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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계 속의 회복 (삼하 19-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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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속의 회복 (삼하 19-20장) 
 
 
다윗은 회개한 후에 징계의 과정을 겪었지만 인간의 한계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우셔서 그분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사무엘서의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먼저 19장 1-8절은 개인적인 슬픔에 빠져 공인의 책임을 잊은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압은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고 있음을 듣습니다(1). 백성들도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는 사실을 듣습니다(2). 이 때문에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승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개선하지 못하고 마치 싸움에 쫓겨 도망하는 패잔병들처럼 가만히 성으로 들어와야 했지요(3).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4)라고 울부짖는 큰 소리는 자식 가진 모든 부모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진한 사랑이 강하게 느껴지지요.

단순히 자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다윗의 슬픔을 더 크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이러한 다윗의 태도가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5)하는 것이며,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6)이라 해석합니다. 승리한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들만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했지요. 그리고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7)라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닥치게 될 불행을 거침없이 말합니다. 냉정하고 협박 같은 말이긴 했지만 이 말들이 자극제가 되어 다윗은 슬픔 중에서 일어나 백성들을 맞이합니다(8).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잉태된 아이가 죽었을 때에는 다윗이 의연한 태도로 받아들였었습니다(12:19-20). 압살롬의 반역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잉태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이때도 의연한 신앙 자세가 필요했지요. 공인은 부자간의 정조차 내던져버리는 냉혹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아픔이 공인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다윗처럼 공인으로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를 언제나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하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 극복하기 어려운 우리네 인간의 한계겠지요. 

성도는 사회적으로 공인의 자리에 있게 되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도 공인입니다. 성경이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롬 12:5)가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부모 자식 관계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관계이며 가족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체로서 몸을 세우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가르치셨지요. 진리의 말씀이지만 냉정하게 들리기도 해서 우리네 신앙도 종종 시험을 받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때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태도를 잊어버리게 하니까요.

9-15절, 41-43절은 포용 정책을 쓰려다가 편애의 결과를 낳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은 다윗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9-10).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유다 장로들”에게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11-12)라고 기별하였습니다. 반역의 주동자이자 조카였던 “아마사”에게는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13)고 전했습니다. 다윗의 포용정책은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14)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 족속이 단독으로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게 한 일(15)이 이스라엘의 다른 족속들의 분노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다윗의 처사는 불평 부당했고, 유다 지파의 행위도 다른 지파들이 함께 논의 중인 사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버린 “도적”(41)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지요. 유다 사람들은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인데 분내는 이유가 뭐냐고 했고(42),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다”고 맞받아쳤습니다. 혈족 관계의 소수당인 유다 사람들이 다수당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강경했지요(43). 다윗 왕이 그들에게 내밀었던 포용의 손길이 특권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다윗에게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아마사를 비롯한 유다 지파가 반역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독이고 포용하는 정책을 사용한 것이지요.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낸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편에서 보면 공평하지 않은 정치적 편애였고, 혈연과 지연을 중심의 인사이동으로 비췰 수밖에 없었지요. 다윗은 유다 사람들의 마음은 일제히 얻었으나 돌아오려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20:1)는 세바의 반란 격문은 이스라엘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여기서 또다시 인간 다윗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가 유다 지파에게 특별한 포용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얻었겠지만, 유다 지파와는 다소 소원(疏遠)해졌겠지요. 두 자녀만 있어도 편애하지 않고 완벽하고 공평하게 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는 그동안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동생을 편애한다고 불평하지요. 새신자에 대한 목회자의 특별한 관심이 기존 신자들에게는 편애로 보일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공평한 일도 그 순간에는 불공평하지요. 다윗이 아무리 탁월한 왕일지라도 사람인 이상 모든 백성에게 불만이 없이 완벽한 정책을 실현할 수는 없었겠지요.

16-23절의 시므이에 대한 포용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 일천 명”(17)과 함께 먼저 왕을 영접하며 지난날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18-20). 그는 아비새의 판단처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했습니다(21). 하지만 즉각 공의를 실행한다면 시므이와 함께 있는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의 마음과 다윗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정치적 현실을 생각하며 기회주의적이고 뻔뻔한 시므이의 죄를 알면서도 당장은 살려주고 공의의 시행을 그의 아들 솔로몬의 때까지 보류합니다(왕상 2:8-9).

‘공평과 정의’의 실행은 성경이 반복하여 언급하는 통치자의 중요한 덕목입니다(렘 22:3). 공평과 정의를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백성들은 분통을 터트립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이러한 덕목을 발견하지 못하는 성도들 역시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 덕목을 갖춘 지도자를 찾아서 이곳저곳 다니는 성도가 얻는 것은 더 큰 실망과 더 많은 상처입니다. 먼데서 보는 산은 아름답지만 가까이 갈수록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님을 깨닫는 것과 같지요. 성도는 이 땅에 있는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공평과 정의를 발견할 수는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혹독한 하나님의 연단을 받을지라도 인간이라는 한계까지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부라면 염세적 비관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한계를 가진 인간을 기대하지 않고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실 “그날 그 때”와 “그”분을 소망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공평과 정의의 온전한 실행은 완성된 천국에서 영원히 될 일이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도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을 받는 심령은 그분의 공평과 정의를 맛봅니다. 그래서 선천적 기형이나 악조건을 가졌음에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 많지요.

24-30절은 진실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피난길에서 시바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시바의 말만 믿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돌렸지요(16:1-4). 하지만 실상 므비보셋은 다윗이 평안히 돌아오기까지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고 있었습니다(24). 이것은 애도의 표시로서 다윗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주지요. 새 왕이 등장한 상황에서 이전 왕의 피난을 애달파 하는 일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시바의 간교한 술책이 드러났지만, 다윗에게는 중대한 위기에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인지라 벌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악인일지라도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을 냉정하게 처벌하기가 어려운 것이 또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또한 충성심을 가졌을지라도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람에게 보상하지 못하는 것도 인간의 한계지요. 원칙으로 따지자면 시바를 벌하고 그의 재산을 모두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어야 하지만 다윗은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29)고 판결합니다. 종에게 속아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므비보셋보다 주인을 속였을지라도 도움을 주었던 시바에 대한 개인적 고마움이 작용한 편파판정인 셈이지요.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볼 수 없는 인간으로서(삼상 16:7), 또한 모든 일을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20장 14-26절은 세바의 반란까지 진압되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국의 회복은 다윗이 징계를 받는 동안 뭔가 하나님께 공로가 될 만한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인간이 가진 한계 속에서 많은 허물들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죄와 허물로 얼룩진 당신님의 왕국을 회복하는 주체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지 주시지 않았다면 다윗의 위치는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었지요. 왕이신 하나님은 은혜와 회복과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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