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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지으신 목적 (엡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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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으신 목적 (엡 2:8-10)

 
행위냐 믿음이나 하는 것은 해묵은 신학적 논쟁입니다. 사람이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받느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진리에 대한 반론과 염려도 만만치 않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무슨 이유로 행위에 힘쓸 일이 있겠느냐, 도덕적 해이 현상을 가져오지 않겠느냐, 이런 반발입니다. 거기에 맞서서 복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지만 상급은 행위로 받는 것이다. 구원이 다 똑같은 게 아니고 구원 중에는 자랑스러운 구원이 있고 부끄러운 구원이 있다. 

우리가 이후에 천국에 올라갔을 때 면류관을 받는 사람도 있고 받을 면류관이 없어서 개털모자나 쓰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내가 환상으로 천국을 봤더니 천국에 아주 좋은 집이 있고 또 아주 가난한 형편없는 집이 있더라. 좋은 집은 이 땅에 살 때 주님을 잘 섬기던 사람을 위한 것이고 형편없는 집은 주님을 섬기지 않던 사람을 위한 것이다’ 천국에도 부자동네와 빈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모든 논쟁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궁금하기 때문이고 의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행위의 결과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이 복음의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정함의 기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는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사람 하기 나름이에요. 사람의 노력에 비례하고 공로에 비례하고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원리에요. 

만일 우리가 얻는 결과가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불로소득이라고 하고 요행이라고 합니다. 이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복음은 구원이 사람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에 좌우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소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공정함의 기준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믿기는 믿지만 복음의 진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 율법주의가 사방에 많으냐.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다 바리새인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섬기던 교회의 교역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담임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어떤 관계입니까’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하니 평신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때 담임목사님이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대낮에 사람이 길을 걸어갈 때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가 없다면 그건 사람이 거기 없는 것이다.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림자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행함이 따르게 돼 있다. 만약에 행함이 없다면 거기에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럴듯한 설명이지 않습니까.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이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같다. 사람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것처럼 사람이 믿음을 들이쉬면 행함을 내쉬게 돼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처럼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여 틀렸다면 지옥 갈까봐. 조금이라도 틀렸다면 구원에 지장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믿음과 행함을 색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8절과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도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평소에 이 구절을 좀 더 주목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색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은 사람이고 행함은 그림자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거냐, 저거냐의 논리가 아니에요. 흑백논리가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행위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전자를 이루어서 후자를 하게 한다는 얘기입니다.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바로 선한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왜 사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느냐,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느냐, 우리의 인생에 어떤 목적이 있느냐, 나는 무엇을 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되느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일평생 나쁜 짓만 하고 산다면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인생은 실패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인생은 허비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손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건 마치 은행에 돈이 많은데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냉장고 안에서 썩히는 것과 같습니다. 멋진 자동차가 일평생 주차장에 서있는 것과 같고 비행기 표를 사놓고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건 내 실수이고 내 잘못이고 내 손해입니다. 내 허비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와 나에게 한번밖에 없는 기회를 내가 허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는지를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지 모르고, 모르는 것뿐만이 아니고 알더라도 하지 않는 것, 그것처럼 자기 손해가 없습니다. 그건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면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살수만 있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느냐. 내가 굳이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선한 일을 하면서 살면 된 게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지요. 그건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질문을 하셔야 됩니다.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말은 우리를 만드셨다는 뜻인데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재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창조 받은 것이지요.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만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거듭나야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born again-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거듭나야 됩니까. 첫 번째 탄생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창조가 망가졌습니다. 첫 번째 창조의 목적이 무산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선천적으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선천적으로 자기 인생의 선한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으로 재창조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new creation-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첫 번째 창조라면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것은 재창조함을 받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이 우리를 향한 선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행할 수가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거듭나야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지를 압니다. 처음부터 다 아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방향을 설정하고 그릇된 방향과 옳은 방향을 분별할 수 있고 그리고 신앙이 자랄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즘에 전 세계적으로 재활용이 대세이지요. 재활용-Recycle. 집에서 쓰레기를 버릴 때도 재활용 쓰레기를 따로 모아서 분리 배출을 하지 않습니까. 종이 ․ 플라스틱 ․ 유리 ․ 알루미늄 이런 식으로. 저는 쓰레기 버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저의 집에 옛날에 뭐를 찾아서 없으면 어머니 이것 보셨어요? 여쭤보면 안 쓰는 거라서 버렸대요. 없으면 버린 겁니다. 저도 그걸 닮아서 제 책상에 뭔가 잔뜩 쌓여있으면 일을 못합니다. 그래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버리는 작업부터 해야 됩니다. 이건 오래됐고, 이건 이미 읽었기 때문에 버리고, 이런 식으로. 

그리고 저는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쓰던 생수병이라든가 플라스틱 병을 집에까지 가지고 가서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무실에서 버렸다가는 제대로 분리수거를 할 것 같지가 않아서 일일이 플라스틱 백에 넣어서 집에 가져가서 버립니다. 사택 주차장에서는 24시간 분리수거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제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유리병은 유리병대로 플라스틱 병은 플라스틱 병대로 병대로 버립니다. 아마 그 관리실 아저씨가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차에서 내리면 쓰레기부터 버리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버렸다면 다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리수거의 원리가 무엇이냐. 유리 ․ 플라스틱 ․ 알루미늄 그걸 버리면 사람들이 수거해서 그것으로 무얼 할 것 같습니까. 유리병에 다시 물을 담아서 팔까요? 그건 분리수거가 아니고 사기지요. 중국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빈 에비앙 병에다 수돗물을 넣어서 판다고 합니다. 그건 Recycling이 아니고 사기지요. 진짜 리사이클링은 녹이는 것입니다. 플라스틱을 다 모아서 녹이고 유리를 다 녹여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리사이클링입니다. 리사이클링은 버려질 물건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다 버려질 물건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게헨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게헨나는 예루살렘의 쓰레기 소각장 이름이었어요. 게헨나에서는 항상 불타는 연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지옥은 버림받은 영혼이 타는 곳입니다. 우리는 다 버림받은 인생이에요. ‘베린다’는 말이 있지요. ‘사람 베린다.’ 우리는 다 베린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해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지옥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리사이클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플라스틱 병이 리사이클링이 돼서 멋있는 물건으로 다시 기회를 얻고 더러운 유리병이 리사이클링이 돼서 성당의 스테인 글라스가 되는 것처럼 더 선한 목적을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다시 선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길에 가다가 길거리에 휴지를 버린다든가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불법인 것뿐만이 아니고 나쁜 버릇이지요. 쓸모없기 때문에 버린다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한다면 남아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버림받은 인생처럼 불행한 것이 없는데 버림받은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입니다. 버려진 것입니다. 더 이상 쓸모없다는 얘기입니다. 용도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구원이란 용도가 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다시 깨끗하게 하셔서 더 귀한 목적을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을 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느냐. 그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10절 말씀을 보면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때마다 임기응변으로 너 할 일 없어? 이거 해봐. 이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하여 전부터 예비하신 선한 일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의 직장과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장 없는 사람은 일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직장과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세상적으로는 직분이 없을지라도, 어린이라도, 은퇴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미 인생의 오후에 들어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오후, 해가 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귀중하게 보내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면 안 됩니다. 물론 엔조이 할 줄도 알고 쉴 때도 있고 놀 때도 있지만 노는 것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예수님도 일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도 일하십니다. ‘내 아버지가 이제껏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일하러 오셨어요.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하셨어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하시고 우리가 선한 인간이 돼서 선한 일을 하면서 살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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