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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압, 베드로 (왕상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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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 베드로 (왕상 2:1-6)


젊은 부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돌봐주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만두시게 되었다고 전화하셨습니다. 이 며느리는 급한 대로 우선 당장 드실 음식부터 마련해야한다는 생각에 시장으로 뛰어가서 이것저것 재료를 구입하여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많은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어머니께 보낸 후, 지쳤지만 모든 정성을 다 들여서 장만한 음식들을 보냈으니 어머니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흐뭇했습니다. 

다음 날 어머님을 뵈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애 많이 썼다고 치하하시면서 뒤 끝에 “그런데 얘야, 내가 너에게 전화했을 때는 네가 음식을 해오기 바란 것이 아니라 전화를 받는 대로 달려와서 그냥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단다.” 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이 며느리는 그 때야 ‘아차’ 했습니다. 어머니 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요압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세월 동안 다윗과 함께 하면서 다윗 옆에서 다윗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이 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사울과 전쟁을 할 때에도 많은 수훈을 세웠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에도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루살렘 땅은 본래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고 옛날 다윗 때에 빼앗은 후, 자기 땅이라고 큰 소리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중동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 때 수훈을 세운 사람이 바로 요압이라는 장군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다윗에게 아주 특별한 충성을 하였습니다. 이런 충성은 드문 일인데, 암몬 나라와 전쟁시 마지막으로 수도 랍바 성을 공략할 때였습니다. 모든 일을 거의 다 끝내고 들어가서 깃발을 꽂으면 되었는데 요압은 신하들에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자기가 들어가면 이 성을 점령한 것에 있어서 수훈을 세운 사람이 자기가 되므로 왕의 이름으로 이 성을 점령해야한다는 생각에 왕에게 연락하여 와서 깃발을 꽂으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충성스럽습니까? 틈만 나면 다른 사람이 한 일까지도 내 공로, 내 이름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인데 요압은 이러했습니다. 

심지어는 다윗을 위해서 못할 짓까지 했습니다. 다윗의 죄 중 아주 큰 것이 밧세바의 죄인데 그 죄보다 훨씬 더 무섭고 악한 죄가 우리아의 죄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짓고 난 후 아이가 생겼는데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닌 것처럼 꾸미려고 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를 주고 집에 가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 아내에게 갈 줄 알았던 우리아가 얼마나 충성스러웠든지 모든 부하와 동료들이 전쟁 중에 있는데 자기만 갈 수 없다하여 가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은 그 다음날 다윗이 그를 불러 술을 먹인 후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날은 틀림없이 아내와 잠자리를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또 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아에게 다윗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우리아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면서 장군에게 가라고 했는데 그 장군이 바로 요압이었습니다. 그 편지는 다윗이 요압에게 우리아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지시를 한 편지였습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우리아를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적진 속에 깊숙이 집어넣은 후 우리아만 남겨두고 다른 장수들은 다 철수하게 했습니다. 우리아만 홀로 남겨졌으니 꼼짝없이 비참하게 전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을 한 사람이 요압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아주 특별했던 요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당신이 죽거든 요압을 반드시 처형하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요압이 다윗에게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이런 문제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도 황홍이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한평생 가정을 위해서 모든 힘을 다했는데 퇴직하니 아내로부터 이혼장이 온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쓰지 않고 먹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나중에 자식으로부터 우리 어머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이런 일이 많습니다. 제가 이런 상담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십니까? 나름대로 모든 힘을 다해서 남편을 사랑했는데 남편의 마음이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서럽고 원통하고 분합니다. 왜 이런가를 생각해야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정말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여기에도 우리 나름의 생각할 바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유언으로 요압을 그렇게 처형하라고 한 까닭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아브넬과 아마사 라는 장군을 요압이 암살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경을 연구해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먼저, 아브넬부터 보겠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사령관이었고,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 집안의 중직을 담당하는 충신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넬이 협약하기 위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협약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요압이 암살하였습니다. 요압이 자신의 동생을 전사시킨 보복으로 아브넬을 죽였기 때문에 이런 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다윗은 이야기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브넬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브넬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늘 군지휘관을 했습니다. 즉 쫓아다닌 당사자는 사울이었지만 실제적인 일은 아브넬이 감당했습니다. 그는 사울의 신복으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쫓아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의 집안을 대신하여 다윗을 대적하여 아직 통일되지 않은 다윗 왕가와 늘 싸웠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사울 집안에 그토록 충성하던 아브넬이 마음을 바꾸어 사울 집안 왕가를 바치려고 왔는데, 요압이 죽였기 때문에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다윗을 알고 계시겠지만 다윗이 섬기던 주군을 배반하고 온 아브넬을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아브넬은 사울이 죽고 난 후 사울 집안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실세 일인자였습니다. 그러다 그 집안에 못된 짓을 하고 난 후 싫은 소리를 들었다고 이제부터 다윗을 섬기겠다고 돌아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도저히 좋아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에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군을 한 번 배반 한 사람이 또 배반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에도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합니다.

또 아마사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압이 군사령관으로 있던 중 자기 잘못으로 인해 다윗에게 군사령관직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를 아마사가 차지했습니다. 이 아마사를 죽이고 요압이 다시 군사령관직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마찬가지로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인생에는 항상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한 하나의 이유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마사는 어떤 사람인가 보겠습니다. 아마사라는 사람은 다윗의 부하로 오랫동안 충성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나라를 차지했습니다. 그 때 아마사가 지금까지 섬기던 주군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밑에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다시 돌아와서 군사령관을 하고 있으므로 사실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썩 잘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요압이 두 사람을 암살한 것은 잘못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요압을 처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내가 부모님에 대해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식에게 정말로 제대로 하고 있는가? 혹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잘못이 없는가? 이런 것들을 고민해야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회사를 경영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나름대로 신실하게 신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내 자식이,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가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보지 아니하는 까닭을 제대로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다고 받아들이시는데 정말로 내가 부모님 마음속에 흡족할 정도로 모시고 있는가를 한 번 더 생각해야합니다. 성경에는 부모님을 모시면 틀림없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틀림없습니다. 하나님도 약속하시고 실제 세상에서 분명한 여러 가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섬기느라 섬기는데 왜 복을 받지 못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정말로 고민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것을 고민해야합니다. 

요압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다 생각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생각난 이유는 두 사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다 최고 큰 어른을 모셨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을 모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제법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요압이 잘못한 것은 조금 전에 보았습니다. 베드로도 못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가시는 길인 십자가를 막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다른 사람은 버릴지라도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렇게 큰소리 쳤던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요압은 끝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처형하라고 유언했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큰 잘못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요압은 충성도 하고 수훈도 세웠고, 공로도 세웠지만 정말로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차이가 이것입니다.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과 악수를 해보면 정말로 나하고 악수하고 싶어서 악수를 하는가, 진심이 담겨서 하는가? 봉사를 하는 것도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가? 열심히 일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는가? 그냥 남들도 다 하니까 그냥 하는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런 마음은 심지어 강아지도 압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부모님은 모르시겠습니까? 다 아시지만 그냥 넘어가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꼭 알 것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무서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아십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다윗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까? 밧세바의 죄에 넘어서 정말로 무서운 우리아의 죄를 지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만한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 그 죄에 대한 벌을 주시지만 용서를 하실 뿐 아니라 회개하는 다윗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용서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을 읽을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 법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합니다. 다윗에게 그렇게 하셨으면 그것과 똑같이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다윗에게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반면에 요압은 충성도 했고, 수훈도 세웠고, 공로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 느낍니다. 다윗같이 위대하고 신령한 사람이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요압의 그런 점을 한 예로 보겠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식과 무슨 전쟁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압살롬이 기어코 전쟁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제거해야 자기 입지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다윗은 전쟁에 나가는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하였습니다. 당부 정도가 아니라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 명령은 나를 보고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요압을 비롯한 군지휘관들에게 그러한 명령을 하고, 모든 부하들도 다 들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에게 제일 멋진 것은 머리카락이었는데 말을 타고 나무 밑을 달리다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렸습니다. 말은 빠져 나가고 압살롬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걸리고 말았습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추격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부하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죽이면 되었지만 다윗의 명령을 부하들이 다 들었기 때문에 장군 요압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요압은 여기까지 올 것 없이 그냥 죽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하는 왕께서 요압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므로 나는 아무리 많은 상을 준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압은 자기가 뛰어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다윗의 아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물론 압살롬을 죽일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렇게 부탁하고 당부하고 명령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죽였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정말로 충신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반역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은 자식입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슬픔에 잠겨있는 아버지에게 요압이 찾아와서 일어서 나가서 부하들을 치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요압은 다윗에게 이어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심하리이다(삼하19:7)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못된 말인지 모릅니다. 사울에게 그렇게 쫓겨 다니고, 압살롬에게 반역당한 일보다 더 화가 심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할 말이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 옆에서 충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많이 도와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압은 정말로 다윗을 위한 충성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압이 한 충성은 나라를 위한 충성이 아니라, 다윗을 위한 충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충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생각해봅니다. 어른을 잘 섬기는 일은 정말로 값집니다. 어른을 잘 섬기고 잘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 5장 16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하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니 참으로 좋습니다. 

신약의 에베소 6장 2절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볼 것이 있습니다. 이 두 말씀에 공히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공경이라는 단어입니다.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카베드’라고 하는데 무게를 가지고 본다는 것입니다. 존경을 하되 무게를 가지고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섬기고 모시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가지고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요압과 베드로의 차이가 ‘공경’이라는 말입니다. 요압은 그렇게 충성하고 귀한 일을 많이 했지만 공경이 없었고, 베드로는 실수도 하고 천방지축 같았지만 공경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섭섭해 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 공경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무게를 가지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다해서 공경하십시오. 먼저는 하늘의 하나님을 공경하십시오. 한 번 공경해보십시오. 하나님 약속은 절대로 빈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부모님을,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사람들은 이웃 어른들을 공경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수하고 건강하고 모든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한 진짜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공경하면, 내가 부모님을 정말로 공경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어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천금보다 만금보다도 더 행복한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모님을 공경하면 너무 너무 좋습니다. 내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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