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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림을 소망한 데살로니가교회 (살전 5:1-11)

  • 잡초 잡초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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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을 소망한 데살로니가교회 (살전 5:1-11) 
 
 
❚데살로니가교회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마게도냐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주의 수도이며 로마 총독이 주재하던 중요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테살로니키’라고 불리는 이 항구도시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이어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크고 번화한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같은 대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과 실루아노(줄여서 ‘실라’라고도 부름)의 전도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지난주일 말씀 나눈 것처럼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를 설립한 바울과 실라 일행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은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한  결과 유대인과 경건한 헬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이를 통해 데살로니가교회가 설립되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작당을 해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 일행을 고발하는 바람에 그들은 베뢰아로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늘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합니다. 결국 복음전파와 전도는 마귀 사탄과의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이렇게 부랴부랴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된 바울은 꼭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기 원했지만 뜻대로 안 되어 아들과 같은 제자인 디모데를 대신 보내는데 이 과정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절부터 3장 10절에 걸쳐 나옵니다. 잠시 이 부분을 펴서 함께 살펴봅시다. 2장 17~1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얼굴(몸)로는 데살로니가를 떠났지만 마음으로는 떠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얼굴 다시 보기를 그토록 원했지만 사탄이 막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3장 2절에 보면 디모데를 대신 보내서 박해와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에 굳건하게 서도록 격려하고 위로하려 했는데 디모데가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그 좋은 소식이 뭐라고 말합니까?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랑 위에 굳건히 서서 믿음 생활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좋은 소식이지요.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바울 일행을 진심으로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도 전해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지금 바울이 너무 궁핍하고 환난 가운데 있지만 이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가 비록 자신은 가난하고 배고파도 자녀가 잘 되었다는 소식, 자식이 잘 산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든 힘든 것을 다 잊고 너무 행복하고 기쁜 것처럼 영적인 지도자들은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영적인 자녀라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믿음생활 잘 하고 서로 사랑하며 지낸다는 소식만 들으면 힘이 나고 너무나 행복한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아무튼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더불어 데살로니가교회가 겪고 있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도 적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재림 문제였습니다. 

❚재림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우리나라도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한 다미선교회라는 이단 때문에 한바탕 소란을 겪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기억나십니까? 이 다미선교회가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을 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지요. 종교문제인데도 9시 뉴스에 매일같이 다미선교회와 휴거 문제가 보도되었고 급기야 법원이 다미선교회를 이끌어온 이장림 목사를 시기혐의로 구속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공언한 1992년 10월 28일 24시가 지나고 휴거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미선교회는 해체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 때 정말 10월 28일 24시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신 분 안 계시지요? 안 했다면 다행입니다. 다 거짓말이고 다 엉터리입니다. 다미선교회는 이젠 20년이 다 된 케케묵은 이야기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다 잊혀진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데살로니가교회를 이야기하면서 왜 이 20년 묵은 옛날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사건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미선교회도 이름을 바꾸어 다시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다미선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다미선교회 같은 종말론 이단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습니다. 또 앞으로 이런 이단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시 다미선교회가 끼친 나쁜 영향이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이 이단 사상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온 정든 교회를 떠나고, 그 가운데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팔고, 가정을 팽개치고 다미선교회에 들어가거나 아예 산으로 올라가 기도에 전념하며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신앙이 파괴되고 인생이 파괴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가정이 깨지고 가족이 파탄을 맞았습니까? 과연 이 분들이 다미선교회가 해체된 후에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가정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했겠습니까? 그러지 못하고 완전히 파괴된 인생, 파탄을 맞은 인생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나아가 기독교를 비판하고 공격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신났습니까? “거봐라, 예수 믿는다고 저 난리를 친다, 미친놈들이다, 당신도 교회 가지 마라” 소리를 예수 안 믿는 남편이나 가족, 주변 사람에게 들은 분도 여러분 중에 많을 것입니다.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모든 교회와 기독교를 싸잡아 비난하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다미선교회 사건은 한바탕 해프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한국교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준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와 유사한 종말론 이단들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와 건전한 신앙을 좀먹고 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다미선교회 사건 같은 일들이 종말론에 대한 첫 번째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여러분, 종말론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 아닙니까? 그런데 이 십자가와 부활 못지않게 중요한 교리와 신앙이 바로 재림신앙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사망권세 이기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주님이 언젠가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신앙이고 동시에 그 때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상 이 너무나도 중요한 종말론과 재림신앙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계속되어 왔는데 그 첫 번째 오해는 종말과 재림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잘못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미선교회처럼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지 내가 안다, 그러니까 직장이고 가정이고 다 포기하고 우리 집단에 들어와라, 산으로 올라가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입니까? 이 오해에 사로잡히게 되면 언제든지 다미선교회 같은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때 데살로니가교회도 재림과 종말에 대한 이런 잘못된 오해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여러분, 도둑이 “나 몇 월 며칠 몇 시에 그 집을 방문하겠다” 하고 예고하는 것 봤습니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른다는 말은 아무도 모를 때 갑자기 임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날, 즉 재림과 종말의 시기는 아무도 모르고 다만 뜻밖에 어느 날 갑자기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이 언제일까 궁금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태도는 무엇인가? 4장 11절에 나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또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게으른 사람은 먹지도 못하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잘못된 종말신앙으로 직장도 그만두고 일도 안 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종말이 언제 오나 하는 문제는 아무도 모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럴 시간에 차라리 조용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자기가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정말 올바른 종말신앙을 가진 사람은 오늘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정반대로 재림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재림은 없다거나 있다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태도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 두 번째 오해도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종말은 반드시 있습니다. 재림도 반드시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주님이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 세상이 다 종말을 맞이하고 완전히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때 심판이 있어 모든 악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영원한 심판의 불로 떨어지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안 믿으면 우리는 성경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재림신앙, 종말신앙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 신앙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재림을 사모하는 삶

그런데 종말신앙, 재림신앙을 꼭 가져야 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그 이유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부터 11절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함께 봅시다.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종말이 있고 재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 첫머리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를 아시지요? 열 명의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어서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에 따라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어서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마냥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헌데 그 중에 다섯 처녀는 미련해서 예비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기다리는 도중에 등불이 꺼져버리지만 등불을 다시 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말지요. 반대로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스페어 기름을 준비해 두었다가 등불이 꺼지자 곧바로 다시 켜서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종말에 대한 비유입니다. 신랑은 물론 예수님이고 혼인잔치는 종말과 재림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우리 성도들이고요. 그러니 이 비유는 언제 올지 모르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 곳곳에 깨어있어야 갑자기 돌아올 신랑이나 주인을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이 나오는데 전부 종말과 재림에 대한 교훈입니다. 즉 언제 올지 모르는 종말과 재림에 대비해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마지막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도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우리는 다른 어둠의 자녀들처럼 잠들어있지 말고 영적으로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8절에 나온 것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가슴 부분을 보호하는 갑옷)과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마귀 사탄의 권세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영적 무장을 하라는 뜻이지요. 또한 11절에 나온 것처럼 성도들 간에 서로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살기라도 할 듯이 서로 아옹다옹하며 삽니다만 늘 주님의 재림이 언제 올지 모르며 살면 사람들끼리 용서하고 덕을 세우며 살게 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분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하는 말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기를 쓰면 최대 6개월을 살지만 삶의 질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머리 빠지고 몸이 망가지고 꼼짝 못하고 병원에만 누워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암치료 안 받으면 기껏해야 석 달밖에 못 살지만 하고 싶은 일 하고 가고 싶은 곳 가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답니다. 이 분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 인생에 석 달이라는 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말입니다. 우선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고 결혼한 이후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그동안 자녀들과 변변히 대화도 못하고 살았는데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다 글로 써서 남겼습니다. 그리고 평생 아내에게 못 해준 것만 생각나서 남은 석 달 아내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가족들 문제를 해결했다 싶으니 그 다음에 주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동안 서운한 마음 안고 살았던 분들, 너무 멀리 지내며 살았던 분들, 풀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아쉬운 일들이 다 생각이 나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편지를 다 썼습니다. 그동안 전도하고 싶어도 못했던 분들이 생각 나 성경을 여러 권 사서 맨 첫 표지에 진심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 석 달 후 정말 이 분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나라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힘겹게 투병하시는 분들에게 희망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 인생의 마지막이 올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니 불편한 사람들, 서운한 일들, 풀어야 할 관계 아직 다 못 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처럼 석 달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이 관계들부터 풀고 용서할 일, 용서 받을 일, 못해준 사람들 다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태도로 살아갑니다. 주님 오늘 오실지, 내일 오실지 모르는데 언제든 주님 오시면 구원 받고 천국 갈 확신은 있는데 언제 오시든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 주님 언제 오시든 후회 없게 가족과 성도들과 주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풀어놓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좀 더 넉넉하게 품어주는 삶, 용서하는 삶, 이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재림 앞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로 재림을 열렬히 사모하며 이런 깨어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기 바랍니다. 언제라도 주님 오실 수 있고 언제라도 내 인생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준비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되 재림 때 주님 앞에 서서 어떤 부끄러움도 아쉬움도 후회도 없는 준비된 삶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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