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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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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18)


프랑스에 퐁데자르(Pont des Arts) 다리가 있습니다. 놓인 지 200여년도 훨씬 넘은 이 다리의 이름은 '예술의 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프랑스 학술원과 루브르 박물관을 이어주는 다리인데 보행자 전용 인도교로 바닥은 널빤지로 깔려 있어 운치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다리 위에서 온갖 사랑의 향연들이 은밀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들, 포옹하는 연인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 자신이 그린 작품을 판매하는 화가들,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 마드모아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외로운 초로(草露)의 노인들, 그들의 모습들이 이 예술의 다리를 이름처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리 좌우에 설치해 놓은 철망이 흥미롭습니다. 그 곳에는 수많은 종류의 자물통들이 철망에 굳게 잠겨져 있고 자물통 표면에 여러 가지 사연을 새겨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해 영원히" 라는 연인들의 저마다의 사랑의 사연들을 담고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던 무수한 사랑 이야기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그 애절한 사랑의 약속을 자물통에 새겨 다리 난간의 철망에 꼭 잠가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누가 모방했는지는 몰라도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 승부역(간이역)에도 사랑의 자물통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약속이 지켜지길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겠다는 자물통 사랑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생명과 계약을 맺는 일이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랑은 못됩니다. 완전한 사랑은 진실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낼 뿐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어머니와 이별한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그 사랑은 저의 영원한 교과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프랑스의 초등학교 아이들의 절반이 좀 안되는 수가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중인 가족이라는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사랑이란 잠가놓고 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여 반감에 이르렀을 때에는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한 발자크의 말은 이 땅에서 주고받는 사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진정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눅 2:10).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이 땅의 모든 인생들에게 예수는 저들의 생애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새 생명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건은 마침내 그의 이야기(his story), 바로 역사(history)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마침내 역사의 중심이 되었고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모든 세계역사는 예수를 중심하고 주전(B.C.), 주후(A.D.)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주전(B.C.) 불신앙의 삶이 있고, 주후(A.D.) 곧 신앙의 삶이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를 중심하고 인간 개인의 역사와 인류역사가 갈라지는 분기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떠나서는 역사를 만들거나, 역사를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구속사이고 구속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Ⅰ.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본문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의미하는 코스모스( )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전 인류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씀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스톨게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애정, 동족 간에 혈통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스톨게 사랑은 육으로 난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야 되는 사랑입니다. 스톨게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스톨게 사랑 가지고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눅 14:25-27). 스톨게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오해하였습니다(마 20:20-22). 하나님의 사랑은 필레오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즉, 우정관계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주권적인 행사를 하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8).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통한 사랑입니다(창 3:15, 21). 

Ⅱ.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본문 3장 16절에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외아들입니다. 외아들이란 말은 수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한 아들(a son of God)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그 아들(The son of God)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그 성부, 그 성자, 그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할 때, 각 위 앞에 정관사가 붙은 것을 보면 이름은 단수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엘로힘』( )이라고 할 때도 하나님은 복수인데 일하는 이는 단수입니다. 『창조하시니라』고 하므로 한 사람이 하는 것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개념으로 부모로부터의 출생 개념의 아들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성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빌 2:6). 독생자는 오직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요 1:18).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삼위의 개념은 인간의 피조 세계의 그 무엇에도 비유될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삼위 하나님을 각각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여 대문자 [God]을 사용했습니다. 삼분의 일의 god이 아닙니다. 삼분의 일(moment)도 아닙니다. 삼분의 일의 모양(modus)도 아닙니다. 이 삼위 하나님은 모두 인격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히 절대적으로 일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성부에게 의존하며 보내심을 입은 자이면서도 성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질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본체시며 그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지 먼저 지음 받은 자가 아닙니다(골 1:15). 먼저 지음 받은 것과 먼저 나신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이요 만물이 그에게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도 과거 미완료이므로 태초 이전부터 계속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생 시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요일 4:2).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욥 38:7). 그러나 독생 성자는 천사보다 뛰어나시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그의 부활로 입증되었습니다(롬 1:4). 그는 창세전에 계신 영원한 아들입니다(요 17:4, 24; 히 1:5; 5:5).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요 5:24). 아들 외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합니다(요 5:23).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가 주어졌고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그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요 5:21-2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성육신하신 것입니다(빌 2:6).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하신 것은 영원한 진리임을 보여주는 현재형입니다.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속사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나타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출 33:20-21). 그래서 그의 말씀과 능력의 손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원 계시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 바로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때 독생자를 십자가에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갈보리 십자가로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죄 있는 자처럼 넘겨주셨다는 말입니다. 피로 값 주고 자기 백성들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의 목적은 믿는 자의 구원에 있습니다. 심판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에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살릴 자를 살리고 나면 죽을 자만이 남는 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그 어떠한 중립적인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흑백논리만이 영원합니다. 

Ⅲ.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본문 3장 16절에 『…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이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여기 멸망은 첫째, to be lost 잃다, 상실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to perish, be destroyed 없어지다, 파괴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멸망은 구원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존속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셋째는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기독지혜사 강병도 요한복음 주석). 
여기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즉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로 시작해서 ② 요셉의 채색 옷(창 37:3) ③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사 52:1) ④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3-4) ⑥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⑦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⑧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⑨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엡 6:13) ⑩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⑪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계 3:4-5) ⑫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⑬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계 4:4) ⑭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⑮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계 19:8) ?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계 19:13)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계 19:14)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서사(敍事,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므로, 그 사랑은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을 이처럼]이라고 하므로, 죄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독생자]라고 하므로, 유일한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하므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하므로,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므로, 영생을 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8, 16). 그 사랑은 선수적인 사랑입니다(요일 4:10).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요 3:16). 그 사랑은 불변적인 사랑입니다(요 13:1; 롬 8:35). 그 사랑은 필연적인 사랑입니다(롬 11:36). 그 사랑은 최우선적인 사랑입니다(롬 5:8). 그 사랑은 목적 있는 사랑입니다(요일 4:9). 그 사랑은 타율주의 시랑입니다(요일 4:14). 그 사랑은 한 편 구석에서 된 일이 아니라 구름같이 둘러싼 수다한 증인들 앞과 오고 오는 세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유산으로 점철(點綴 하나하나를 서로 이어 맺음) 되어 온 공개적인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스테판 M. 폴란이 지은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자는 얼마를 벌 것인가 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라'였습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인생을 뒤바꾼 재테크의 바이블'이라는 홍보 문구답게 재테크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독자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죽어라'는 것보다 '다 쓰고'라는 말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뉘앙스입니다. 이 책에서는 항상 스스로가 스스로의 고용주인 것 같은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생계 수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그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실천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처음과 마지막이요, 교훈과 실천이요, 심음과 거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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