃을 돌보는 사랑의 실천이 있는 삶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누군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특히 환란을 당하면 더욱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돌라보다"라는 말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의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둘째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입니다. 세속이란 악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의 정욕(요일2:16), 악한 세상 풍습(롬12:2)을 말합니다. 악한 본성이나 유행하는 세속적 사조에 따르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지난 주 제가 섬기는 대학교에 가서 개강 예배를 드리고 몇몇 대학생들과 식사를 하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된 자매가 같이 하였습니다. 믿는 의사들이 모여 운영하는 병원이라 근무하기가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식 자리에 가면 세상 사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경건의 능력, 참된 경건을 유지하려면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인생이 멋집니까?

"상계동 슈바이처"라고 불리우는 분이 있습니다. 김경희 박사입니다. 43년 연세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였답니다. 그는 84년 서울 상계동에 은명내과를 개원하며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89년 7월 1일 전국의료 보험이 실시되기 이전까지 이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모든 진료에사 1천원만 받는 “천원진료”를 실시했던 분입니다. 또 85년에는 은명장학회라는 장학재단을 설립, 1천 6백 50여명에게 장학금을 주었답니다. 86년 설립한 [은명 심장 수술 후원회]를 통해 36명의 심장병 어린이에게 수술비를 보태었답니다. 96년에는 자신의 재산 7필지 6만 5천여 평 당시 감정평가액 53여억 원 상당의 토지를 자신의 모교인 연세대에 기증하였답니다. 그가 이렇게 산 것은 그가 당뇨병, 협심증 등을 앓아 몸이 몹시 허약해졌을 때 하나님께 한 달만 더 살게 해 주신다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당시 논밭이던 상계동 지역으로 이주해 봉사했다고 합니다. 몸이 안 좋아 진료도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하루에 4시간 밖에 못했을 정도였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일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53억을 기증하면서 “이젠 내 삶을 정리해 가야 할 때가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관리자일 뿐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답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헛된 경건이 아니라 참된 경건한 신앙인으로 능력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어야 합니다.(19-21)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 가지를 속히 하고 두 가지를 더디하라고 말씀합니다. 속히 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유대교적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 인생관을 가지고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진리의 말씀(18), 심긴 도(20), 도(22), 도(23),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25), 2:8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씀합니다. 

더디해야 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말하기와 성내기입니다. 이 말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할 때는 세가지를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사실이지라도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가?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할지라도 모두에게 덕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도 잘 냅니다.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라는 말입니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순간을 참고 넘기라는 말입니다. 화를 절대로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를 낸 상태에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습니다. 성내기를 더디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거룩한 분노를 발할 경우도 있습니다(민25:6-15).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보다는 방해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 때문에 분노 때문에 넘어지고 있습니까? 말하기는 빠르고 성내기는 빠른데 말씀듣는데는 얼마나 더딥니까? 경건의 능력이 있으려면 첫 단계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눅10:38-42). 마리아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눅11:27,28).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얼마나 복되었습니까?(눅1:42, 45,48)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더 복되다고 했습니다. 우매한 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전5:1).

"너는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 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 말씀을 들을 때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습니다.(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교훈과 책망, 바르게함, 의로 교육, 우리를 온전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그 뿐입니까? 위로와 희락과 소망을 줍니다(시119:50, 92, 143).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시119:98-100). 육체의 건강도 줍니다(잠4: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 4:22)" 

우리는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말씀을 들어야 믿음도 생기고, 용기도 생기고, 희망도 생기는 것입니다. 10년을 다녀도 말씀듣기를 회피하면 경건의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늘 염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고 살지를 못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자꾸 부정적이고 회의를 가지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세상적인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걱정거리 가운데 96%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 30%,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닌 사건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걱정 4%, 우리가 해결해야 할 걱정이 4%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인데도 경건의 능력이 없다면 말씀 듣기를 외면한 결과입니다. 

2)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21)

말씀을 속히 듣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진리로 인정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기준이 생깁니다. 그 때 마음에는 말씀에 의해 생긴 성령의 소원을 쫓는 마음과 육신의 소욕을 쫓는 악하고 더러운 마음이 갈등합니다. 프로이드는 id(이드), ego(에고), super ego(초자아)로 설명을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소원과 육신의 소욕으로 나누어 말씀합니다(갈5:17).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라고 말씀합니다(롬7:23). 하나님의 법을 따를 것이냐 죄의 법을 따를 것이냐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경건의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옷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만과 강퍅한 마음으로 말씀을 물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으로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삼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말씀을 주관적인 내 말씀으로 로고스의 말씀을 레마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은 진리의 말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이미 우리 마음에 심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마음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과 이론들이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식을 제공하고 성공의 법칙과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초월하여 능력있는 경건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모양만 가지는 삶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행2:37). 그에 따라 말씀의 능력들이 나타나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사도행전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행2:41-47).

그러나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자 행5:33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노하고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합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하였습니까?(행7:54) 마음에 찔려 이를 갈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3종류의 가짜교인을 말하였습니다. 첫째 말씀을 듣지않는 교인입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들 듣기는 듣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교인입니다. 둘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인입니다. 말씀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인입니다. 셋째 말씀을 듣고 인격과 생활이 변하지않는 교인입니다. 

김일성을 보십시오. 아버지 김형식은 기독교인만 다니는 숭실학교에 다녔고 어머니 강반석은 이름 그 자체가 보여 주듯이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집안에는 강양욱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어머니는 예배당에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정말 있다고 예배당에 다니시나요?” 그러면 어머니는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흔들며 “무엇이 있어 다니는 것이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가서 뭘 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 도중에 피곤에 못이기어 모친이 조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적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칼 막스는 대학 때 성경을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스탈린은 신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사야서 55:1-5을 보십시오. 우리가 양식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① 좋은 것을 먹는 것입니다.(2) 그 어떤 보약 보다 그어떤 고급 음식 보다 좋은 것입니다. ② 너희 영혼이 살리라(3) ②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2) 참 만족 참기쁨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절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며, 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 즉 모든 도덕적인 악, '넘치는 악' 즉 흘러 넘치는 더러운 욕망, 위선 등을 과감하게 버려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면 능히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됩니다(20).


3. 하나님의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22-25).

말씀을 듣고 온유함으로 받는 것으로 그치면 경건의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온전히 받았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22절을 읽어 보십시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듣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이라고 듣고 만족하는 것으로 멈추면 열매가 없습니다. 결국 스스로 속이는 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자신을 기만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같아서 가서는 그 모습을 곧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행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습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행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행해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실제 경험하게 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받게 되고,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해야 비가 오고 물난리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25절을 보세오. 말씀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완전치 못하고 사람을 속박케 하는 모세의 율법에 대조되는 믿음의 법(롬3:27) 생명과 성령의 법(롬8:2) 등으로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9:12)을 말합니다.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복음입니다(요8:32; 갈5:1). 복음을 받은 우리는 실천하는 자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받은 말씀을 성실히 지키려는 자세를 가진 자는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말씀의 꽃이며 최종 종착점입니다. 순종치 아니하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기의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사여구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스스로 기만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 8:21)"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8)"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사이좋은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6.25동란으로 인하여 모두가 흩어지고 단 둘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빠는 페병에 걸려서 제대로 있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어야 했습니다. 제대로 약 한 첩 쓰지 못 한 연고로 그의 생명은 점차로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참지 못한 누이동생이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다고 믿었던 몸을 미군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덕분에 오빠는 점점 건강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다니던 교회의 한 교인이 그 사실을 그만 알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그 사실은 온 교인들에게 전달되었고 급기야는 오빠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충격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 내 병음 고치기 위해 내 동생이 몸을 팔다니.." 교인들의 눈초리와 수근거리는 소리에 그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비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한편 세상에 하나뿐인 오빠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몸까지 팔았던 동생은 오빠도 없는 세상에 자기만 살아서 뭐 하겠느냐는 생각에 누이동생도 오빠 곁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두 시신을 앞에 두고서 장례식을 집례하시던 목사님은 울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다음 심판날 하나님께서 너 아무개 목사야.! 너는 저 세상에서 내 양무리들을 잘 돌보다가 왔는고?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하나님 황송하오나 저는 양이라고는 한 마리도 없고 이리떼들만 우글거리는 교회에서 이리들만 치고 왔습니다..이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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