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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신 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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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잘 아노라 (신 34:1-12)


• 하필이면

인생길을 가다보면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사건이 많이 있습니다. 안타까움과 원망의 마음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영문학자인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 『내 생애에 단 한번』이라는 책에 그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치과에서 본 여성지에는 모 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3억이면 내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새워 페이퍼 읽으며 10년 쯤 일해야 버는 액수인데 여배우는 그 돈을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고난 생김새 때문인데, 그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 커녕 3백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원도 못 받을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은 내게 한심하고 슬픈 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내게 던진 ‘하필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 곰 인형을 하나 사서 아름이에게 갖다 주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나에게 주는데?”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들이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 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이 나름대로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예였지만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유명 영문학자의 딸로 태어나 돌을 넘기면서 찾아온 소아마비로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영문학자로 강단에 우뚝 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줬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9년 동안 보통 사람이 한 번도 감당하기 어려운 암 판정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하지요. 유방암에서, 척추로 전이되고, 다시 간으로 전이되어 힘겹게 투병하다가 1년 전 세상을 떠난 분이지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조금 좋은 조건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나를,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다니...” 감격의 마음이 있으면 오늘 나의 삶의 조건들이 행복으로 바뀐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인생은 은혜로 세워지는 것임을 새삼 고백하게 됩니다.

• 하나님과의 친구로 살았던 사람

오늘 말씀은 모세가 120세 인생을 마치고 가나안이 지척에 보이는 느보산에서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40년 긴 세월 동안 모진 광야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눈앞에 놓여 있는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필이면 여기에서, 하필이면 저를.... 원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하필이면’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하필이면’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귀한 사명을 감당케 하시다니, ‘하필이면’ 나를 그렇게 귀하게 사용해 주시다니, 물없는 광야 그 힘든 시간에 불러가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여기까지 이르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멀리서나마 보게하시고 불러가시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도 고백할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날들도 참 중요하지만 살아갈 날이 더 중요합니다. 살아갈 날도 중요하지만 인생을 마치고 난 다음에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지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어떻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 산 다음에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 이렇게 뚜렷한 평가가 주어질 수 있을까 감탄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의 생애가 마쳐졌을 때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서 들려온 음성입니다만 행 7:20에 의하면 태어날 때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니라.” 그렇다면 모세는 생의 시작도, 마지막도 아름다웠던 사람이었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말씀은 그가 세상을 떠나는 자리에서 들려온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느보산에서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고서 모세는 무척 실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쩜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하시면서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얼마나 실망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을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순종합니다. 

일어나서 백성들을 모아놓고 유언과 같은 설교를 토해 놓고 있는 것이 신명기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거기에서 끝이 납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는 “이에”라고 말씀하시면서 죽음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지금까지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어쩜 이것은 최고의 평가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덧붙이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 공동번역은 이것은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표준새번역은 ‘주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말씀하신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NIV나 KJV은 “하나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시듯 잘 아시던 사람 모세”(Moses, whom the LORD knew face to face)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강하게 부각되는 내용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과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아버지 학교’를 수료하신 분이 쓴 “어느 아버지의 고백”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답니다. 아버지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한 녀석이 신문에 난 연예인을 가리키며 “우리 아빠는 이 가수를 잘 알고 있다. 우리 아빠는 여의도에 방송국에 다니시거든...”하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다른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국회위원을 잘 알아.” “우리 아빠는 장관을 잘 아는데...” 아이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자랑하는데 평범한 월급쟁이요, 교회 집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자랑을 할지 궁금해지더랍니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처지인데 혹 아들이 기가 죽지 않았을까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해지더랍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더라지요. “우리 아빠는 하나님을 잘 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성경과 찬송가가 대따 많아. 한번 볼래?” 그 순간 아버지는 울컥 눈물이 솟구치더랍니다. 아들이 정말 대견스러워 감사가 절로 나오더랍니다. 

“하나님과 친하다...” 참 좋은 말이지요.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모세는 나와 참 친했던 사람이었다...” 참 인상적인 말 아닙니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과는 친한 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유명인과 친한 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나를 친하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우리가 하나님과 친한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시느냐 입니다. 

“내가 너를 잘 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욕심내야 할 것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모세를 향해 “하나님이 대면하여 하시던 자”라는 평가 속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서 살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심을 알아 그것에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 종으로 살았던 사람

친한 친구는 편하기에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세를 하나님의 가장 친한 친구로 소개하지만 모세는 까불면서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함부로 살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러한 사실이 강하게 부각됩니다. 그 모진 세월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보여주신 다음에 너는 거기에는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1절에도, 3절에서도 “보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40년을 그 모진 고생하면서 달려왔습니다. 생명을 걸고 달려온 길 아닙니까? 얼마나 많이 참고 견뎌내야 했던 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4절 보십시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느보산에 서면 눈앞에 요단 평지가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에서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원망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주인으로 살지 않았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5절에 바로 “여호와의 종 모세”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주인 행세하면서 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종으로 살았다는 말씀이지요. 살다보면 내가 주인 행세하고, 모든 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가 주인노릇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늘 새롭게 결단하고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도, 재산도, 자녀들도, 내가 이룬 성공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 찬양은 그런 고백을 하게 하지 않습니까?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 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 것을 내 것이라/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 사명 맡긴 재물을 주를 위해 쓰렵니다.” 

사실 신명기의 전체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모세가 마지막 고별 설교로 전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네 인생은 여기에서 끝난다는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이렇게 예배하고, 이렇게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이렇게 사역을 감당하라고 지금 유언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세는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 3장에는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실로 서운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주신 명령이 무엇이었습니다. 후계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여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신 3:28) 못 먹는 밥에는 재라도 뿌려버리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의 심성인데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고 있습니다. 9절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후계자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죽어 시신도 남기지 않습니다. 깊은 산골로 들어가 죽음을 맞았다는 말이지요.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사람들의 박수 받기를 원치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면 족하지요...’ 그런 고백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기를 바라며 달려온 생이었습니다. 주인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왕 되심과 주인 되심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가슴으로 살았던 사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구색만 갖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멋지게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완벽하게 살아낸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원하는 답을 찾고, 내가 바라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산 사람은 결코 이를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과 욕망으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과목은 평균 이상의 성적이 나오는데 늘 국어성적이 저조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중국집을 운영하느라고 아이를 돌볼 틈이 없어서 고민 끝에 특별 과외를 받게 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국어 시험을 보고 집에 오자마자 엄마가 물었습니다. “오늘 시험은 몇 점 받았니?” “한개만 빼고 다 맞았어요.” “아이고 우리 아들 참 잘했다. 근데 무슨 문제를 틀렸는데?” “반대말을 묻는 문제였는데, 아무래도 선생님이 채점을 잘못한 것 같아요. 엄마! ‘보통’의 반대만은 ‘곱배기’ 맞지요?” 이 아이는 엄마가 하는 중국집 분위기하고는 잘 맞는 답을 쓴 것입니다. 중국집에서는 ‘보통’의 반대말은 ‘곱빼기’가 맞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출제한 선생님의 의도와 맞아야 정답이 됩니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시험에 그런 문제도 있었습니다. “문제1: 어른이 선물을 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5글자로 쓰시오.” 문제 밑에는 네모 칸 5개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답은 “감사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인데 한 아이는 그 5개의 네모 칸에다가 한 글자씩 그렇게 맞추어 그렇게 답을 써넣었습니다. “뭘 이런 걸 다.” 기발하게 다섯 글자를 맞추긴 했지만 맞는 답은 아니었습니다. 칸을 맞추었다고 해서 답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칸만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멋지게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는 보게 됩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기록에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는 자”로 그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하면서 모세 편에서 친밀함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친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완벽하게 살아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나하고 참 친한 사람이다, 내가 그를 잘 아노라...”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살았기에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의 인생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히 11장 말씀에는 궁중에서 장성한 모세가 믿음을 갖게 되면서 “바로의 공주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였다고 기록하면서 출애굽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애굽의 영광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애굽의 영광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모세를 처음 부르시는 장면이 출 3장에 나오는데 9절 말씀에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아픔을 보았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십니다. 모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달려가는 생을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늘 하나님의 뜻을 순응하는 마음을 알았던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가슴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생애의 위대한 점은 그가 하나님의 가슴으로 살았다는데 있습니다. 11절은 그렇게 묘사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행하게 하시매...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사실 이것은 당시의 권력구조나 정치세계를 안다면 도무지 순종할 수 없었던 일었습니다. 그런데 보내시니 그대로 순종하며 달려갑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슴이 타고 있었던 하나님의 가슴을 맛본 것이지요. 

신현님 시인의 “깊고 진하게”라는 시를 읽다보면 이런 마음을 온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깊고 진하게 살고 싶다/ 무엇이 되려고/ 바위처럼 되려고/ 무엇에든 쉽게 흔들리지 않고/ 깨지지 않는 바위/ 해와 달, 별을 감싸 안는/ 하늘을 사모하고/ 젖은 제 몸만 말리는 일상이 되지 않게/ 지친 자를 만나면/ 섬이 되어주고/ 마음의 눈은 해안이 되고/ 괴로울 때에라도 희망을 엿듣고/ 지진으로 구겨진 도시를 볼 때처럼/ 무섭게 가슴이 타고/ 언젠가 차가운 빗물이 되더라도/ 바위처럼/ 단단히 살아내려고.”

‘지진으로 구겨진 도시를 볼 때 무섭게 가슴이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400년 노예살이의 긴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셨다,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가진 것이지요. 세상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고, 누구를 대할 때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 귀한 것이겠지요. 그 마음 때문에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마음을 가지고 일어선 사람이 있었을 때 거기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이지요. 

• 사랑의 가슴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가정이 세워지고, 자녀들이 세워지고, 나라와 민족이 세워지게 되어 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할 수 있었던 마음과 가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주목받는 CEO 중에 조서환 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샴푸와 린스를 하나로, 트리트먼트가 하나로 된 ‘하나로 샴푸’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고, 20개의 치아를 80세까지 보존해 준다는 ‘2080 치약’ 마케팅 전략으로 성공했으며, 최근에는 모 회사의 3세대 이동통신 브랜드의 마케팅을 담당해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마케팅의 귀재로 알려진 분입니다. 그가 쓴 『모티베이터』라는 책 앞부분에는 그가 고난 가운데서 일어설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줍니다. 

그는 23살에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에 수류탄 사고로 오른손을 잃어버리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는데 오른손이 잘려나가고 없었습니다. 당시 그에게는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손을 잃은 처지라 그녀에게 쉽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 용기를 내어 어렵게 연락을 했더니 여자 친구가 병원에 찾아 왔습니다. 오른손이 잘려나간 남자친구의 모습을 본 여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여자 친구에게 30분을 머뭇거리다가 아주 힘들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직도 나 사랑해요?” 여자 친구는 대답 대신에 고개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세상을 다 얻은 듯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뻤지만, 그는 ‘이건 너무 이기적이다. 이제 그만 이 천사 같은 사람을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얼굴 봤으면 이걸로 정리하고 끝내자.”라고 했더니 그 여자 친구는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지금까지는 당신한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터는 당신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요.”

그녀는 그날부터 병원 근처로 이사를 와서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정성껏 간호해 주었습니다. 비록 그는 한 손을 잃었지만 참으로 행복했고 그녀 때문에 살아갈 용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 친구 아버지가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딸의 손을 붙잡더니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딸이 싫다고 하자 아버지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너, 저놈 아내 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그때 여자 친구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만약 아버지가 사고로 한쪽 팔을 잃는다면 어머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한쪽 팔 없는 남자와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는 당신의 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사랑했어요’ 라고 하며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세요?” 이 말에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조서환 씨의 마음속에 큰 기쁨과 감동이 밀려왔고, 그날 그는 굳게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아 ‘내 평생 이 여자 하나만은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그렇게 해서 재기에 성공하여 오늘날 각광받는 마케팅의 귀재로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였습니까?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서환씨는 아내를 이야기할 때마다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한다고 하지요.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가슴을 가지고 신실하게 고난 가운데 있는 한 남자를 껴안았을 때 그는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에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달려오셔서 상한 심령들, 상처진 가정들, 소외되고 잊혀진 영혼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늘의 말씀으로 권면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생명이 살아났고, 가정이 회복되었으며, 인생의 치유와 일어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역을 계속해 가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모티베이터(motivator)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았기에 모세는 평생 그 일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가슴으로 백성들을 대하고, 권력자를 대합니다. 광야길을 걸어갑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격하며 기적을 만들었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모티베이터가 되어 이룬 기적이었습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까지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 나아온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서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 기적을 만드는 생애

김종삼 시인은 “어부”라는 시에서 그렇게 노래합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어쩜 이것은 모세의 생애였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돌아보니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겹이불에 싸여 살아왔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때론 출렁이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고, 뒤집힐 때도 있었습니다. 죽을 만큼 힘이 들고 숨이 막히는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화사한 날,”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그 나라를 위해서 살다가 그는 홀연히 그 나라로 떠나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기쁨만 안겼습니다. 살아온 날들은 기적으로 가득 찼고, 살아온 기적을 돌아보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은혜의 기적에 사로잡혀 민족을 살려내고, 그 모진 광야 40년을 헤쳐 나오는 기적의 생애를 만듭니다. 그렇게 이루었으면, 그 정도 수고했으면 박수갈채 받아야 하구요, 위대한 공을 세운 지도자로 추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모세의 수고와 충성을 아신다면 하필이면 모압 평지가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서 모세를 죽게 하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모세는 그런 생각이 더 들지 않았겠습니까?

지금껏 살아온 것도 기적이었지만 이제 그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야망과 바람을 내려놓는 기적입니다. 그는 하늘 궁정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살아왔으나 영원한 하늘나라, 멀리 뵈는 시온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사막을 달리면서 늘 그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세웠네...” 

앞서 언급한 장영희 교수는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소아마비 장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방암, 척추암, 간암과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암과 싸웠습니다. 그는 삶의 아픔을 안은 채 일생을 영문학자로, 교수로, 수필가로, 번역가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떠난 다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은 것은 그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그녀가 알아 그렇게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는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딸을 진학시키기 위해 딸을 없고 문턱이 닳도록 학교를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높은 책상은 사용하지 않고 딸과 같이 방바닥에 낮은 상을 놓고 연구했다고 하지요. 

장영희 교수는 9년동안 암과 싸우다가 작년 6월 말에 엄청난 암 말기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의 서문을 완성해서 출판사에 보낸 후 코마 상태에 빠져 8일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바로 다음날 그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그렇게 노래합니다.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 앞에도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살아내야 할 삶만 있습니다. 모세는 그 삶을 힘차게 살아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 가장 친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살아서 기적을 만들고, 죽어서도 계속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생애 구석구석에 살아온 기적 만들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한소망교회는 교회가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기적을 만든 교회였습니다. 하나님 섬김에 있어서 그랬고, 예배와 찬양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이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살아온 기적... 이제 살아갈 기적을 계속해서 만들어가실 수 있게 되시길 빕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눈물을 알고, 그분의 원하심을 알 때 모세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모세를 향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아노라...”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선명하게 평가하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 우리도 남은 생애를 살아가면서 이것을 욕심내야 합니다. 

우리는 3년 전 그 길고 무더웠던 2007년의 여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하러 갔던 샘물교회 봉사단원 23명이 억류되었던 여름은 유난히 길고 지루했습니다. 해맑은 어린 아이들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어 여름휴가를 내고, 용돈을 절약해 가며 버려진 땅을 찾아간 그들을 향해 던져진 여론의 비난은 더욱 여름을 길고 무덥게 했었습니다. 봉사단원들 중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님과 20대의 한 형제가 희생을 당하고 21명의 단원들은 안전하게 귀국했지만 교회를 향한 누리꾼들의 비난의 화살은 실로 따가웠습니다. 

9살의 딸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난 배형규 목사님의 장례식이 그해 9월 8일, 분당샘물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장례식은 치러졌지만 장지는 없었습니다. 시신은 예정된 대로 한 대학병원에 기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생전 배목사님의 책상 앞에는 “온전한 헌신은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다”라고 적혀있었고, 그의 유지를 따라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이 땅을 떠나던 그 길목에서 배 목사님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92기 동기 목회자들이 찬양을 불렀는데, 그가 생전에 가장 즐겨 불렀다는 ‘순례자의 노래’였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이 찬양을 조용히 음미하면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참 아름답게 살았던 분이었구나. 제가 장신대 79기로 졸업했으니까 저에게는 13년 후배가 되는 분인데 참 멋지게 인생을 살다 가신 멋진 후배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 내가 너를 잘 아노라... 고마웠다. 정말 고마웠다. 내가 너 때문에 행복했느니라.” 하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시온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하늘의 시온성을 허락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한 젊은 목사님이 그 시온성을 바라보면 달리다가 그의 젊은 생을 낯선 사막 땅에서 내려놓았지만 그는 결코 실패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도 언젠가, 어딘가에서 우리의 생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하게 달려야 할 때입니다. 그 길이 비록 험하다 할지라도,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벌떡 일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힘차게 달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생애 마치는 그날, 주님 품에 안기는 그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종아, 고마웠다, 정말 고마웠다.”

몇 년 전 우리 교단의 ‘전국 교역자 부인회’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장소가 백암온천이라는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가는 길을 물었더니 포항까지 비행기로 오면 마중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포항공항에 내렸더니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는데 동해안 길로 달려도 달려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의 두 시간을 달려 산골짜기로 들어가니 백암온천이란 곳이 나왔습니다. 이런 곳에 사람이 모이겠는가 생각했는데 도착해보니 전국에서 사모님들만 거의 200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집회를 위해 찬양을 인도하는 특별팀이 초청되었습니다. 

찬양이 시작할 때부터 앞자리에서 함께 찬양하는데 노래를 잘하고 기교도 많이 부리는데 별로 은혜가 되지 않았고, 뭔가 터치하고 들어오는 깊은 영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모님들도 보니 별로 찬양에 깊이 빠져드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아무래도 찬양을 한곡하고 해야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찬양을 한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후렴 부분을 함께 부르는데 사모님들이 막 우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개척교회 하시면서, 농어촌 교회 사역하시면서 사모님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말없이 뒤에서 목사님 내조하면서 마음에 진 상처는 얼마였겠습니까? 아무리 아파도 아프다고 말씀도 못하시고 주님 한분에게만 내보일 수 있는 상처는 얼마나 많습니까? 사모의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렵습니까? 그런데 하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느끼신 것이지요.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이 아신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내 눈물, 아픔, 외로움, 상처, 고민, 서러움, 안타까움, 방황... 그 모든 것을 주님은 다 아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지어 봉헌하신 여러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이제 아름다운 곳에서 더 깊은 고백이, 더 깊인 찬양이, 더 깊은 섬김이 올려질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에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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