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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사하는 사람들 (롬 12:1, 레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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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하는 사람들 (롬 12:1, 레 9:1-7)


I. 고향가는 마음

조그만한 회사를 경영하던 한 가장이 부도를 내게 되었습니다. 몹시도 걱정하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우리가족은 뿔뿔이 떨어져 있어야겠다.” 걱정스런 말투로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우리는 어디로 가요?” “너희들은 잠시 외갓집에 가서 살아라.” “여보 나는 어떻게 해요?” “당신은 친정에 가 있으시구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시게요?” “나야 처가댁에 가 있으면 되지요.”

우리 하나님. 이 가장의 처가댁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힘들 때 갈 수 있는 곳, 외로울 때 갈 수 있는 곳. 그 영혼의 고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추석명절입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아갑니다. 고향길이 아니고 고생길인데도 말이에요. 더구나 고향에 어머님이라도 계시고 친구들이라도 있으면 그립고 그리운 것이 고향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을 기억하시지요.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 그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향의 품에서 자랐고 거기서 우리는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저들의 고향이었습니다. 우리네 명절은 서울에 살다가도 명절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는데, 저들은 시골에 살다가 명절이 되면 모든 가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저들은 성전을 어머니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은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천국 고향 떠난 하늘백성들은 천국의 지점인 교회가 우리 영혼의 고향이 됩니다.  여기 영혼의 고향,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여기서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된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내려가서 이번에 어머니에게 용돈이나 두둑이 받아와야지 하고 고향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선물 보따리 준비해 어머님을 뵈러갑니다. 주일예배 와서 어떤 이익이나 챙겨볼까하고 교회에 나온다면 아직까지 어린아이지요. 주일예배 통해 축복받고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문제해결받고 이것이 예배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너스일 수는 있겠지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얼굴을 뵈옵고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과 더불어 사는 행복!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저희 가족은 명절이 되면 우리집으로 모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우리 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없는 곳은 고향이 아닙니다. 오늘 아이들의 불행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향을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예배를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 버립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몇 주일만 한 번 빠져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시니 안계시니 마지막까지 가버립니다. 정서가 불안해 집니다. 이웃과 불화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탐욕에 빠집니다. 실수가 많아지고 자주 시험에 빠집니다. 많은 문제와 사연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목장에 가서 할 말이 없어집니다. 또 문제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예배를 잃어버린 사람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예배에 은혜가 되어야 만사가 은혜가 되는 것이고 예배에 승리자가 되어야 세상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II. 몸으로 산 제사

명절날 부모님 찾아 뵈면, 어머니는 내 얼굴을 살핍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다가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구나. 전화한통 없더니 객지생활에 마음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서울에 가 있는 아들 딸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들딸은 오지 않고 편지가 한 장 도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있으니 갈비짝이 하나 배달됩니다. 편지의 내용인즉, “어머니! 설날 이 갈비로 갈비찜, 갈비구이, 갈비튀김 해 잡수시고 편안히 명절 보내십시오. 저는 선약이 있어서 어머니를 뵈러 가지 못합니다. 선약인 즉슨 아이들하고 백운산에 등반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 갈비 구이 드시면서 행복하실까요? 내 부모님은 내 얼굴 보기를 원하십니다. 내 몸뚱아리 보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내 몸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가장 놀라운 변화가 하나 일어납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 된 것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냐? 솔로몬 성전도 추하고 작고 더러워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가 없어 성전을 무너뜨린 하나님께서 냄새나고 추한 내 몸 안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 더 큰 기쁨, 더 큰 거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배는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만으로는 예배가 안됩니다. 마음 있으면 몸도 가는 거예요. 몸이 오지 않으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몸이 가야 마음도 가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 여러번 마음으로는 선교사가 되신 분도 계실 겁니다.  예배당 몇채 지었다 무너뜨린분도 계실거구요. 교회 봉사, 성가대 열번도 더 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마음으로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몸으로 해야 됩니다. “여보, 내가 오늘은 바빠서 못 가겠소. 당신 혼자가서 내 대신 예배 잘 드리고 오시오.”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얼굴, 우리 몸을 원하십니다.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살아 있는 예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은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없어야 합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최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건강할 때 방탕하다가 병든 몸 가지고 주님앞에 나오셨습니까? 잘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쉽고 슬픈일이지요. 건강할 때 와야지요. 

잘나갈 때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실패한 다음에 오셨습니까? 물론 주님앞에 와야 합니다. 그러나 후회스러운 일이지요. 
젊어서는 내 맘대로 살다가 늙은 다음에 오셨습니까? 물론 잘한 일 입니다. 그러나 좀더 빨리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최고의 제물이 되는 겁니다. 최상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겁니다. 

1. 우리 몸이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앞에 죽어지고 순종된 제물말입니다. 

2. 우리 입술이 제물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뜻입니다. 예배시간 마다 힘껏 찬송하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복음 전하는 입술 제물이 되십시오. 상처받은 심령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입술이 제물이 되십시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3. 내 손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 손 잡아주고 넘어진 사람 일으켜 세우고 추위에 떨며 안내하고 예배당 쓸고 닦고 봉사하는 손 제물이 되십시오.  

4. 내 발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 발바닥 닿는 곳마다 복음이 떨어지고 산 넘고 물 건너 복음 전하는 발 제물 되십시오. 

5. 내 귀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도서의 지혜자는 5장 1절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 들어야 죽었던 심령이 살아나고 말씀 들어야 잃었던 능력이 회복되고 말씀 들어야 버렸던 사명을 되찾게 됩니다. 내 귀가 말씀 잘 듣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몸이 주님앞에 나아와 주님의 얼굴을 뵙는 것 그게 예배의 시작이요, 예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배는 삶의 뿌리가 됩니다. 뿌리가 병들면 나무가 죽고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튼튼해집니다. 예배, 즉 제사의 신앙에 은혜가 되어야 살림살이가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에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내가 살아가는 삶이 뜨거워집니다. 예배에 기쁨이 있어야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성공자라야 삶에 성공자가 됩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칫 메너리즘 즉, 타성에 빠지게 되고 타성은 우리의 영을 무디게 만들고 맙니다. 무디어진 영은 녹슨 칼과 같아서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배에 은혜가 안되고, 찬송과 말씀과 기도에 은혜가 안되어 재미가 안 붙습니다. 마침내 믿는 자의 삶은 답답하고 컬컬하여 시험이 계속됩니다. 사랑스럽던 사람이 미워집니다. 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식어집니다. 목장가족에 대한 애정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인생에서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 예배에서 승리해야 하고 삶에 감격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예배가 감격스러워야 됩니다. 

III. 속죄의 제사(Sin-offering)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구약의 역사는 제사의 역사였습니다. 제사에 실패한 가인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고 제사에 성공한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이 되었습니다. 아벨은 제사에 성공하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오늘 예배의 그림자가 됩니다. 제사의 책 레위기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하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교회가는 첫 번째 이유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째 목적은 죄사함의 제사, 「속죄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유대 지파든 레위지파든 백성이나 임금이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양을 몰고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제사장이 그 양 위에다 범죄한 그 사람의 손과 함께 양 머리에 손을 얹어 죄를 양에게 옮기는 의식을 행합니다. 

(설명 - 안식일 범, 부모 거역, 형제간 불화, 우상, 처음 것 도적, 음란, 하나님의 영광, 사악한 오락으로 가산탕진, 방황) 

범죄한 자와 제사장은 그 양 죽입니다. 양은 마침내 메~메~ 소리를 지르며 사지를 벌벌 떨면서 피를 퐁퐁 쏟게 됩니다. 양의 죽음을 봅니다. 왜요?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의 댓가로 한 생명이 죽는 죽음을 맛봅니다. 그 양이 쏟은 피를 제사장이 엄지에 찍어서 성전회막에 일곱 번을 뿌립니다. 피의 일부분은 제단 뿔에 뿌린 후 남은 것을 제단 앞에 붓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죄의 사유함을 받기 위하여 피 앞에, 피 위에, 피 둘레에서 자기 죄의 댓가인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양의 껍질이나 오물은 지옥을 의미하는 Gehenna에서 불을 질러 없애버립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나의 죄가 불타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충 속죄제사의 순서입니다. 

(Adaption)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내 죄가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을지라도 용서해 주시마 약속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 앞에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죄요, 가장 기뻐하는 것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총칼도, 원자탄도, 사람도 환경도 아니요 하늘도 땅도 아니요 바로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예배를 진행하는 모든 순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내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죄를 씻어내는 것이 예배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예배순서와 죄 발견)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내 죄를 발견하는 현미경이 되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내 피속에, 내 뼈속에 내 오장육부에 숨어 있는 죄를 발견하는 X Rey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감추어져 있던 죄가 이 자리에 와서만은 덮을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여지없이 노출되는 것 -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 전체를 검사하는 검사관입니다. 찬송은 자기의 죄를 확증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시설이 부족해도 좋습니다. 경제력이 없어도 좋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 안모여도 좋습니다. 아무튼 이 동리에서 상처받고 찢겨진 영혼들이 몰려와 치유함 받고 세상 살다가 죄 짓고 실패한 영혼들이 주의 피로 새롭게 되어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감격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제사를 위해서는 예물이 필요합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나에게 예물을 요구하실까요? 이는 대그룹 회장이 나한테 커피값 빌려달라시는 격이요 임금이 노숙자 거지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는 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요구하심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함이요 사르밧 과부에게 떡 한 덩이를 부탁한 엘리야는 평생 먹을 양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예배에 필요한 예물이 무엇입니까? 레위기에서 흠없는 수컷을 원하십니다. 흠없는 수컷이 무엇입니까? 벧전 1:19에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제물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속죄를 위해 요구하시는 제물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보혈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이적과 기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는 것입니다.

♪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IV. 번제의 제사(burnt - offering)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찾는 두 번째 이유는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번제는 이미 말씀드린 속죄의 제사와 비슷합니다. 한가지 다른 점은 양의 사지를 각으로 뜹니다. 앞다리, 뒷다리, 머리, 가슴, 배, 꼬리 등 샅샅이 사지를 조각조각 다 찢어서 마침내 번제단위에 기름과 함께 불로 태워 버립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리는 제사라고 하여 온전제사, 불로 태우는 제사라고 하여 화제라고 이름합니다. 

Adaption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은혜를 받으러 오는 예배와 함께 받은 은혜 때문에 감사함으로 바치러 오는 예배가 번제의 제사입니다. 

“내가 죽을 것을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내가 흘릴 피를 예수님께서 대신 흘려주셨습니다. 이제 감사와 감격으로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가 번제 예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속죄 제사의 경험이 없이 번제의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의 제사가 선행되지 않은 번제는 받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속죄함 받은 감격이 없는 감사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뜨거운 감사의 예배가 없이, 교회 직분을 받고, 제직이 되고, 몸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시간을 바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속죄가 없는 번제의 제사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제사의 순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깊은 은혜에 빠져 있던 만년에 디모데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주가 오심은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도다. 나는 그 중에 괴수로다.”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맞아, 바울은 죄인의 괴수야. 그는 어질고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람이니까 죄인의 괴수라고 그랬겠지.” 여러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남들이 받지 못한 거룩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자기 죄를 볼 수 있는 영안을 받았습니다. 작은 죄를 크게 볼 수 있는 현미경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은혜가 깊어질수록, 신앙이 높아질수록, 축복을 독차지 할수록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임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6일동안 땀흘려 일하고 세상 사람들이 두다리 뻗고 잠자고 쉬는 주일날 이른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몸바쳐 충성하는 것이 번제제사입니다.

아버지의 거룩한 은총에 감사해서 시간을 바치고, 재산을 바치고, 성가대에서 음성을 바치고, 내가 배운 작은 지식 - 어린 생명들을 가르치는데 바치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내 몸까지라도 바치는 것 - 이것이 바로 번제의 제사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번제를 말하자면 아무래도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번제를 들 수 있습니다. 백세에 얻은 외아들인데 번제의 제사로 바치라니 아마 아브라함이 보통사람 같았더라면 그 칼로 자기 가슴을 찌르고 이삭을 도망이라도 치게 했을 겝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백세에 고목나무 같은 내가 얻을만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바치라 하시니 감사로 바쳐야지” 모리야 언덕에서 그의 아들을 바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잔인하게 그 아들을 죽였나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의 아들 이삭에 칼을 대지 마라. 그 아들 이삭을 내가 이미 받았다. 아브라함아 내가 준 은혜의 선물인데 네 아들이 되어 버렸구나. 나에 대한 사랑을 네 아들 이삭에게 다 빼앗겼구나. 네 아들이 아니라 내 것임을 가르치려고 바치라 했노라. 네가 그 아들을 바쳤으므로 이제 네 것이 아니라 다시 내 것으로 이삭을 너에게 주노라. 이제야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노라. 더불어 네 자손을 하늘의 뭍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창대케 하리라” 할렐루야!

즉 예배는 나 자신을 포함한 나의 전 소유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표시입니다. 나의 궁극적 소속감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신앙고백이 번제예배입니다. 

V. 화목제사(Peace - offering)

다음은 동물제사의 3대 제사 중 마지막 제사 화목제사입니다. 속죄의 제사에 성공한 자가 번제를 드리고 번제의 제사를 드린 자가 그 다음 드리게 되는 제사가 화목제사입니다. 

<화목제사의 특징>

화목제사는 색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화목제사를 드릴 때 먼저 피로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속의 내장과 기름은 다 거두어 가지고 제단 앞에서 불을 붙입니다. 하나님 앞에 향기되어 성도의 기도를 싣고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재물을 나눠 먹습니다. 먼저 양의 오른 쪽 다리는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몫이 됩니다. 

가슴 부분은 레위 지파가 그리고 남은 왼쪽 앞다리, 목 등의 많은 부분은 제사를 드린 자신의 식량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곧 화목제사의 특징입니다. 이 식사는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눠 먹는 양식입니다. 

(Adaption)

바른 예배를 드린 사람은 이웃에게도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영광과 기쁨을 돌리게 되고, 내 가족, 내 친구, 내 목장, 내 이웃 등 나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에게도 내가 받은 은혜와 똑같은 유익과 덕을 끼치게 되는 것이 곧 화목제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내가 은혜가 될 때 내 가족과 남에게 은혜가 되고, 내게 기쁨이 될 때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되며, 내 삶이 풍성해 질 때 내 이웃의 생명이 풍성해 지는 법이지요.

VI. 소제 - 곡식제사  

네 번째 제사는 소제입니다.  곡식제사입니다.  새벽부터 우리 사랑으로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봄에 씨를 뿌립니다.  곡식이 자랍니다.  열매 맺고 나면 짜릅니다.  방앗간에가 껍질을 벗깁니다.  그리고 빻습니다.  고운가루를 만듭니다.  거기에 감람유를 칩니다.  소금을 넣습니다.  향유를 넣습니다.  벌레들이 끼면 안되니까 꿀을 넣으면 안됩니다.  부풀려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어도 안됩니다.   

하나님앞에 예배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짤려지는 것입니다.  시간남아서 주님앞에 예배하는 것 아니지요.  세상에 많고 많은 일들이 있지만 다 짜르고 먼저 하나님, 예배 우선, 이것 없으면 예배가 하나님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피가 있는 시간, 희생이 있는 제물, 하나님께서는 그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식적인 것 껍데기를 다 벗겨야 됩니다. 말씀의 방망이로 부서져야 합니다.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고운 가루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압착해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감람유, 향기, 변하지 않는 소금같은 마음, 그리고는 뜨거운 불에 굽는 겁니다. 성령의 불로 떡을 구워 주님앞에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소제입니다. 이게 제사신앙이요, 예배정신입니다. 

1. 예배는 준비된 마음과 준비된 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토요일부터 목욕하고 토요일부터 예물 준비하고 토요일부터 마음가짐을 단정히하고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2. 여러분 부득이하게 주일예배 시간에 가끔 늦을 수 있습니다. 어쩔수 없이 늦을 때가 있어요. 늦고 싶지 않는데... 그러나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것. 병든 겁니다. 재물에 흠이 없어야 하듯이 시간에 흠을 내면 안됩니다. 지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대통령을 만나는데 지각해서 청와대 입구라도 갈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우주에 왕되신 왕!  만왕의 왕!  우리 하나님이 일개 대통령 하나만 못하시겠습니까?  

3. 여행갔다가도 주말이면 돌아오는 겁니다. 예배시간 정성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토요일날 늦게까지 텔레비젼 보고 피고한 몸으로 주일날 오는 것 그거 하나님앞에 바람직스럽지 않는 것입니다.  권투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 링위에 오르듯이 자기 영적인 상태를, 자기몸의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준비하여 주일날 예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4. 그리고 나와서 찬송가 가사는 신앙고백이요 기도입니다. 그대로 될줄로 믿고 힘차게 부르는 겁니다. 이게 소제제사입니다. 

VII. 신앙의 중심 : 예배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부흥이 있다면 예배부흥이 있을 뿐입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신앙인의 삶은 물론 기독교가 타락합니다. 이는 마치 뿌리가 썩으면 나무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뿌리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적 기사를 보기 위해 예배드리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이 있다면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속죄함 받았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중심엔 예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던 광야 행군도는 인생의 모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광야길을 걸어 갈때에 언약궤가 백성들 가운데 갑니다. 백성들은 언약궤에 앞장 서 갑니다. 뒤에서 따라 갑니다. 앞에 가며 내 뒤에 언약궤가 있다. 뒤에서 따라오며 내 앞에 언약궤가 있다. 우리 가운데 언약궤가 있다. 이게 인생이다. 나의 등뒤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다. 내 앞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어디로 가든지 인도해 주신다. 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가 각각 포진하고 쉬었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법궤가 있다. 언약궤가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11시에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장 일하기 좋은 시간 하나님앞에 바칩니다. 그리고 저녁 7시에 저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온 가족이 저녁식사 마치고 쉬는 시간입니다. 가장 귀한 알맹이, 계란의 노른자위 같은 시간을 하나님앞에 바친겁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 가장 기뻐하는 시간, 가장 기뻐하는 몸이 어떤 것인가? 깊이 생각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중심을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내 삶의 중심이 예배가 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성도들을 보면 선교중심의 신앙도 있고 구제 중심의 신앙도 있습니다. 영성 중심의 신앙도 있고 봉사 중심, 사역 중심의 신앙도 있고 양육 받길 좋아하는 교육 중심의 신앙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가장 중심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장중심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 다음에 목장이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신앙은 제사신앙, 예배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 최우선순위는 예배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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