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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벧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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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벧전 2:1-7)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유은성전도사님이 작사하고 작곡하고 직접 부른 CCM인데, 감동적인 가사와 호소력이 강력한 노래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알아 그 뜻대로 신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아버지 하나님이 간절한 소원이 나와 있습니다.  

3절 말씀에서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4절 말씀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절의 말씀은 1-2절의 기도하라는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것이 기도요, 하나 더 있습니다.   복음 전파입니다.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딤전2:1-7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 목회서신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목회서신(牧會書信)이란 편지에 담긴 내용을 생각하여 분류한 것으로, 이 서신의 주된 내용이 바울의 동역자요, 여러 지역교회를 돌아보는 목회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서신은 교역자가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고 세워가는 데 필요한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7-1274)가 쓴 글 가운데, “이 세 편지는 그 내용이 다 교회를 목양하는데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세 편지는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목회자에게 있어 결코 두 번째 관심으로 둘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첫째로 권하노니”라고 하시는 것은 시간적인 우선보다는 중요성에 있어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란 말은 문자적인 의미도 있지만,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나, 내 가족, 내 나라, 내 민족 언제나 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를 초월하라고 말씀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요리문답 98문에 “기도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기도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입니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개인기도”라는 책을 쓰신 c. s 루이스는 “하나님과 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른 두 사람이 맺는 어떤 관계보다 더욱 사적이고 친밀하다는 점은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네.”라고 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친밀하게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변화입니다.   루이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친한 친구와 대화하면서 정작 마음은 딴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친구에게 못할 짓 아닌가.  게다가 그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를 알아차리게 될 걸세”라고 말합니다.  

안토니 블룸은 “기도의 체험”이란 책에서 “우리는 그 분께 무엇을 받기를 원하지, 그 분 자신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에 대하여, 우리의 잘못된 관점을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안토니도 친구 관계를 가지고 기도를 가르치고 있는데, 친구에게 무엇인가를 받을 것만 생각하고, 정작 친구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그 친구와의 우정을 참된 우정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친구를 사귐에 있어 그 친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 친구를 사귀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될까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귐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 기도의 열정이 우리의 일에 대한 애착에서 나온 것이라면, 필요한 것만 채워지면 하나님께 별 관심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의 기도가 나오는데 간구, 기도, 도고, 감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각기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단순한 동의어로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도에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다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구(테에시스)는 원하다, 탄원하다, 간청하다는 말입니다.  긴박한 상황에서의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의 기도입니다. 

기도(프로슈케)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아뢸 수 있는 기도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말합니다. 

도고(엔튝시스)라고 하는데, 의논하다, 청원하다, 탄원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중보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다른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서를 내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기도, 일반적인 기도가 자기를 위한 기도라고 하면 도고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감사(유카리스티아)는 또 하나의 기도입니다.  아무리 기도에 열심을 내어도 감사가 빠진 기도라고 하면 원망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기도의 시작이요, 마침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 네 가지의 기도가 기도할 때마다 다 포함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기도하다보면 간구하게 되고, 도고의 기도로 발전하고 감사의 기도로 더욱 성숙한 기도에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2절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2절에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함이라”(딤전2:2)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건생활,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단정하다는 말은 품위 있다는 말인데, 사람답게 살고 조용하고 평안하게 살려고 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은 바쁘고, 국무총리는 공석이고, 외무부장관도 공석이니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G20 정상회담을 앞에 두고, 유엔 총회 개회에 맞추어 반기문사무총장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제목은 “반기문 탄식”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으면 바람직했다고 생각하지만 국내 사정으로 바쁘시니 국무총리라도 오셨으면 했는데 총리가 공석이고, 외교장관도 문제가 생겨 사퇴하셔서 공석이고, 그래서 장관 대행이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관 대행 정도가 유엔에 오면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국가의 최고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이은 속사도 시대의 터튤리안이란 교부는 로마의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의 장수와 안정된 통치와 가정과 충실한 신하와 의로운 백성과 그리고 평화스런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의 적도 아닙니다.  우리가 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다 기도해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거장 E.M 바운즈는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그의 책에서 “남는 시간에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경건을 죽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한꺼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죽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경건의 심장을 찔러 경건을 더 확실하게 죽이는 수단은 단검이 아니라, 태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시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 경건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 않으면 바쁜 하루 중에 기도할 틈을 낼 수가 없습니다.  

바쁜 주부에게 기도할 시간을 어떻게 낼 수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 나가는 사람이, 시간이 없다는 것을 핑계일 뿐입니다.  “매일 아침 나는 식구들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만인구원설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을 말씀하는 구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민족도 집단적으로 빠지거나 누락되지 않고, 전 세계 모든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복음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증거하셨습니다.  에스겔33:11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소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벧후3:9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모든 사람이 영원한 진리 곧 예수님의 죽으심의 비밀을 알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 구원과 복음전도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고,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은 아들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5-7)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하나님의 오직 한 마음이 있다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의 세 번째는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스승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불꽃 없는 불이 없고, 선교 없는 교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전도공포증에 걸려 있습니다.  전도는 무조건 어렵다고 하는데, 이런 때일수록 전략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렵다고 하면 어려운 것이요,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수 있습니다.  하자고 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구호제창이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입니다.  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 평생 한 영혼 구원하고 말리라”  “전도라는 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서초교회를 개척하신 김석년 목사님을 보면 그는 전략적으로 동리의 탁구장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장, 코치, 그리고 회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식사도 하고, 교회가 대회도 개최해주고 상품도 제공하면서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태신자를 품어야 합니다.  예비신자의 작정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전도할 수 있는 대상자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전도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모르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예비신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 예비신자로 써보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관심을 가지고 그를 만나고 권면하겠다는 것이지, 그를 꼭 우리 교회에, 새생명축제날에 반드시 데려온다는 것이 아니라, 전도대상자로 이름을 넣어보는 것입니다.  이름을 쓰는 것으로 한 생명은 돌아오고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초청이 거부되었다고 하여도 관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1940년 7월 ‘리투아니아 공화국’에 주둔하고 있던 ‘스케아라 치우너’란 일본인 총영사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일본 영사관 앞에 나치의 핍박을 피해서 폴란드로부터 망명해 온 유대인들이 카브리해로 가려고 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접수하고 총영사는 일본 정부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일본을 통과할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본 정부로부터 온 대답은 거절이었습니다.  

총영사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다시 한 번 본국에 전문을 보내어 사정을 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두면 나치에 의해서 학살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날아온 답신은 역시 안 된다는 회신이었습니다.   스케아라 치우너 총영사는 이 문제를 갖고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미신을 믿었지만 얼마 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신앙양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냥 있을 수 없다는 신앙양심의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40대의 장래가 촉망되는 외교관이었지만, 나라의 명령을 어기고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29일 동안 그 일에 전념을 해서 6천명의 비자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 많은 유대인들이 그 비자 덕분에 러시아를 거쳐서 일본을 통과하고 카리브해로 나가 자유를 얻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본국으로 소환되어 외교관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그는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에 항상 감격하면서 살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1985년, 이스라엘 정부는 스케아라 치우너에게 최고의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과 값을 지불하더라도 한 영혼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신앙양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분신인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신앙양심이 살아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 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보답하는 교회, 영력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신앙양심을 회복함으로 우리교회가 부흥하고, 수많은 사람이 천국 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은 잃은 영혼을 찾으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잃은 영혼에 관심이 있습니다.  집을 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게 돌아와 살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한 가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인 교훈의 말씀을 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이야기 하셨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한 영혼, 한 사람을 살리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 간절히 요청하시는 영혼구원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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