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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행하는가?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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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행하는가? (눅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6)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8)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1)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2)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3)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4)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5)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7)
<누가복음 10장 25~37절>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지난 심야 때도 말씀드렸는데, 탁장로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추석 이틀 전에 놋주발에 송편을 담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탁장로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송편이 끊겼습니다.
요즘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추석 때 송편 만들어 드셨냐’고 물어보면 
다 사서 먹었다고 하더군요.
여러분은 맛있게 드셨습니까?

저는 이번 명절 기간에 정말‘물이 무섭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습니다.
저는 좀체로 두려움에 떨거나 공포에 젖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 비에는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하나님 비가 그쳐야합니다’하면서 벽을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건물을 잘 짓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로에 모인 물이 홍수처럼 
지하 주차장으로 밀려들어오는데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목사님들, 전도사님들, 장로님들, 관리실 직원들 …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 물난리를 겪고 나서‘노아홍수 때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이 정말 이렇게 보잘 것 없구나’
사람이 아무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습니다.

큰소리치지 말고 겸손하게 범사에 준비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같은 상황, 다른 행동

사람의 행동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차는 당연히 중앙선 우측으로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길을 건널 때도 무의식적으로 왼쪽을 먼저 확인하게 됩니다.
반대로, 영국/일본/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 등에서는 
차는 중앙선 좌측으로 다닌다고 생각하고 
길을 건널 때는 우측을 먼저 확인합니다. 
‘왜’라는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다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 주일, 주님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오늘이 그저 일주일의 하루‘쉬는 일요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늦잠을 자고/여행을 가고 … 
자신만의 삶을 살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행동은 생각의 지배를 받고
생각은 그 사람이 처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 묻지도 않은 채 
운전을 하면 도로 우측으로 차를 몰고 다닙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똑같습니다.
자기가 배웠고, 자기가 경험했던 것,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나쁘다고까지 말합니다.

조금 전 장로님께서 봉독해 주신 말씀 속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같은 상황 앞에서 생각이 달랐고 행동도 달랐습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 교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하도록 대화를 이끄셨습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고지대이고 여리고는 지구상에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내려간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가려면
황량한 광야를 통과하며 약 27km의 긴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은 구불구불 했고 협곡을 지나야 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산적들이 잠복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강도와 살인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길에서 입고 있던 옷도 빼앗기고,
흠씬 두들겨 맞아서 죽기 직전 상태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제사장이 발견했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해 갔습니다.
곧 이어 레위인 한 사람이 나타났지만
그 사람도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면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쉴 수 있는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쉬운성경에는 “여관”으로 번역되어 있음)
그리고 다음 날에는 숙소 주인에게 비용을 주면서
강도 만난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였고,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까지 자기가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입니다.
율법교사, 제사장, 레위인 모두 유대인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짐작해 보면 강도 만난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그들 사이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특별하게’ 싫어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하면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서로 싫어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특별하게 어떤 부류의 사람을 미워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텍사스나 애리조나주에서 쓰는 영어는 동부에서 쓰는 영어와 조금 다릅니다.
저같이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미국 동부에 사는 사람들은 
서남쪽지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쉽게 구별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투리 쓰는 사람을 만나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기원전 8세기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침략을 받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정복꾼인 앗수르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에 정착하면서
문화와 종교가 혼합되고 민족 간의 잡혼이 성행했습니다.
당연히 단일민족의 전통이 깨지게 되었고 혼혈아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국제결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가족 가운데도 국제 결혼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 모두 똑같은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국제결혼이나 혼혈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앗수르 사람들이 쳐들어와 혼혈아가 태어나고
피가 섞이게 된 그 때부터 남쪽의 유대인들은 
북쪽 지역의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결한 사람으로 여기며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른 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 했을 때 
북쪽 사마리아인들도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니 서로 간의 미움은 더 깊어졌습니다.

성전이 없던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따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루살렘에만 성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은 성전을 파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골은 더 깊어만 갔습니다.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서울; 컨콜디아사, 2006), p.238. 참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도 
모두 유대인이었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도와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누가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같은 민족인 사람이면 무조건 이웃이냐?’
‘제사장이면, 레위인이면 이웃이냐?’누가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행동하지‘못했던’사람

강도만난 사람 곁을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유대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했었습니다.
백성의 대표가 되어 예배를 집례했던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본을 보여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도와 예배를 돕고, 율법을 가르치고,
재판을 하며 문지기와 찬양대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전 성경 사전』(서울; 두란노, 2006), pp.311~312, 1143. 참조>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들이고,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1장에 보면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레 21:1)라고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에게 맞아서‘죽은 것처럼’보이던(거의 죽은, 눅10:30) 
사람을 보고 시체라고 생각하고
“죽은 자를 만짐으로 …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했으니 
율법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죄의식을 갖지 않고 피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을 피해서 지나쳤지만
자신들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에 따르면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정치철학이 다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어떤 분은 이쪽 당을 지지하고,
어떤 분은 저쪽 당을 지지하고, 어떤 분은 또 다른 당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당의 대표를 미워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정치적인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대통령을 미워합니다.
하는 일이 마음에 좀 안든다 해도 정말 그렇게 미워해야 합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에 따라 미워하고, 좋아하고 …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극과 극입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잘못된 것이라고, 틀렸다고 욕하기도 합니다.
경제개념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부동산을 사야 한다, 금을 모아야 한다, 
미국 달러를 사놔야 한다, 중국 위안화를 가져야 한다,
펀드에 가입해야 한다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다 보니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립합니다.
어느 입장을 택했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정죄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옳은 가치관 속에서 정확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그 옳은 생각과 가치관을 
하나님을 아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으십니다.(시 119:137)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의를 행하십니다.(시 89: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기 위해(행13:22) 애쓰며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말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엡 1:17)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바르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단, 바르게 믿고 / 바르게 순종해야 합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왕궁에서 연회가 열렸습니다.
궁궐의 문지기는 방문객이 오면 신분을 확인한 후에
손님들의 우산을 문 옆에 잘 정리해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문지기는 임금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우산을 쓰고 오지 않은 한 방문객이 문지기를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문지기가 그 방문객을 멈춰 세우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집에 가셔서 우산을 가져오십시오.
임금님께서는 제게 모든 손님들의 우산을 문 옆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손님을 들여보낼 수가 없습니다.”
<『신앙과 감동이 담긴 문학 이야기』(서울; 기독교문사, 200), p.534. 참조>

잘 생각해보면 오늘 말씀 속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왕궁 입구의 문지기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율법대로 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정결하기 위해서 …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을 피해갔던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임금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듣고 
손님을 돌려보낸 문지기와 비슷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는
“…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킨 자가 이웃입니까?
사랑을 행한 자가 이웃이겠습니까?
누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겠습니까?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데 얽매여 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입니까?
극도로 껄끄러운 관계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죽어가는 유대인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인이 참된 이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측량하지 못할 만큼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롬 11:3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반복하여 읽고 / 묵상하고 / 설교를 듣고 /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어 
하나님의 뜻이/생각이/마음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행동하지‘않았던’사람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 당시 율법 교사는 ‘성경학자’또는‘종교학 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그런데 그 질문에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 가운데도 보면(우리교회 교우 중에도)
가끔 ‘목사님~ 이것이 무엇이죠?’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몰라서 묻는 분들도 있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데도 저를 테스트하느라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나쁜 의도를 가진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무엇이라 대답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25절 말씀에 보면, 율법교사는
“…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라고 했습니다. (눅 10:25)
그런 율법교사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되물으셨습니다.

“…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6)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던 대로 대답했습니다.
함께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 10:28)

율법 교사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의 대답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중요한 것은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37)신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가서 … 하라”(눅 10:37)

그런데 사람들은‘이웃’을 자기 스스로가 결정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마음에 안들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
지역에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무조건 싫어합니다.
누가 이웃을 마음대로 정합니까?
우리들은 돕고 싶은 이웃을 정하고, 사귀고 싶은 이웃을 정해버립니다.

하인리히 그리븐(Heinrich Greeven)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웃을 정의할 수 없다.
오직 이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하인리히 그리븐 -

우리가 이웃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던 사람을 위해
-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습니다.
- 묵을 만 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돌보려고 하룻밤을 보냈고
-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돈까지 지불했습니다.
시간을 희생했으며, 물질을 희생했으며,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직접 이웃에게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성경에서‘사랑’이라는 단어는 살아서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God is Love.”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표현했습니다.(요일 4:8)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행동하는’자녀

비유 속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참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천하보다 소중한 한 영혼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습니까?
얼마나 인내하셨습니까? 자녀로서 부모 앞에 얼마나 순종하고 공경했습니까?
부모로서 자녀를 지혜롭게 가르치셨습니까?
친구를 만나고, 친척을 만났을 때 예수 냄새 풍기셨습니까?
아니면 예수 안 믿는 척 했습니까?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겸손했고, 얼마나 따뜻함을 전했습니까?

시간과 물질과 수고를 베풀었던 사마리아인처럼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 행동하는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이미 많은 지식을 쌓아서 알아야 할 것들은 다 알고 있었던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들도 기본적인 것은 다 알고 주일에 교회에 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 드려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하고,
베풀고, 겸손하고, 인내하고, 화목해야 하고,
분을 내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엡4:26)

우리는 다 알면서 하지 않습니다.
율법 교사처럼 자기 정의에 빠져서, 자기 생각이 옳다는 생각,
자기 경험이 옳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라! 그리고 네가 아는 대로 실천하라!”
그것이 율법교사가 묻는 질문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답입니다.

“가라 그리고 아는대로 실천하라”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라! 그리고 네가 아는 대로/배운 대로 실천하라!”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가슴에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일성수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성경 읽어야 하며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별해야 하며
나누고, 베풀어야 하고, 겸손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하고, 평안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분을 내지 말아야 하고 …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게 하시고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도록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듣고 고개만 끄덕이며 가는 자가 아니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신앙인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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