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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말렉과의 싸움 (출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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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과의 싸움 (출 17:8-16)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고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자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성령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싸움을 거는 대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육체의 소욕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겉사람과 속사람의 쟁투로 보았다. 

롬7: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예수를 믿어 성도가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하다. 하지만 그 충만한 은혜의 물결을 경험하고 나면 바로 예전에 없던 갈등과 싸움이 생겨난다. 죄가 아닌 것이 죄로 보인다. 예전에는 당연히 할 수 있었고 했던 일들이 거슬리고 해서는 안되는 일로 다가온다. 즉, 내가 육의 사람이었을 때는 육체의 일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갈등 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 죄가 아니라고 생각되던 무관심, 무정함, 무절제, 게으름 따위도 죄로 여겨지고 마음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 은혜의 물을 마시면 마음은 감사로 천국을 이루지만 그 때부터 도전하는 싸움의 대적이 나타난다. 

오늘 본문 출17:8을 보라.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최초의 싸움을 걸었다. 

그런데 싸움의 때가 ‘그 때에’다. 무슨 때인가?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다투었을 때 하나님이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을 마셨다. 광야의 목마름에서 해갈을 받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말렉이 싸움을 건 시간은 바로 그 때인 것이다. 물이 터져 나온 그 때, 생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는 그 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1. 신앙 생활은 은혜를 받았을 때 싸움이 시작된다. (출17:8)

바울은 고전10:4에서 반석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하였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므로 반석의 물은 그리스도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강 같은 은혜다. 누구든지 은혜의 물을 마시고 감사하는 그 때에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에’라는 말에 주목하라. 그렇다고 두려워하지 말자.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고 대적이 나타나는 것은 신앙의 순리다. 사물에 원리가 있듯이 이는 신앙 생활의 원리다. 이제부터 싸움을 거는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당연시 여기자. 갈등과 싸움이 시작될 때에 “왜 그러지? 왜?”라고 하지 말고 “Oh, Yes! 내가 제대로 신앙인의 길을 가고 있는거야!”라고 고백하라. 은혜를 받아서 십일조 생활을 하고 새벽 기도하고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또 한쪽편에서 ‘그냥 대충대충해’라고 속삭이며 거슬리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 때 “정상이다.”라고 말하라. 움츠러들어서는 안된다. 신앙은 언제나 은혜를 받았을 때 싸움이 시작된다. 그것이 순리다. 이를 받아들여라.
 

2. 신앙 생활은 싸움을 거는 자의 정체를 알아야한다. (출17:8~9)

엡2:2~3을 보면 신앙의 원수들이 있다.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영, 그리고 육체의 욕심이다. 우리는 이 원수들로 인해 죽었던 자들인데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부어주셔서 살아났다. 그런데 이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영으로 다시 산 우리들을 향해 도전한다. 싸움을 건다. 마치 광야교회에서 생수를 경험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말렉과 똑같다. 아말렉의 공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모세는 아말렉과 싸우라고 한다. 도망가고 숨는 것이 아니고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 싸움을 걸어오는 정체, 아말렉을 알아야 한다.  

① 아말렉이란 이름의 뜻은 ‘전쟁을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 성도는 화평케 하기를 좋아하는 자이므로 아말렉을 만날 때 힘들어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화평케 하는 자여야 하지만 아말렉과는 물러서서는 안된다. 

② 아말렉의 족보는 에서의 손자다.

창36:12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라고 하였다. 에서는 누구인가?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내팽개친 사람이다. 그래서 히12:16에서는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하였다. 아말렉은 망령된 자의 후예답게 옛사람의 상징이다. 성령을 거슬리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만들려는 신앙의 원수다. 

③ 아말렉의 속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25:17~18)

아말렉은 하나님의 백성이 피곤할 때에 약한 자를 치고 특히 뒤에 떨어진 자를 쳤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치고 싸움을 거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앙, 하나님을 모름,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불경건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말렉은 먹고 마시는 것, 육체의 배부름만을 위해 살면 되는 옛사람의 모습이다. 약속이나 축복, 예언의 언약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육체의 사람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싸움을 거는 대적자는 육으로 살려는 정욕이다. 

르비딤, 그곳이 물이 터진 자리다. 하나님의 은혜로 물이 터졌는데 육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광야 중의 오아시스라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기 위한 환경만 생각하고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그래서 싸움을 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말렉은 육의 성품을 지닌 옛사람의 모형이다.

  
3. 신앙 생활은 싸워서 이기도록 되어 있다. (출17:10~13)

출17:13을 보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긴 것이다. 이기도록 되어 있는 싸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이기려면 영적으로 이기고 승리해야 한다. 이기는 법은 무엇인가?

① 손을 들어야 한다. (출17:11)

출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손이 올라가면 이긴다. 아말렉을 무찌르는 길은 손에 달려 있다. 손이 올라간다는 것은 기도의 표상이다. 

시28:2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딤전2:8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기도할 때 아말렉을 이긴다.


② 피곤을 해결해야 한다. (출17:12)

출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우리는 피곤할 때 아말렉에게 진다. 아말렉은 본래 피곤한 자를 찾아 공격하였다. (신25:17) 피곤하면 기도의 손이 내려온다. 기도가 중단된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눅18:1의 말씀이 깨진다. 기도에 날마다 새 힘이 생기도록 돕는 사람,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과 함께 하라. 기도해야 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론과 훌처럼 손을 붙잡아 줄 수 없다. 손이 피곤하지 않도록 해야 됨을 알기에 모세의 손을 붙잡아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피곤이 영적 장애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의 손을 올리되 돕는 기도, 합심 기도가 있어야 한다.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③ 칼날로 나아가야 한다. (출17:13)

출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그렇다. 기도와 합심기도로 싸우되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이다. 아말렉 같은 육체의 본성도 소욕들로 엉킨 정욕을 무찌르려면 말씀의 칼로 나아가야 한다. 말씀으로 우리의 영과 혼, 몸을 찌르고 쪼개야 한다. 아말렉이 꿈틀거리지 못하도록 무찔러야 한다. 그래서 승리한다. 이기도록 되어 있다.

  
4. 신앙 생활은 완전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17:14, 16)

우리는 때때로 이겨놓고도 또 실망한다. 다시 아말렉의 공격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또 다시 싸움에 떨어지고 걱정 근심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싸워서 완전히 진멸한 것이 아니고 그냥 쳐서 무찔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어느 날 또 싸움을 건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 승리를 보여준다. 

출17:14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는 것이다. 아말렉 같이 거슬리는 신앙 생활의 대적들, 영적 생활에 거슬리는 육성들을 진멸하고 승리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약함을 느끼고 쓰러지고 갈등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라. 

출17:16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완전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대대로 싸워주시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지금 거룩하지 못해도 영적으로 맑아지고 영성의 높은 고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나님이 싸워주시기에 육성은 죽고 죄는 활동하지 못하고 성령으로 지배받는 사랑의 화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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