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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알살리사의 성도 (왕하 4: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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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살리사의 성도 (왕하 4:38-44)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왕하 4;38-44)

사람 사는 세상에는 빈부의 격차가 있습니다. 수십 억 원이 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삭월세 방 한 칸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빈부의 차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지요. 우리기독교인들도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은 넘치는 부를 소유한 자와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모두에 대하여 정확하게 교훈을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얻은 부(富)를 자신을 위하여 독식하지 말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가난한 자들에게 제일 먼저 그 가난을 극복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그 가난한 환경에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계속 가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난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생명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고, 보호하시는 능력입니다. 통치하시고, 섭리 하시고, 보호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 속에는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나라 중에서 북조 이스라엘입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은 혼합주의의 이단과,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가짜 제사장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혼잡한 상황아래서 엘리사는 참된 선지자들을 양성해 낼 신학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바로 자신이 선지학교를 설립합니다.  물론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 학교는 재정적으로 무척 운영이 어려웠습니다. 소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가해 준 신학교'도 아니었으며, 교단적인 지원은 물론이요, 후원 교회 하나 제대로 없는 영세한 신학교 입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선지학교가 있는 길갈지방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선지학교 생도들도 같이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인 엘리사가 큰 솥을 걸어라고 합니다. 선지 생도들은 산으로 다니면서 먹을 만한 것을 구해다가 솥에 넣습니다. 그렇게 한 끼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좋게 보면 굶어도 같이 굶고, 먹어도 같이 먹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반 거지들의 집단입니다. 최소한의 준비된 음식도 없는 신학교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학생들입니다.  아마 성도여러분들도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주위에도 이런 신학생들이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성경의 기록된 상황을 조금은 체험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신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계속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갈등입니다.  세상에는 부자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저렇게 높은 건물들, 저렇게 좋은 집들이 너무 많은데... 그 사람들이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부유하게 사는데...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신학생들은 왜 이토록 가난과 빈곤에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주인공이 분명히 맞는데... 왜 아무것도 모르는 자녀들까지 이런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뭔지 깊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현실이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 생각이 깊어지고,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목사의 일을 감당하는 훈련이 저절로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자기도 가난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하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도 부유한 분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 아닙니까? 그분들과 기쁨과 슬픔을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준비를 하는 것이 신학생 시절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우나 아주 죽지는 않는 것도 배웁니다. 흔히 말하는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고 와서 전해주는 것’도 경험하는 것이 신학교 시절입니다.  저도 기숙사 방문 아래로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봉투를 2번 받아 보았습니다. 또 등록금이 없어서 이제 그만 다녀야 하는가? 할 때 기적적인 방법으로 등록금을 해결해 주시는 것도 겪었습니다. 정말 받은 사랑의 30배, 60배, 100배로 돌려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맞습니까? 비록 세상이 주는 외적인 부유함은 없지만, 내면적인 부유함, 영적인 부유함이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런 분들이 천국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어서 고민을 하지만, 나중에는 세상 물질만을 위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부자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전혀 다른 영적인 부유함을 알아가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은 모두 다 영육간에 모두 부유하신 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하신 말씀처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하시는 일이 잘되고, 육신도 강건하시는 3박자 축복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들외, 들호박"란 오렌지 비슷한 색깔과 크기의 열매였는데 맛도 쓰고 또 복통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생도 한 사람이 우연히 이것을 따왔을 때에, 워낙 먹을 것이 없었던지라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 가려 볼 여유도 없이 그저 솥에 썰어 넣어 국을 끓였습니다. 그리고 다들 둘러앉아 그 국을 먹으려고 맛을 보니 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선지생도들이 얼마나 상심했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무슨 소나무 뿌리나, 산나물이라도 캐서 무슨 야채죽을 끓여서 그것을 식사라고 먹으려 했는데 그것마저 못 먹을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죽을 다 버리고 모두 굶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엘리사의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하나님은 모든 식물의 주인이십니다. 비록 엘리사가 그 솥에 가루를 넣도록 했지만  그 가루 자체가 무슨 효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 끼 먹을 식량도 없는 신학교에 무슨 해독제를 준비하였겠습니까.  순전히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에 의하여 독죽이 먹을 수 있는 영양죽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망의 음식이 사람이 먹어서 영양이 되는 생명의 음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것이 엘리사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런 능력을 겪었습니다.  (행28;3-6)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神이라 하더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는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무슨 독이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실 오늘날은 ‘독의 시대’입니다.  먹는 음식마다 사람의 몸에 나쁜 농약성분이 없는 음식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마시는 물도, 숨 쉬는 공기도 오염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독이 없는 먹거리와, 오염이 없는 깨끗한 물과 공기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심방을 가보면 몸의 곳곳이 아프신 분들이 많습니다. 매일 먹는 약이 밥하고 같은 양입니다. 약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그러나 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독이라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말씀이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은 독에서 벗어나고, 독을 이기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엘리사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바울에게서 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마가복음에서 약속한 이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당연히 나타나기를, 성도여러분들이 당연히 그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어렵게 운영되고 있던 그 신학교에 어느 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2절부터 44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바알살리사"라는 곳에 살던 어느 무명의 성도가 이 '보따리 신학교'에 뜻하지 않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처음 익은 식물'이란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지소산의 처음 얻은 것들을 제사장들에게 갖다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대로 적어도 토지의 첫 소산만큼은 무조건 제사장에게 '소제(素祭)'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알살리사’에서 온 사람은 그 특별한 예물을 제사장에게 바치지 않고 이 엘리사의 선지학교로 가져왔으니 사실 비 율법적인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 금송아지 숭배자들뿐입니다. 사마리아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없었고 오직 바알 제사장만 있었습니다.  이름은 제사장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율법에서 명하는 바 토지의 첫 소산을 갖다 바치도록 되어 있는 진짜 제사장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이 무명의 성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예물을 이 엘리사의 선지학교, 즉 그가 알기로는 진짜 선지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학교이며 그래서 제사장이 받아야 할 예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는 이 학교로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은 성경이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무명의 한 성도입니다. 다만 그가 사는 곳의 지명만을 기록하는데 ‘바알 살리사’는 본래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인 살리사 지역의 한 성읍이며,(삼상 9:4) 이곳은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다닌 지역이었습니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살리사’였는데 이세벨의 악정으로 그 위에 우상인 ‘바알’의 이름이 붙여서  '바알살리사'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우상의 위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이 사람이 벧엘이나 예루살렘에서 왔다면 놀랄 것이 못되지만,  이 사람이 우상의 도시인 ‘바알살리사’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곳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난하지만 선지 생도로서 자신을 준비하고 있는,  악한 세상에서 교회적 사명을 다하며 살아가는, 그 생도들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이제 다른 현실적인 문제로 넘어갑니다.  그때가 심각한 기근의 때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헌물(獻物)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보리떡 1개는 겨우 한 끼 식사를 할 정도의 빈약한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보리떡 이십은 이십 명이 한 끼 식사를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입니다. 자루에 담아온 채소라고 해 보아야 많은 양이 아닙니다. 배추 4포기만 자루에 넣어도 무겁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다 먹어도 일주일 먹으면 끝입니다. 귀한 헌물이기는 하지만 100명이나 되는 선지 생도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양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에 의해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의 5병2어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 때에 일어난 본문의 이야기도 신약의 이야기와 유사점이 많습니다.   
① 그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남자만 5,000명인데 5병2어입니다.  지금은 선지생도들만 100명인데 보리떡 5개와 채소 조금입니다.    

② 상황이 모두 다 배가 고픈 상황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배가 고프시겠냐 예수님이라도 드시게 하자’라고 의논하는  제자들을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으며, 이 식물을 엘리사 선생님 드리면 딱 맞겠다. 라고 선생님에게 양보하는 하는 선지생도들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③ 헌물을 받은 예수님과 엘리사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고 하셨고, 엘리사는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합니다.     

④ 그리고는 반대가 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6;9)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현실만을 보는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도 가르치려고 하고, 엘리사도 가르치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시면 안 되지요’하면서 충고를 합니다. 

⑤ 예수님도 엘리사도 말싸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때에 드러납니다.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드디어’ 라는 말에 관심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사환과 엘리사가 실랑이를 벌였다는 말입니다. ‘선생님 생각 좀 해 보시오. 떡 한 개를 네 조각으로 나누어 먹어도 20명분이 모자라는데 그런 어림없는 소리를 마십시오’라고 사환이 엘리사를 가르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마침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누어 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영적인 교훈을 받습니다.  * ‘심지 않은 곳에서는 결코 거둬들이는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을 가집니다. 어린아이의 도시락, 한 이름 없는 성도의 헌물.. 이것이 씨앗입니다. 믿음은 씨앗을 심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는 씨를 심는 사람이 되어야 겠구나 하시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이 다툼이 일어 난 것 같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란 것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꼭 다툼이 일어나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받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다툼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엘리사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모르고 상식과 현실만을 알고 있는 사환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미친 행동입니다” 하면서 엘리사를 가르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분은 ‘됩니다, 합시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지를 못하는 사람들, 상식과 현실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은 ‘어림없는 짓 하지 말라면서 못한다’ 고 합니다. 

*** ‘문제의 해결은 제자들과 사환의 순종에 있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기주장을 펴던 사환이 드디어 억지로라도 순종을 하여, 말씀대로 무리 앞에서 나누어주니, 없어지고 모자랄 것 같던 것이 계속 채워짐을 받아서 100명이 다 먹고도 남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상식과 경험에 앞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며 살아가는 분은 항상 모자라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이 세상에는 지금도 전 세계 인구의 2/3가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구나.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면 기아문제가 해결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고(요 6:1-15), 엘리사에 의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100명을 먹이고도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나와 내 가족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교회가,  이 땅에 모든 피조세계에 부족함이 없는 기적, 넘치는 기적을 보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세계교회가 인류에 직면한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세계에서 영적으로 풀려고 하면 다 풀릴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만 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크냐, 얼마나 값어치가 있느냐 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쟁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곧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의 세계는 곧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적의 세계입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이 영적 신앙의 세계만이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직면한 모든 환란과 죽음의 위기에서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제말씀을 맺습니다. 

'들외'로 끓인 국의 경우에는 물질의 '질(質)'을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양(量)'을 증폭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 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국만 변화시키고 빵만 변화시키겠습니까? 사람의 몸(身)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心)은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나를 바꾸고,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말씀으로 나를 바꾸시고, 내 인생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 가족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변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통하여 가족의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며, 대한민국의 문제가 해결되며, 기아문제, 오염문제가 다 해결되도록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다 바꾸어 주시옵소서.  이 일에 나를 써주시옵소서. 이렇게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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