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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모이고 모이게 하는 명절 (시 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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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모이게 하는 명절 (시 126:1-6) 
 

1. 추석, 민족의 대이동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3일 남았습니다. 명절 때만 되면 우리 민족의 1/2 이상이 이동을 하는데, 올 추석은 연인원, 그러니까 오고가고를 다 포함하여 일단 이동하는 사람들이 4천 9백만에 이를 것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는 셈입니다. 사실 이 ‘민족대이동’이라는 말은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게르만 민족이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서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게 된 것을 일컫는 世界史的인 用語인데요. 언제부턴지 명절을 맞아 하늘과 땅과 바다로 난 길로 통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올 추석은 지난 금요일 오후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오늘과 내일과 모레가 그 頂點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명절만 되면 사람들이 이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너무 당연한 것을 묻고 있습니까? 타향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마음은 항상 고향과 가족들에게로 가 있던 중에 명절 연휴를 맞아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을 필요도 없고, 그런 질문을 받았다고 달리 설명할 必要도 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죠?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곧 고향으로 가실 분들이 있을 것이고, 또 歸省할 가족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명절에 고향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긴 한데, 그렇게 고향으로 가는 귀성길이 문제입니다. 차란 차는 몽땅 도로로 나온 것처럼, 고속도로 등이 아예 주차장과 같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저의 귀성 경험 가운데 잊어지지 않는 것은 대학 1학년 때입니다. 미리 기차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출발 당일 입석표를 사서 부산행 무궁화 열차를 탔습니다. 귀성열차를 타면 여러 가지 진풍경이 벌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소위 ‘메뚜기 족’들입니다. 입석표를 사서 서서 가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좌석에 앉아가는 사람들 중 혹시 화장실에 가거나, 다음 역에서 내리기 위하여 일어서면 쏜살같이 뛰어가서 그 자리에 앉습니다. 

그렇게 앉아 3,4분이라도 잠시 눈을 감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좌석의 주인이 화장실에서 돌아오거나, 이번 역에서 탄 좌석 주인이 오면 지체 없이 벌떡 일어서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메뚜기 족’의 예의입니다. 뛰어난 ‘메뚜기 족’이 되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하고 행동도 민첩해야 합니다.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 곧 화장실 갈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눈치껏 잘 살펴서 그가 일어나는 즉시 그 자리로 엉덩이를 들이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경쟁자들에게 기회를 뺏깁니다. 이렇게 서서 가다가 빈자리가 생기면 재빨리 거기에 앉아 잠시라도 앉아가는 사람들을 ‘메뚜기 족’이라고 합니다. 이런 메뚜기 작전을 할 눈치나 요령이 없는 사람은 그 대신에 조금 뻔뻔해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좌석의 팔걸이에 걸터앉는 것입니다. 사실 좌석에 걸터앉는 것은 좌석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말 귀찮고 얄미운 일입니다. 

열차의 좌석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팔걸이에 팔을 얹고 어깨를 조금 팔걸이 쪽으로 기울이면 조금은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자신의 팔걸이에 커다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는 조는 척 하고 있으면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더러 옥신각신 다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불편을 감수합니다. 왜요? 고향에 가는 길이니까요! 가족들과 친지들과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미 그들의 마음에는 한가위 보름달이 둥실 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귀성의 모습은 우리 민족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그들의 최대 명절인 춘절(음력 1월 1일)과 10월 1일 국경절이면 수억의 인구가 이동합니다. 우리나 중국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인들 역시 주로 추수감사절에 고향과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귀성의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민족 대이동의 시작은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올 때,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그리고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리고 最近世史에서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러시아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귀환한 것 등, 성경과 그들의 역사 여러 곳에는 민족 대이동의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추석 대이동과는 다릅니다만!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유대 민족의 민족적인 대이동과 관련된 것입니다. 

2. 귀환한 사람들,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

1) 돌아온 사람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B.C.586~538) 이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갑자기 망했습니다. 이어서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유대 포로민들은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귀환은 B.C. 538년경 유대 총독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약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귀환했습니다. 

그들은 스룹바벨, 스가랴, 학개를 중심으로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귀환은 그 뒤 약 80년이 지난 B.C. 458년경에 있었는데, 모세 이후 율법에 가장 탁월했던 학사 에스라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학사 에스라는 유대 땅으로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쳐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귀환은 B.C. 445년경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 번의 귀환과 관련된 오늘 본문은 일반적으로 두 번째로 귀환한 학사 에스라가 기록했다고 봅니다.

본문의 1절부터 3절에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감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 재건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방이든지 귀환이든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현실이었는데, 그 일이 페르시아 황제의 입으로 공표되고, 황제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2절 하반 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이러한 귀환을 보고서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해방과 귀환을 보고 주변의 이방 민족들까지도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나라를 잃고 바벨론 등지로 뿔뿔이 강제 이주되었던 유다인의 귀환과 회복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2절과 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한숨과 탄식과 통곡과 눈물로 지내야 했습니다. 조상적부터 이어 온 기업과, 피땀 흘리며 일궈놓은 밭과 포도원, 정성껏 돌보며 가족처럼 기른 가축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여 수확한 양식 등 모든 재산을 다 빼앗겼고, 바벨론의 분산 정책에 의해 가족들마저 뿔뿔이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나라도, 주권도, 신분도, 성전도, 율법도 모두 다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서러운 종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자신들에게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렇게 서러운 세월을 살아온 것은 自業自得이었습니다. 그 조상들과 자신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죄악 된 길에서 돌이키라 하셨지만 듣지 않았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원래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했습니다. 슬픔과 탄식이 변하여 웃음이, 눈물과 통곡이 변하여 기쁜 찬양이 가득 차게 된 것이죠. 가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입 속에 혀가 저절로 들썩들썩 움직이면서 기쁨의 찬양이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감격적인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너무나 기뻐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고, 혼자 있어도 웃음이 저절로 나왔던 적, 감격을 억누를 길이 없어 그냥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포로에서의 해방된 감격은 바로 죄에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가장 기쁜 일, 환희에 가득차서 노래하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소리칠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일인 줄로 믿습니다. 나 같은 것을 이렇게 사랑하시다니! 언제인지 시간을 셀 수도 없는 創世 前에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다니! 나의 죄를 씻어주시고 그 죄의 벌까지 없이 하시다니! 하나님의 입으로 의롭다 하시고 그 입으로 자녀라 불러주시다니! 주님 안에 살며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하시다니! 천국의 신비를 체험케 하시다니!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리게 하시다니! 여러분,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포로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일 먼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앙의 회복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의 회복이 곧 이스라엘의 회복이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백성, 즉 세상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혼자일 때도 예배해야 하고, 여럿이 모였을 때도 예배해야 합니다. 즉 주 안에 있는 개인과, 함께 모인 사람들의 중심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면 예배가 그 만남과 모임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중심으로 하거나, 예배가 아닌 다른 것에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지난 날 각자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간증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돌아올 사람들

오늘 본문은 돌아온 자들의 감격과 즐거움의 노래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후반부인 4절부터 6절까지에는 아직도 포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과 같이 돌려보내소서.” 여기서 “남방 시내들”이란 네게브 사막 지역에 있는 시냇물로서 乾燥期에는 메말라 있어 그것이 시내인지 뭔지 알 수 없으나, 降雨期에는 많은 물이 흘러 시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말씀은 아직도 메마른 광야처럼 힘겨운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바벨론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 자신들처럼 돌아오게 되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5절과 6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란 포로 생활가운데 큰 고통과 번민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날, 회복의 날을 기다리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서 시인은 뭐라고 말합니까? ‘지금은 고통하고 울면서 힘겨워 하고 있으나 기쁨의 날, 추수하는 날, 곧 회복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의 심정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자신은 포로에서 돌아온 감격 가운데 살고 있으며, 고향 땅에서 이스라엘의 재건과 신앙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과 보람이 크면 클수록 아직도 포로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이 누리는 감격과 보람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도리어 먼저 돌아간 자들의 즐거움의 소문 때문에 그 고통이 배나 더해질 사람들에 대해서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이 기쁨으로 거두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시를 쓴 것입니다. 바벨론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뜻이고, 자신도 그들 때문에 울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저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대학 시절, 명절 때마다 매번 집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자취방에 남아서 명절을 보내는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외롭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솔솔 풍겨오는 명절 음식 냄새가 지나치다 못해 눈에 아른거리는 환상이 보이기도 하고, 가족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슴을 찌르는 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군대 시절, 군에서 명절을 맞았을 때에는 병사들과 하루 종일 축구를 했습니다. 저 자신이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서였고, 병사들에게도 고향 생각과 가족 생각을 잊게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물론 그런다고 잊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명절을 맞아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낼 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명절인데도 고향과 가족들에게로 갈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軍이나 職場이나 學校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또 북녘 땅이 고향이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 등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영적으로 아직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한 자들, 지금 우리처럼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즐거움과, 구원의 기쁨과 감격, 그리고 주안에서 한 家族된 형제자매들의 신령한 交際를 맛보지 못한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먼저 歸還한 자로서 자신의 감격과 그 즐거움에만 빠져 있지 않습니다. 돌아온 자들보다 더 많은 자들이 아직도 포로 중에 남아 있는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이 세상에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바로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까지 시인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도 우리 교회는 의료, 미용 팀이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떠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떠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들 모이는 명절에 부모님과 처자식, 혹은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갈 준비를 다 하고서도 아내의 반대, 남편의 반대, 혹 부모님의 반대로 가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번에 단기선교를 떠나는 이들은 명절 때만 되면 죄인 아닌 죄인이 됩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얻었습니다. 명절이 모두가 모이는 때이지만, 아직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오지 못한 흩어진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오게 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천국 잔치와 구원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선교 팀이 떠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나 누군가 하나님의 가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아야 하기에 그 일을 위하여 가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볼 때 가족들이 함께 모여 명절을 보내려는 사람들이나, 단기선교를 떠나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의 잔치 자리에 오지 못한 자들이 다음 명절에라도 주님의 잔치 자리에 올 수 있도록 그들을 불러 모으러 가는 것이 때문입니다. 명절인데도 고향으로 오지 않은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님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명절에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부모나 자녀들이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해도 서운해 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또 다른 자녀들, 여러분의 또 다른 형제와 자매들을 하나님의 품 안으로 데리고 오기 위하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또 다른 가족들이 모이기까지 …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 고향 땅을 밟은 감격과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땅에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한 즐거움이 마치 꿈만 같다는 표현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즐거움과 감격을 뒤로 한 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자들을 위한 안타까움을 표현했습니다. 나만 좋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지요. 내가 되었다고 다른 이들도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이 돌아오기까지 그들을 위한 노래, 그들을 위한 기도, 그들을 위한 헌신이 뒤 따르는 것이 주께 먼저 돌아온 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오늘 본문을 “먼저 돌아온 자의 노래”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주님께로 먼저 돌아온 자의 노래는 자신의 감격과 행복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의 노래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자를 안타까움과 아픔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노래는 여러분 역시 불러야 하는 노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교회와 성도 여러분 모두를 대신하여 떠나는 단기 선교 팀을 위해 기도와 관심을 가져 주시고, 여러분 역시 가까이와 멀리에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한 이들을 위한 실제적인 관심과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땀과 눈물로 얼룩진 기도와 헌신으로 인하여 지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 그렇게 수고하고서도 그 단을 거두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자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 단을 가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시편 126편을 지은 시인처럼 아직 주께로 돌아오지 못한 자들을 위한 삶을 살도록, 그 사명 가지고 단기선교 떠나는 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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