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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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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말 1:1-5)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벧전 4:19을 말씀합니다. 
다리에 보조기를 끼워야 되는 어느 불구 소녀가 자기의 상태에 낙심하여 물리치료를 그만 두기를 원했습니다. 어느 날 소녀의 아버지가 계속 치료를 하라고 강요하였더니, 그 소녀는 아버지의 팔에 안기면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이 모습의 저를 사랑하지 않나요?”  
딸의 마음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딸을 껴안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딸아! 너의 모습 이대로 너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이 상태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단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모습대로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죄악과 씨름할 때에도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들을 용납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현재의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죄악과의 싸움을 통해서, 또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성장시켜서 우리들이 좀 더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들에게 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또 우리가 겪는 시험과 고난을 이용하시어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이 진리를 마음에 간직하시면, 자신을 주님께 부탁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계속하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찬양 가운데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이 모습대로 영접하네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의 최상의 좋은 것을 요구하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의 사랑은 우리로 인생의 아픔도 느끼게 하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현재의 상태에 머물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말라기서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라기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말라기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에는 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단어로 등장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 마지막 경고를 주시는 뜻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합니다. 주위의 훼방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학개 선지자의 말씀에 힘입어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훌륭하게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리고는 알기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법도를 613개 조항으로 구분하여 이를 가르치고 실천하면서 하나님께서 속히 메시야를 보내 주시기를 소원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의 왕국이 언제쯤 실현될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성전도 힘을 다해 건축하고 마음을 다해 말씀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면 무언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생활은 좀 나아지는 것 같으나 실상은 여전히 외세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처음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시간의 흐름 속에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대로 산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입니다. 아니 드러내 놓고 말씀에서 벗어나 이방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실이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며 축복하는 제사장부터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때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따라 지금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고라는 말은 회복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경고를 듣고 돌아서면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고 복되게 만들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경고의 말씀대로 모든 재앙이 그들 가운데 임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 고백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런데 백성들은 시큰둥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흔히들 하는 말이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복을 받았습니까? 정말 복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우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부터가 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아셨고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죄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셔서 우리 마음을 감동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영원히 멸망할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 중의 복입니다. 다른 말로는 은혜라고 합니다. 

이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 자체가 내 수고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깐 뿐이고 실제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어떠냐 하면 아직 우리에게 옛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지를 않습니다.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옛날처럼 살아가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익숙지 않기에 기쁨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즉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에서 내가 포기하고 바꿔야 할 부분이 적지 않게 많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마치 시골 노인들이 도시에 오게 되면 처음에는 야 좋다 하는데 며칠이 지나면 아주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집 밖으로 나가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무언가 움직이면서 일을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일단 집을 나서 보지만 시골의 삶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니 집이 다 똑같아서 어느게 우리 집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아파트 이름마저 요상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다 지어놔서 입안에서만 맴맴 하지 그거 발음하기도 쉽지 않네요. 집을 나설 때는 다 알 것 같았는데 막상 다시 돌라오려고 생각하니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이 아파트 이름도 맞는 것 같고 저 아파트 이름도 맞는 것 같고……. 한 번 그 고생하고 나면 다시는 집 밖에도 못 나갑니다. 그러니 어디 사람이 살 수 있습니까? 그래 나 시골로 돌아갈란다 합니다. 

교회에서 느끼게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기를 정말 잘했네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데 말 귀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만 아는 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영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행동의 제약도 많이 받습니다. 그래도 들은풍월은 있어서 교회에 다니면 삼가야 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삼가려고 하니 힘이 들기도 하고 한참 앞서 가는 사람 같은데 그 사람에게서 삼가야 될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들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실망하기도 합니다. 제일 힘든 것은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육신의 삶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과는 한참 거리가 먼 그런 것을 느끼게 될 때입니다. 

꼭 우리가 새 아파트를 샀을 때와 아주 흡사합니다. 처음에는 야 좋다 그래서 잠도 잘 올 것 같고 그런데 며칠 살아보니까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가장 힘든 것은 무리해서 대출도 받고 하다 보니까 대출금 상환에 이자에 매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여유는 더 없어지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돈에 매입니다. 거기다가 이런 저런 부대비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차라리 전에 없이 살 때가 좋았다고요.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좋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어색함도 느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안에서 열심히 함께 어울리려 하고 생활하려고 하는데 불편함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왜 생활에 어려움은 여전한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더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아니 거꾸로 생활이 더 어려워진다거나 마음 상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이 좋았던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 맞나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믿는 사람들은 궁상스럽게 살아야 하나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가니까요 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열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그거 장난이 아닙니다. 좁은 의자에 하루 반나절을 쪼그리고 앉아서 가는 것 생각해 보십시오. 도착을 하니까 참 좋다 야 좋다 감탄도 하고 그게 몸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문제는 말이 안 통한다는 겁니다. 겨우 겨우 몇 마디 떠듬대기는 하는데 마음 놓고 이야기를 못하니 답답합니다. 

지리를 모르니까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들이도 쉽지를 않습니다. 거기다가 낮과 밤이 바뀌어서 낮에는 왜 그리 졸린지 근데 막상 밤이 되면 말똥말똥합니다. 그렇게 한 열흘 이십일을 지나고 나야 조금 적응이 됩니다. 그래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돌아갈래 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응하고 나서 보면 모든 것이 아주 체계적이고 편리합니다. 원칙대로만 살아가면 아무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편리한 것도 많습니다. 나중에 잠시 돌아와 보면 야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았지 그럽니다. 

믿음의 삶도 꼭 그렇습니다. 잠시는 불편한 것도 있고 힘든 것도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건 마음의 평안입니다. 어찌 보면 처음에는 전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자꾸 꼬이고 더 힘들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합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렇게 힘들게만 여겨졌고 실제로 돈에 매이고 쪼들리기도 하고 큰 사고나 병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면서 이젠 어떻게 살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막다른 길 같은데 신기하게도 길이 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것 맞습니까?”가 아니라 “아멘 따르겠습니다. 앞서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순종하십시오. 미국에 가서 “Please, show me the way” 길을 물으면요 “Don't trouble, follow me” 그럽니다. 염려 말고 나만 따라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앞서서 길을 안내합니다. 

그래요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세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선생님이 되어 주시고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가장 큰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를 놓아두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택한 것처럼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을 놓아두고 우리를 택해서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완벽하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것도 많고 문제도 많습니다. 성격적으로도 그렇고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하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아니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러냐고 하기도 합니다. 자기들과는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지금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망한 것 같은데 돌아서서 보면 더 잘 돼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에서가 장자입니다. 모든 권한이 장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하나님께서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고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에서가 장자권을 가볍게 생각하고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하나님께서 야곱뿐만 아니라 장자로서의 에서도 나름대로 장자로서 누릴 복을 주셨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는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에 매이는 자가 아닌 의에 이르게 되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영원한 생명을 얻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빠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그 푸근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시기 바랍니다. 

정말 힘들어 견디기 어려울 때조차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 저는 참으로 힘들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을 믿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해요. 하나님 깨닫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불평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기쁨으로 따릅니다.” 고백하시고 감사하며 나아가십시오. 산을 오른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고 난 다음의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산을 올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낚시꾼이 그 손맛 때문에 또 낚시를 떠나듯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야곱이 무너뜨림을 당해도 나는 다시 쌓겠다고 하며 몸부림을 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을 향해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너희가 순종함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그 날부터 그 순간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지만 불순종할 때는 어땠습니까?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니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먼저 주일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의 물줄기가 우리를 향합니다. 그리고 뚫어진 전대의 구멍을 막아주십니다. 전에는 잘 나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나도 모르는 사시에 솔솔 새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새나가는 구멍을 하나님이 다 막아 주십니다. 그래 부족한 것 같은데 점차 여유 있게 바뀝니다. 흩어 구제하는데 더욱 충족하게 됩니다. 

전에는 열을 가지고 써도 모자랐는데 지금은 아홉을 가지고 써도 남게 만드십니다.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합니다. 전에는 무슨 일만 있으면 가슴이 덜컹했는데 이제는 담대합니다. 전에는 염려로 밤을 지새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 이런 문제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면 신기하게도 다 해결이 됩니다. 도무지 길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길이 열립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깨닫습니다. “아하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날마다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기대하십시오. 오늘은 어떤 좋은 것으로 함께 하실지 기대하시며 감사하십시오. 그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선포하시고 축복하십시오. 그럴 때 놀라운 은혜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알든 모르든 우리 안에서 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마음을 둘러싼 전쟁입니다. 사탄이 노리는 첫 번째 표적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고 조정함으로써 우리의 인생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각에 따라 행동과 태도와 자아상이 결정됩니다. 아니, 운명이 생각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립적인 태도로 하루를 시작하지 마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긍정에 마음을 고정하시고 시편 기자처럼 선포하십시오. 

“이 날은 주님이 만드신 날이야. 행복하게 살겠어. 열심히 일해야지. 오늘은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야.”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성공을 생각하십시오. 마치 자석처럼 우리는 생각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끌려갑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기쁜 생각을 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주위에 행복하고 기쁘고 긍정적인 사람이 모여듭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생각을 따라갑니다.
우리의 생각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아니, 우리의 생각은 감정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먼저 행복한 생각을 품지 않으면 절대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절망적인 생각을 품지 않는 한 절대 절망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항상 아멘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예로 순종하시고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선포하십시오. 날마다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앞에 우선순위를 지켜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주시는 복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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