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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곤고함을 살피시는 하나님 (창 1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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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곤고함을 살피시는 하나님 (창 16:1-14)


우리는 산같이 떡 버티고 있는 수많은 인생의 시험 앞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합니다.  때로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생의 고난 앞에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직도 기회와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해 "너는 이제 끝났어"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와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들보다 먼저 앞서 가셔서 굽은 길을 곧게 하시고, 험한 산지를 평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시 무장하여 모든 시험도 시련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일단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함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시험이니 시련은 일단은 이겨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늘 많은 것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실패와 고난 앞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현실 앞에서 벌어지는 낙심되는 일 때문에 주저 않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모든 실패에도 건질 것이 있고 모든 고난에서 더 건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여정은 자신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될 때에 자기를 찾는 것 보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자기를 찾는 것이 훨씬 더 바르게 찾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맑은 태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세상은 모두가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때로는 먹구름도 있고, 장대 같은 소나기를 퍼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땅은 옥토가 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고난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고난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보다 성숙한 자기 자아를 만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 앞에 절망하고 낙심하면서 무너지는 인생이 아니라 그 고난 앞에서 보다 성숙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 앞에서 건강한 자기를 찾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우리들에게 제일 귀한 발견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부족하고 모순 투성이인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고쳐 사용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건져 사용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넘치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와 같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나이는 점점 더 먹어만 갑니다.  늙어 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어느 날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써보면 어떻겠습니까?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는 것입니다.  그를 내 후사로 삼겠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를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쏟아질 듯한 별들로 꽉 찬 하늘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브람보다 아내인 사래가 더 조바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인 아브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당신 몸에서 날 자라고 했으니까 내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주세요.  그래서 우리의 후세를 이어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감동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여인이 자기 남편의 애정이 다른 데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에 '부처도 자기 남편이 첩을 얻으면 화를 낸다'는 이야기가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남편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깊이 생각한 후에 너그럽게 엄청난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당시에는 매우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당시 중동지방 법에는 여주인과 여종은 하나였습니다.  여종은 여주인의 물건이요, 부속품이었습니다.  여주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여종이 대신 낳아줍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여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종을 자기 남편의 씨받이로 사용했어도 그 아이를 자기 호적에 입적하는 경우는 자연스러운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합리적이고도 인간적인 제안입니다.  마음 섬섬이가 넓은 제안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아내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제안에 대해서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가를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합리적인 생각에 그냥 따랐습니다.  앞뒤가 잘 맞았기 때문에 그냥 따랐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물었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래의 이 제안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에게서도 이러한 잘못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해서 행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는 성경을 읽으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먼저 앞세우는 시대입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마음대로 멋지게 헌신도 하고 고통도 당하고 희생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남편을 향한 그 깊은 사랑과 넓은 마음과 당시의 합리적인 풍습을 따라서 아내의 말을 그대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결코 하나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갈에게로 향하는 그 순간부터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문제는, 교만이 이 가정에 새로운 고통을 불러일으키기 시작을 합니다.

본문 4절에서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하갈은 어느 날 갑자기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침상에 들어갔습니다.  자기 주인도 하지 못하는 임신까지 했습니다.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일을 자기가 이루었습니다.  이쯤 되니까 이 노예는 갑자기 우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말이 하갈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새로운 자랑거리가 생기면 더 교만하고 방자해집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가져봐야 안다고 합니다.  돈을 가져보고, 권력을 가져봐야 그 인간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손에 돈도 없고, 권력도 없을 때에 겸손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이 없던 사람이 돈을 가지니까 세계 여행하면서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민족의 수치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사를 가만히 보면, 없다가 있는 사람이 더 교만해 집니다.  그 인격이 잘못된 사람은 있으면 있을수록 더 방자해 집니다.

간혹 우리가 호텔이나 공공장소에 가게 되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앞에 걸어가고 그 뒤로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안내하면서 따라가는 광경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들어오면 호텔의 직원들이 나와서는 일렬로 정렬해서 맞이합니다.  내가 들어가면 콧방귀도 안뀌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노인이 젊은 그 사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소위 제벌 2세의 행차라는 겁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불쾌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분은 저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어떤 놈은 이렇게 푸대접을 받나?

그러나 "내게도 저렇게 돈을 많이 주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안 가져봤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안 가져 봤기 때문에 이런 소리도 하는 겁니다.  가지면 이런 소리도 안 합니다.  가지면 더 교만해집니다.

어쩌면 이 여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이를 가지니까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교만은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가졌다고 교만하고, 높다고 교만하고, 안다고 교만하고, 열심이라고 교만하고,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교만하고, 심지어는 '내가 얼마나 겸손하가?'하고 교만합니다.  이 여인은 아이를 가진 것 때문에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행동을 했던 그에게 두 번째 문제는,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보면, 사래는 자기 남편을 호칭할 때도 얼마나 겸손하게 불렀는지 주(主)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귀한 원리가 있습니다.  남편을 항상 마음속으로 거지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지 마누라입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남편을 쉽게 멸시하는 태도는 결국 아내가 손해를 봅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것은 정말로 소중한 일입니다.  사래는 그 일을 잘 했던 여인 같습니다.  그랬던 어진 여자가 남편에게 후손을 위해서 다른 여인을 안겨줄 수 있을 만큼 넓은 아량을 가진 후덕한 여자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막이 떠나니까 사람이 달라집니다.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마디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가지 긁기를 즐겨하지 마십시오.  바가지만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단란한 가정도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래의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녀는 하나님까지 들먹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입니다.  그에게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하나님 앞에 "당신이 내게 준 그 여자가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등진 범죄한 인간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 행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내가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고통을 당하면 "너 때문에"라는 말을 즐겨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너"에게서 출발을 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오늘의 이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이 문제는 내 문제입니다.  내 탓입니다.  내가 못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행동을 했던 결과 세 번째 문제는, 책임을 회피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의 가장이 누구입니까?  아브람입니다.  그것이 리더십입니다.  책임입니다.  그런데 책임을 포기해버립니다.  나쁜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데 그것을 아내에게 전가해 버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어머니인 사래의 인간성이 파괴됩니다.

본문에서는 "학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학대하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사람을 학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너질 때 사래라는 여인도 보통 사람과 똑같은, 마음의 히스테리를 견디지 못해 여종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억하십시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책임을 지려고 하는 가정일수록 행복한 가정입니다.  책임을 지려고 하는 교인일수록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주어진 일들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하는 책임 의식을 가지십시오.  지금의 이 문제는 모두가 나 때문이라고 하는 책임 의식이 내 가정을 복되게 하는 길입니다.  그 모습이 이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길입니다.  내 교회를 부흥시키는 길입니다.

한편 하갈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사랑 받던 사람에서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자기를 지원했던 여주인 사래가 자신을 학대합니다.  사실, 하갈이 아이를 가졌다고 얼마나 떠들고 자랑하며 돌아다녔겠습니까?  어제까지 똑같이 노예 신분에 있다가 주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거들먹거리는 하갈의 태도가 보기 싫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어디 잘 되나 보자."  그런 앙심을 품었던 다른 종들은 서슬 시퍼런 여주인의 학대와 보조를 맞춰가면서 얼마나 무서운 왕따를 시켰겠습니까?

하갈은 견디지를 못해서 도망을 갑니다.  자기 고향,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추억이 있었던 이집트로 가다가 광야의 한 샘에 머물렀습니다.  외롭고 절망에 빠진 이 여인, 세상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 여인, 그래서 더 깊이 좌절하는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말합니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레를 피해 도망합니다.  어디로 갈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래를 피해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네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이 말의 직역은 "너는 다시 돌아가서 사래의 권위 아래서 겸손하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부르실 때 "아브람의 아내된 자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아이를 가진 복된 여인이여!" 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뭐라고 불렀습니까?  "사래의 여종, 하갈아!"

우울증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이야기하기를 소외는 자기 스트레스에서부터 온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오면 잠시 피하려고 하는데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스트레스는 그 사람에게 약한 것이니까 어디를 가든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과 친숙하도록, 이기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으로 도움을 주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피해서는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피하면 문제는 더 커질 뿐이고, 그것이 결국에는 우울증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답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치료하십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그러면서 하갈에게 세 가지를 축복합니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네가 아들을 낳게 될 터인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너의 아들은 이 땅에서 거칠게 살아갈 것이다."

하갈은 그 말씀 앞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갈이 누구입니까?  이 여인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방 민족인 이집트 여인입니다.  그것도 이집트의 노예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도 버림받아 쫓겨난 노예였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림받은 이방인입니다.  그 여인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해 버렸던 그 여인을 하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에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해 버렸다.  남편도 나를 버렸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힘들어하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내 곁에 계셨습니다.  나 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여러분 가운데 "나는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것은 보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의 헌신이 너무 적기 때문에, 내 존재가 교회 안에서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와 상관없다고 절망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위인이 없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람의 생애를 지켜보신 하나님은 하갈의 생애도 지켜보셨습니다.  아브람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정처 없이 도망자의 고단한 길을 걷고 있는 하갈을 샘물 가에서 만나셔서 환대하시는 은총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을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는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래도 하나님의 은총이 벗겨지니까 한낱 질투하는 치졸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의 은총이 거두어지니까 비겁하게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아내 사래를 이용해 먹는 비겁하고 더러운 인생이었습니다.

오늘도 내가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별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별 것입니다.  그만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목숨으로 값을 지불하신,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고, 사랑 받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2천년 후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출입하는 한 여인, 수줍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던 여인, 주변의 시선이 너무 따가 와서 그늘진 곳,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해 다녔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날도 목이 말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물을 길러 가는데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가지 않는 한 나절을 택해서 그 뜨거운 태양빛을 고스란히 다 받으며 나갔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작열하는 중동지방의 뜨거운 태양보다 사람들의 멸시하는 시선이 더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알고 계셨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습니다.  사랑 받을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처럼 싫었던 눈길들이었습니다.  그처럼 필요했던 물이었습니다.  그는 목이 말라서 사람을 피해 뜨거운 길을 걸어 여기까지 물 길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물동이를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쏘아보는 무수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마을로 뛰어갑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외칩니다.  "내가 오늘 메시야를 만났다."  그 무서운 소외와 외로움의 사슬에서 풀어지자 그 여인이 기뻐 뛰며 외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 분의 사랑의 눈동자를 만났다. 내 모든 삶을 아시는 그 분을 만났다. 내 한숨과 절망을 아시는 그 분을 만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수가성을 지나가실 때 다른 길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수가성으로 가야겠는지라."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사랑의 눈동자를 마주치며 그녀가 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대신지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 길을 가셨습니다.

♬"외로울때 주님의 얼굴 보라 /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들어 주를 보라 내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외로우십니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외면 당하는 그 수치를 가지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내 상처와 곤고함과 좌절을 가지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하갈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하나님은 죄 많은 수가성 여인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내 절망과 외로움과 한숨을 해결해주시는 유일한 치료자이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외롭고,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외롭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외롭고,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외롭습니다.  이 외로운 인생길, 그러나 주님의 환대 없이는 결코 인생의 외로움이 풀리지 않습니다.  하갈을 붙잡으셔서 다시 제 길로 가서 살게 하시고 능력으로 새 역사를 일으키신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 고통스러운 환경을 혼자서 외롭게 걸어가지 마십시오.  내 모든 것을 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분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의 놀라운 능력이 나를  붙잡아줄 것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이 답답함을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곤고함을 살피시는 하나님, 내 마음의 답답함을 아시는 하나님, 그 분 앞에 나아오십시오.  혼자서 몸부림치면서 절망하지 말고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의 만지심과 도우심을 받으십시오.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게 일어나 주신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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