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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동역 (막 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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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동역 (막 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한가위, 추석은 풍성하고 넉넉한 명절이라는 뜻입니다. 추석은 풍성한 가을걷이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때입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계절답게 햇과일과 햇곡식이 풍성한 계절입니다. 추석은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는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고 시기입니다. 특히 올해는 연휴기간이 최고 9일까지 되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대이동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고 행복한 명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한가위보다 훨씬 더 풍성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광야에 외치는 소리를 두셨습니다. 누구든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은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 앞에 드러나셨습니다. 그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있었던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친히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셨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땅의 과정과 하늘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광야에 이끌려 나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천사에게 시중도 받으셨습니다. 고난뿐만 아니라 영광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후에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이 외쳤던 내용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외치셨습니다. 요한 이후, 요한의 외침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복음을 혼자서 전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복음을 위하여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능력을 행하기 전에 보고 배울 사람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사역을 하시기 전에 그것을 배우고 실천할 제자를 먼저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보고 배우고 전할 사람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을 함께 할 동역자를 부르셨습니다. 
     
복음의 요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동역’입니다. 복음에는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일할 사람을 세우셨다면 우리에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롬 16:3, 9, 21).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복음의 동역자로 부르고 세우고 맡기고 보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I. 형제

16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6a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셨습니다. 이 때 지나가다[ paravgw/파라고]는 말은 ‘가까이 끌어 들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바람 쐬려 바닷가를 거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으셔서 그곳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는 예수님께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누구를 부르셨습니까? 19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9a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부르신 다음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두 번째로 부르심으로 받은 두 사람입니다.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이들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제[ajdelfov"/아델프호스]는 동일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지 부모가 같다는 것이 형제의 조건은 아닙니다. 같은 국민에 속한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동료 신자를 형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든 열 두 제자 중에 형제가 두 팀, 네 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체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사람이 친 형제였다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형제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섬기는데 육신적으로 형제라는 것을 내세우면 파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형제끼리만 너무 친하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함께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서로 마음이 잘 통하였을 것입니다. 최소한 두 형제 사이에는 질서가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두 형제가 마음을 합쳐서 다른 제자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끌어주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형제가 두 팀이나 되면 단점도 있었을 터인데 예수님은 좋은 점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처음 제자들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혈육의 형제를 넘어서 진정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은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자기 형제를 제자로 이끌어 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3:9 말씀입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형제로 동역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형제가 됩니다. 몸속에 흐르는 피는 A형, B형, AB형, O형으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영속에 흐르는 피는 모두 J형, Jesus의 보혈이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제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형제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써 사랑이 넘치는 형제애로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신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II. 성실

16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부였기 때문에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농부였다면 그들은 밭에서 씨앗을 뿌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부로써 열심히 그들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두 형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9절 말씀입니다.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부르신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깁다[katartivzw/카탈티조]는 말은 완성하다, 수리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로써 다음 고기잡이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자신의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로써 그물을 던져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역시 어부로써 다음 고기잡이를 위하여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1. 성실한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할 일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할 일 없이 예수님의 주변을 서성이는 건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참고로 잠언 28:9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 28:6)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 보다 나으니라.
     
세상에서는 성실하게 행하여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굽게 행하고도 부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비록 가난하여도 성실한 사람이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사람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결과보다도 어떤 자세를 가지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보다도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합니다.

     
2. 우리는 성실하게 동역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큰일을 맡습니다.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조금만 노력하면 미국의 어떤 대학도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노력하는 것,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14일 필라델피아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한 말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소개한 이 말은 자신이 학창시절 방황하며 성적이 부진했을 때 어머니가 해준 충고와 격려였습니다.
     
신앙을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과를 바라보며 기꺼이 그 과정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눈물과 땀을 흐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형제와 자매로써 성실하게 자신의 은사에 충실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III.목적

17절 말씀입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분명하였습니다.
     
1. 목적 있는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바람처럼 몰려왔다가 바람처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셨던 것도 ‘가서 제자 삼으라!’는 자신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로마서 12:2 말씀을 참고로 하겠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로마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우리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2. 우리는 목적을 위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실하여야 할 이유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깡패가 조직을 위하여 성실하면 할수록 사회의 큰 해악이 됩니다. 도둑놈이 직업에 성실하면 큰일이 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그에 성실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방랑하던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여행에 지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집을 지을 곳을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놀러왔습니다. 
     
첫 번째 친구가 “고요한 호수가 어떨까, 한가롭게 즐길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가 “언덕 맨 꼭대기가 어떨까, 하늘의 별들을 가질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시인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가 “아무도 살지 않는 숲 속이 어떨까, 고독을 즐길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마저도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길가에 집을 지을 거야. 나처럼 방황하는 낯선 이들의 친구가 되고 싶거든.”
     
그는 방황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할지 장소를 알았습니다. 목적을 위하여 장소를 선정하는 것이 목적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우리를 이끌어 가도록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은사와 재능을 불태워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IV. 희생

18절 말씀입니다.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예수님의 부름 받은 시몬과 안드레는 바다에서 그물 던지다가 그것을 아예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에서 따라가다[ajkolouqevw/아콜루데오]는 ‘함께 같은 길에 있다’, ‘동행하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되는 조건은 버려두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에서 버려두다[ajfivhmi/압히에미]는 ‘포기하다’, ‘방해하지 않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1. 희생하는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처음 네 사람은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을 위하여 가지고 있던 것을 놓은 사람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하여 지금 손에 잡은 것을 놓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어디에선가는 이런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고 하지요. 입구가 좁은 호리병박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쌀을 한 움큼 넣어 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냉큼 내려와서 호리병 속에 손을 넣습니다. 호리병 속에 손을 넣을 때는 간신히 들어가지만, 쌀을 움켜 쥔 주먹은 좁은 입구 때문에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쌀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먹을 더욱 굳게 쥐고 손을 빼보려고 하지만 결코 손은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를 잡아가려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호리병박 속의 손을 놓지 않아서 결국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손을 펴기만 하면 손은 빠지고, 나무 위로 올라가면 잡혀가지 않을 터인데 쌀 한 움큼 움켜쥔 것 때문에 잡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손만 펴면, 손에 움켜쥔 명예, 돈, 권세, 쾌락, 등등의 쌀 한 움큼만 포기하면 살 수 있는데 이것을 놓지 못합니다.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는 결코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감추어진 보화가 있는 밭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야 합니다. 희생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희생함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16:24 말씀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십자가를 내어던져 버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쉬운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기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희생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어서 한 시간을 새벽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주일이 월화수목금토일요일 그리고 주님의 일하라고 주일 하루가 더 있어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똑같이 일주일 칠 일 중에서 나누고 쪼개서 봉사합니다. 가정을 내팽개치고 주님의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버렸습니까? 그물? 배? 유산? 그것은 버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사용되면 됩니다. 그런데 자존심은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우쭐하고 싶은 마음은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며 스스로 초라해 지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동역자로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복음을 위하여 먼저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함께 있으면서 보고 배워서 실천하는 제자들이 없이는 복음은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 모두가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형제는 못났어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써 서로에게 형제로써 자신의 은사를 따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을 무척이나 힘들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서 성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다양한 힘이 모아져야 합니다. 한 방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한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형제로써 성실하게 목적으로 위하여 희생함으로 동역자가 됩니다. 이것은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형제로써 성실하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랑하며 섬기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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