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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아버지는 하나 (요 10: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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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 (요 10:22-30)


신앙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신앙이란 사랑의 신비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말씀을 들었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신비의 사건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주어졌다는 것만큼 큰 신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신앙의 신비를 표상하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의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의 남편이고,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다.” 둘이 하나가 되는 신비, 그것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첫 인간 아담을 만드십니다. 그러나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세기 2:22) 

결국 하나님께서 중매쟁이의 역할을 하셔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소명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환호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시기를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4)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연합, 둘이 하나 되는 연합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입니다. 몸의 연합이요 마음의 연합입니다. 영혼의 연합이며 삶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의 연합을 당신 스스로에게도 해당시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떠나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남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예레미야 3:14)

여기서 남편은 아내를 억압하고 마음대로 하는 권위와 힘의 상징이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의 남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5:25) 

이 말씀은 남편이 아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쳐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젊은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연애할 때에는 서로에게 생명을 걸지 마라.” 여자 때문에 죽지 말고 남자 때문에 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남편을 위해서 생명을 걸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편들아,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던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도 남편을 무시하고 조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어머니와 아버지로 표상하기도 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여인이 젖 먹는 어린 자식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어찌 젖먹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 어머니도 잊을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반드시 기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서너 살 된 어린 아이들은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아빠!”하며 껴안습니다. 거기에는 아빠를 향한 신뢰와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바 아버지입니다. 어느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한복음 10:29~30)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다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런데 그 양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이, 믿음의 성도들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친밀감의 표시이자 사랑의 표시입니다. 또한 신뢰성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더니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한복음 10:31)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무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함께 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멀리 떨어져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돌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고정관념이 되었고, 삶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신앙이 사라졌고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요한복음 10:24)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뒤따라가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진정한 구도자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트집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당신이 하나님인가? 어떻게 피조물처럼 생긴 당신이 창조주 하나님과 견줄 수 있는가? 당신은 나와 같은 죄인이 아닌가?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과 동일하다고 말하는가?’ 그러면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해서 공격했습니다. 

여러분, 상대방이 싫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듣기를 거부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싫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자신들의 자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만하면 종교생활을 잘한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는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만큼 율법을 지켰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예수는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음이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떠나갔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10:26)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하신 말은 축복의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위인이니까 믿습니까? 예수님이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믿습니까? 세상에 선한 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같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초청하십니다. “네가 내 안에 들어오면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높아질 것이다.” 

어떤 승객이 여객선을 탔습니다. 갑자기 선장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요청을 합니다. “선장님! 좀 멈춰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강아지가 바다에 빠졌어요!” 그러나 선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안됩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이 배를 멈춰 설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승객이 다시 말합니다. “선장님, 사람이 빠진 경우는 어떠합니까?” “물론 멈춰야지요! 그 사람을 구해야지요!” 이 승객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제쳐놓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강아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배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객과 강아지를 구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악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허물이 많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적대행위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내가 저들의 고통을 대신 나누겠습니다. 저들이 받을 징벌을 내가 대신 받겠습니다. 저들이 당해야할 죽음을 내가 대신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그의 죽음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바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역사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풍요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하게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잘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예배드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고백하십시오. 찬양을 드릴 때마다 마음과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할 때조차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에 달라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몸이 아픈데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모두 고백하기 전에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라고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한 남자가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 남자는 무덤가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옆에 다가섰습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말합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무척 사랑했습니다.” 옆에 있던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여줬습니다. 그런데 더 흐느끼면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표현하지 못하면 비극이 됩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축복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저도 누리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마음껏 받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와 똑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믿어라. 내안에 들어와라. 그러면 너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넘어졌던 사람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의 좌절을 물리치고 가슴에 상처 난 것을 싸맬 수 있는 것도 오직 사랑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심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마가복음의 말씀을 끊임없이 제게 주신 말씀으로 받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1:11)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 다시 가슴이 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새롭게 살아갑니다. 저녁에 잠들기 전에는 시편 18편 1절 말씀을 다시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아침에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녁에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듯이 머리 숙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그 이름은 권위의 이름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입니다. 우리를 억누르려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높여주는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생에 마음껏 누리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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