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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없이 능력 없다 (막 9: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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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없이 능력 없다 (막 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I. 본문해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은 다루지 못한 귀신들린 아이를 능력으로 고쳐주셨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병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고, 또 여러 번 이런 일들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아하여 본문의 말씀과 같이 물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류”는 종류(kind)입니다. 즉 예수님은 “너희들이 전에는 이런저런 모양으로 귀신을 내쫓고 능력을 행하였지만, 이러한 종류는 너희에게는 감당이 안 된단다. 이런 것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II. 신자의 영적현실 

어떻게 보면 이 일은 병자 하나가 고침을 받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신약 성경 전체가 전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신자의 영적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 전투의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삶의 모든 일들을 악령과 성령의 대결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도록 창조되었고, 그렇게 창조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에서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선택을 행하는 데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때는 우리 힘으로 하지만 선을 행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악자는 책임을 피할 길이 없고, 선을 행한 자는 하나님 은혜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어쨋든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자의 영적현실은 영적 전투이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전투에 부름 받은 군사입니다. 

A. 영적 전투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장엄하게 진술하면서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뜻과 교회를 세우신 목적,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소명을 따라 살아야 할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한 측면이 영적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얼마나 안일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의 본분은 영적인 전사요, 군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역사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로마의 군인에 대해서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었고,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다.” 

로마는 그러한 강력한 군대에 의해서 그 긴 세월동안 나라가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합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의 정체성에 대해 대답해 보십시오. “나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즉시 하늘나라에 입영한 군인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전투라고 생각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은근한 성공주의와 안일에 빠져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닐까요? 

역사 이래, 주님의 군사가 강력하게 교회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을 때 교회는 복음에 혁혁한 승리를 거두며 강한 교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는 더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많더라도 안일하고 나태한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찼을 때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핍박과 환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지체들이 아무리 부패하여도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이천 년의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지역 교회는 망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지켜주실 때, 당신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워주신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주님 앞에서 전투적인 삶을 살 때에 그 시대의 교회에는 하늘의 복이 내렸고, 수많은 불신자들을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태만하고 나태하게 살 때, 즉 의의 흉배와 구원의 투구를 내동댕이치고, 진리의 허리띠를 풀어놓고, 믿음의 방패를 팽개치고,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내동댕이쳤을 때는, 말할 수 없는 섭리의 격련 속에서 사단에게 교회가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일 많은 교회에 경고를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적 전쟁이라면, 그런 영적인 전투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지식이나, 가문, 학벌과 같은 것들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한 삶,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 이것 없이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엄중한 현실 가운데 주님이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정사와 권세와 의문의 증거를 폐하신 분입니다. 

B. 신자의 특권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적 전투에 적합하도록 신자에게 특권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용서와 은혜의 무한한 공급입니다. 

1. 죄에 대한 용서 

먼저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우리를 이 영적인 전투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소명을 느끼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배시간마다 지성은 맑고 투명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집니다. 정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의지는 올곧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왜 변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맑고 청명하던 지성이 흐려져서 예배시간 졸거나 딴 생각을 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그 자체는 큰 죄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태도는 우리의 영혼에 적신호이고, 언젠가 죄에 빠지고 실패하게 되는 길목입니다. 이처럼 죄가 신자의 마음에 가득할 때, 선명하고 명료하던 진리의 빛은 혼탁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습니다. 마음은 헛된 것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들뜨게 되고, 의지는 하나님 앞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 완고하기 짝이 없는 의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와 용서를 비는 모든 자들의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예전에는 그릇되게 살았으나 바로 살도록 하시고, 예전에는 부랑아였으나 단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신령한 진리의 빛은 정결한 마음에, 주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은 깨끗한 영혼에, 하나님을 향해 올곧은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정결해진 심령에 머물기를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능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주님 한 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직하게 나를 용서해 주시고,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다시 용서해 주십니다. 

2. 은혜의 무한공급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의 무한한 공급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재적 방식과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초월적인 방식은 개인적인 부흥입니다.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물 붓듯이 강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놀랍게 눈을 뜨도록 만들어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무장시키십니다. 그리고 이런 초월적인 사랑의 부으심의 경험은 축복임에는 틀림없지만, 대부분의 은혜는 그보다 더 보편적인 방식인 내재적인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내재적인 방식은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성화의 노력에 따라서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반문하지만, 사실 은혜를 구하는 데 용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용도가 불분명하면 절실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는 자기만족이고 평안이고 감동받은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 자신은 은혜의 최종 소비자여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용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의무가 마음에 명료하게 새겨지고, 정말 하나님 앞에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들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사모함으로 목마르게 됩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주일에 말씀을 통해 삶에 대한 도전을 받은 것들을 한 주간 동안 실천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가까이 하고, 열렬히 기도하고, 틈틈이 시간을 내서 영혼들에게 전도하고, 가족들을 돌보고 지체들을 섬기는 전투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다시 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다시 그를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유통하는 삶입니다. 


III. 기도를 통해 역사하심 

그리고 이런 은혜의 놀라운 공급은 기도를 통해 역사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를 좀 혼란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쫒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귀신들린 이의 아비가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우리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이 말씀이 간접적으로 이 아이를 귀신들린 상태에서 고쳐주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아마도 제자들을 포함하여 그 병든 아이의 아비였을 것입니다. 그러시더니 상황이 모두 종료된 다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이유가 기도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답은 누가복음의 기도의 장에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장과 억울한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불의했지만 억울한 과부가 쉼 없이 가서 매달렸더니 백성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도 결국 올바로 판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너희도 하나님 앞에 밤낮으로 매달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곧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로서 화란에서 이름을 떨쳤던 하나님의 사람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경건의 최고의 외적인 실천은 간절한 기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하고 말씀하신 것도 너희들이 이 정도의 일을 감당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은혜를 받아서 강한 능력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IV. 결론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의 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의 사람으로 세워주십니다. 광야와 같은 빈들에서 주님 한 분을 우러러 보며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가슴에 품고 빛들로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많은 신앙의 사람들, 주님의 이름 하나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명예를 위해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 시대에 태어나서 이 시대의 보편 교회를 끌어안고,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돌보았을 영혼들을 싸매고 돌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늘의 능력이 필요하고, 기도 없이는 이런 능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에 지고 물러가는 황폐한 신앙생활의 한 복판에는 기도가 사라진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곡히 권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두 세 사람이 만나면 기도하자고 권하십시오. 지금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라 가슴을 찢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없는 그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교회에 가득 채우고 탈영병 같던 교인들이 모두 복귀하여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영적 전투에 헌신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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