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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닻 (히 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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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닻 (히 6:13-20)


지난 여름 진도 주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명량대첩 유적지였습니다. 이미 역사공부를 통해서 명량대첩에 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 현장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명량해전은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전함을 물리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첩이었습니다. 현지에서 보니 그토록 놀라운 전과를 세우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명량 즉 울돌목은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물길입니다. 폭이 500미터가 채 안되고, 그 길이도 1키로 정도 남짓 밖에 안되었습니다. 밀물 때는 동쪽인 남해 방향에서 조류가 밀려들어 서쪽인 서해 방향으로 빠르게 흐릅니다. 그러다 썰물 때는 반대로 서해 방향에서 조류가 밀려들어 동쪽인 남해 방향으로 빠르게 흐릅니다. 

133척으로 공격해 온 일본수군은 13척 밖에 없는 조선수군을 보고는 자만했습니다. 이제 자기들이 공격해 들어가면 다 도망칠 것이라 생각하고, 그저 수적인 힘만 믿고 울돌목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13척의 배를 1자진으로 포진했습니다. 워낙 물길이 좁다보니 13척 만해도 그 물길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배가 아무리 많아도 물길이 좁아서 전면에 십 여척 이상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13척의 배가 닻을 내리고 기다리며 빠른 물살의 요동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배는 물살을 이용한다고 닻을 내리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습니다.

이 작전이 주효했습니다. 빠른 물살에 일본 배들은 흔들리며 제대로 포를 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밀물에서 썰물로 물길이 바뀌면서 일본 배들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배들끼리 부딪치기도 했고, 조류가 바뀌며 울돌목이 요동치자 파선하는 배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조선 배들은 닻을 내리고 노를 저으며 물살 변화에 안정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포 공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불과 13척 조선수군이 133척의 일본수군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명량대첩의 승리 요인 가운데 하나가 조선 배들이 닻을 내리고 거센 조류변화에 잘 대처했다는 점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됐습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복판에서 거센 조류에도 전함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닻은 배가 항해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기구입니다. 닻은 “배를 한곳에 멈추어 있게 하기 위하여 줄에 매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갈고리가 달린 기구”를 말합니다. 이 갈고리가 바다 밑 흙바닥에 박히어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배는 항구에 장기간 정박할 때 닻을 내려둡니다. 그 뿐 아니라 흐르는 물살 속에 배를 고정시키려고 할 때, 조난 시 배가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게 하려고 할 때 닻을 내려둡니다. 그래서 닻은 배를 바다 위에서 안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흔히 인생을 항해로 비유합니다. 태어나 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인생길이 마치 배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배가 항해 도중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갈 때가 있듯이, 인생길이 평탄하여 매사가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가 항해 도중 게센 풍랑을 만나 침몰 위기를 겪거나 암초를 만나 좌초 위기를 겪을 때가 있듯이, 인생길에 위기를 만나 큰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닻이 중요합니다.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닻을 내려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암초에 걸려 배가 요동칠 때 닻을 내려 배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위기를 맞았을 때 인생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특히 요동치는 영혼을 안정시키기 위해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위기 가운데서도 안정을 찾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닻이 없다면 상황은 심각합니다. 배가 요동치는 풍랑 가운데 끊임없이 흔들리게 됩니다. 암초에 부딪히고 물살에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침몰하고 좌초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위기를 맞았을 때 인생의 닻, 영혼의 닻이 없으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위기 가운데서 그 영혼이 끝없이 흔들리게 됩니다. 두려움, 불안, 그리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닻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닻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길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난다고 해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영혼의 닻은 무엇인가?

본문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우리 인생길에 영혼의 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닻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영혼의 닻을 가지고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온 사람의 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이민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이민을 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다 걸고 이민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야기의 출발점인 창 11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창 11:30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아브라함 나이 75세가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과감하게 고향을 떠난 우선적 배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인간적 배경이 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절망입니다.

고대 시대에 자식은 가장과 가문의 미래였습니다. 가장과 가문은 자식을 잘 양육하며 기업을 유업으로 물려줍니다. 그리고 그 자식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고, 그 자식에게서 희망을 찾습니다. 그러나 가장과 가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절망 중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자식을 낳을 수 없던 아브라함에게 자식 정도가 아니라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는 큰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희망을 영혼의 닻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땅 갈대아 우르를 뒤로 하고 희망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이 됩니다. 희망은 흔들리던 우리의 심령을 붙들어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은 흔들리던 우리의 인생을 붙잡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주시는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조선일보 [토요인물기행]에 소개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희대 강남세브란스 암센터 소장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암을 치료하는 암전문의이면서 자기가 말기 암으로 투병하는 암환자입니다. 6년 전 대장 절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고, 그후 무려 11번이나 재발을 했고, 이미 간과 골반 뼈에 전이가 되어 의학적으로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매주 2-4건씩 유방암 수술을 집도하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골반으로 전이된 암 때문에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양쪽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는 것 말고는 그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소장은 매주 목요일 저녁 병원 외래에서 암 환자들을 위한 예배시간을 가집니다. 매주 40~50명의 환자들이 모이지만 단순한 종교행사로 그치지 않고, 암 투병에 대한 요령도 알려주고 질문도 받는 강좌성격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투병 요령을 알려주겠다는 뜻에서 자신의 투병기를 그의 이름을 따 '희대의 소망'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이 소장은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갖는 절망 때문에 죽는 거죠. 저는 암에 걸리기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작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됐고, 가족과의 정도 더 깊어졌기 때문이죠." "사실 저도 괴로울 때가 있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죽음의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내가 나아서 행복해지는 꿈을 꾸고 그것을 미리 당겨다 갖다 놓습니다. 미래의 기쁨을 빌려와서 지금 누리는 거죠." "암은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이 바쁘고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면 그 틈을 타서 암 세포는 자랍니다. 항상 즐겁고, 매사를 감사하게 여기세요. 저를 보세요. 암 4기 상태로 6년 동안 일할 거 다하면서 잘 살지 않습니까. 새로운 암 5기죠. 희망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 흔들리던 우리를 굳게 붙잡아 줍니다. 그래서 희망이 우리 영혼의 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을 가지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소망을 인생의 닻, 영혼의 닻으로 내리십시오.

영혼의 닻을 어디에 내릴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영혼의 닻을 어디에 내려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디에서 소망을 찾을 것입니까? 

본문 18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두 가지가 소망의 근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소망을 찾을 곳,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릴 곳이 두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절망 중에서 소망을 찾은 곳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브라함이 오직 절망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니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요 소망의 땅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시 아브라함은 정말 그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자기 나이 이미 75세요, 아내 나이도 65세로 이제 자식을 낳을 소망이 다 끊어진 상황입니다. 당시 앞 선 문명을 자랑하던 갈대아 우르에서도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당시 광야와 같은 땅 가나안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 상황이어서 그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에 영혼의 닻을 내렸던 것입니다.

월터 크롱카이트는 전설적인 미국 CBS의 언론인입니다. 그는 케네디의 암살,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암살, 인류 최초 달 착륙 순간 보도 등으로 대변되는 격동의 시기에 동분서주하며 미국인에게 믿을 수 있는 뉴스를 전했습니다. 특히 베트남전 당시 전쟁의 실상을 숨기고 있던 존슨대통령에 반기를 들며, "이 전쟁은 끝나야 한다."고 외쳐서 반전 운동을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부정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대통령의 말은 못 믿어도 그의 말은 믿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월터 크롱카이트로부터 뉴스 진행자를 앵커(anchor) 즉 ‘닻’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요동치는 여론과 각종 루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생각을 바로잡고 또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앵커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속에서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 참된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절망의 한 복판에서도 그분의 말씀 속에서 참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또 보증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증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증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하여 책임지고 틀림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률적으로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경우에, 채무자를 대신하여 채무를 이행할 것을 부담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을 민법에서는 보증채무라고 부르고, 상법에서는 연대보증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보증은 약속을 보다 더 확고한 신뢰 위에 세우기 위해 상호간에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그 약속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보증까지 더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만에 하나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을 경우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증하셔서 반드시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소천하신 CCC 김준곤 목사님께서 간증을 써놓으신 칼럼을 보았습니다. 사랑방 성경학교 요원훈련을 위해 수 만 달러의 큰 돈이 필요했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그 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신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미국에 아는 친구를 찾아가서 3일을 졸랐는데 허탕이었답니다.

마지막 용기를 내서 붙잡고 도움을 청했더니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더랍니다. 바로 자신의 보증수표와 하나님의 보증수표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보증수표를 달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요일 5:14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는 말씀을 읽어주더랍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지만 하나님의 보증수표로 믿고 기도했답니다. 후에 하나님의 응답으로  필요한 돈을 쓰고 남을 만큼을 주셨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보증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책임지시고 이루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보증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보증에서 우리의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보증에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거센 풍랑을 헤치며 인생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저 요동치는 물결처럼 우리의 심령이 불안합니다. 항해하는 배에게 닻이 필요하듯 우리에게 영혼의 닻, 인생의 닻이 필요합니다. 그 닻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흔들리는 우리의 심령을 붙잡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보증이 그 소망을 굳세게 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보증에 우리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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