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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사람들 (롬 1: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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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내버려두신 사람들 (롬 1:26-32)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오늘날까지 당신이 지으신 세상과 당신이 다스리시는 온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당신의 신성과 권능과 지혜와 사랑과 공의와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시며 알리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와 영적 부패로 말미암아 눈이 먼 우리 인간은 그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질 뿐입니다(롬1:21). 그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나타날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는 것입니다(롬1:18). 

롬1:18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내리시는 징벌이나 최후의 심판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을 그냥 “내버려두심”으로써 그 악행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사태의 전개에 따른 개인과 사회의 부패와 악화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과 불행입니다. 

오늘 본문은 후자 즉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에 따르는 결과에 속하는 것들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인간의 불의와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무반응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현이고 징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첫 절인 26절에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다.”는 말이 나오지만 먼저는 24-25절에서 나옵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했냐하면 24-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것을 설명하기를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합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 첫 번째 결과로 우상숭배를 지적한 사도 바울은 그 두 번째 결과로 동성애라는 당대의 윤리적 현상을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로마 사회는 동성애에 대해 아주 관대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성간의 사랑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기조차 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리라는 신약주석가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첫 열다섯 명의 황제 가운데 열네 명은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전기를 쓰는 데 일생을 보낸 작가로서 유명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율리우스 시저는 모든 여인의 남자였고 또한 모든 남자의 여자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동성애가 만연되어 있었을 로마에 살고 있으면서 어쩌면 그런 비정상적인 윤리현상에 대해서 불감증에 걸려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며 그것이 “부끄러운 욕심”을 따라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것이며(본문 26절)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이고 “그릇됨”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본문 27절). 사도 바울은 남색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라고도 말했습니다(고전6:9-10). 이성간에 사랑의 감정이 생기고 사랑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쁨과 종족번식을 위해 주신 자연스러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끄러운 욕심에 따른 역리적이고 그릇된 행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이 동성애를 오늘날 용납할 수도 있고 용납해야 하는 하나의 선택적 생활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인자가 그렇게 된 걸 어떻게 하느냐고 그럽니다.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18:22)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13)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순리를 바꾸어 역리로 쓰려고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순리를 따르라고 빨리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나오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꼭 우리 교회에 안 나와도 좋으니 순리는 따르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순리를 바꾸어 역리대로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냥 머무르고 마는 삶이라고.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사람들을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고 하고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고 한 사도 바울이 세 번째로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28-31절을 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먼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일어나는 모든 것 뒤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그 손길을 보는 믿음의 눈만 있으면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감사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앞에서 날뛰고 잘난 체하고 위협하고 힘들게 해도 태연할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는 것은 그 뒤에서 빙긋이 웃으시며 염려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보다 확실하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며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 하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면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더 가까이 더 온전히 두면 둘수록 하나님과의 소통이 더 원활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하며 바르게 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대로 내버려두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시려고 지으신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대로 만사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만사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곧바로 부패하고 타락하며 상실의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나님께 합당한 일을 할 터인데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니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못한 일들이 무엇입니까? 29-31절 사이에 여러 가지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먼저 “불의”와 “추악”을 말합니다. “불의”와 “추악”은 엄밀하게 구별하려고 하기보다는 남을 해하는 내적인 성향과 외적인 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악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탐욕”은 더 갖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심입니다. 한정 없는 이기심입니다. 자기의 욕심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든지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또 이 탐욕은 이기적이기에 타인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고,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람이 악의로 가득한 자가 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가 되며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가 되는 등 모든 개인적 타락과 사회적 부패의 원인을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거부하여 마음이 부패하여지는 데서 찾은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는 세상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기독교는 갈수록 쇠퇴하고 있는가 하면 타종교나 이단이나 사이비종교들이 오히려 득세하고 있는 듯합니다. 동성애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며 공공연히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각종 범죄는 수그러들 줄 모르며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부끄러운 욕심대로, 그들의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징표입니다. 사람들이 갈대로 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사람들이 가고 싶은 대로 갈 때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비참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돌이켜야 합니다. 이제는 돌이켜야 할 때라고 빨리 가서 전해야 합니다. 

찾아가서 말해줘야 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이대로 살다가는 죽는다고, 영원히 멸망한다고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교회로 나오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거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내버려두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인데 영원히 내버려두심을 당한 사람들처럼 그들을 흉내 내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려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봐도 땅을 쳐다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으로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깨달아 알도록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예배 속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고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예배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로 한 생명을 인도하는 일은 천하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에 힘껏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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