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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롬 11:33-36, 고전 1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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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롬 11:33-36, 고전 10:31-33)
  

종교개혁 때에 개혁자들이 내건 유명한 슬로건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기독신자의 신앙과 생활을 지극히 잘 요약한,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는, 그러면서도 완전 충분한, 정말 너무나도 멋있는 모토였습니다.
그 이전 로마천주교 시대의 소위 신앙생활이란 것은 완전히 제도와 의식 속에 갇힌 것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란 것을 그저 천주교가 정해 놓은 여러 가지 '틀'을 통하여서만 영위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미사, 7성사, 면죄부 등 천주교가 규격화해 놓은 것들에만 그저 참석하고 따라하기만 하면, 그것이 절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인 줄로만 가르쳐지고 배워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생활이란 것에는 자연히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은혜의 체험이 지극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제, 추기경, 교황, 성자 및 성녀들, 그리고 성모 마리아 - 이런 존재들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 노릇을 하는 바람에 사람은 자신의 인격으로써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한다면 큰 죄가 되는 것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그런 헛된 미신을 타파했었습니다.
각 신자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으며, 그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천명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라는 이 표어는 그처럼 신자가 하나님과 1대1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그야말로 최고의 좌우명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제일 되는 존재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바로 여기에 모든 참된 신앙의 핵심이 있고 모든 선한 행위의 길잡이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흔히 듣는 표어이기는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리 자주 반복하고 많이 강조해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는, 너무나도 중요하고도 또한 멋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오늘 그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경향교회가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고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진정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신자가 되기 위하여 꼭 깨닫고 실천해야 할 이 위대한 개혁주의 신앙 표어의 의미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라는 말은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마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신앙이란 것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이 생겨나게 된 것이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먼저 자존하고 계신 까닭에 사람 편에서는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11장 33절부터 36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너무나도 명백히 우리에게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33절과 34절에 보면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심을 그 전지(全知)의 속성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계획, 뜻, 의지, 판단, 작정, 예정 - 이런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영역에서 하나님은 한없이 크고 깊고 넓으신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그 부요하기 한이 없는 "지혜와 지식", 돌아가고 작용되고 있는 그 전지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 전지하신 "주의 마음", 무엇을 계획하시고 뜻하시고 의지를 세우시고 판단하시고 작정하시고 예정하시는 그 하나님의 내면의 세계는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 사람으로서는 그저 "측량치 못하며 찾을 수도 없다"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사람이 그와 같은 하나님을 가르치거나 코치를 한다거나 힌트를 주는 "모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전지'의 절대적 속성을 가지신 존재인 까닭에 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35절과 36절 말씀에서는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심을 그 전능(全能)의 속성으로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이니셔티브도 취할 입장이 못되고 그럴 힘도 전무한 존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그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기는커녕, 사람이라는 존재의 원인 자체부터가 다른 만물과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원인자가 되셨으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 만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쥐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만물에 대한 유지와 작용 역시 오직 "주로 말미암고" 그 만물의 존재 목적 역시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될 뿐인 것입니다.
물론 그 만물이라는 피조물 중에 하나인 사람에 대한 섭리, 인도, 보호, 도우심, 역사, 구원, 심판 - 이런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는 영역 역시 온통 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완전히 들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처럼 참되신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인생과 이 우주 전체의 존재 세계까지 전적으로 당신의 전지의 '마음'과 전능의 '손'으로 완벽하게 소유하시며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계시해 주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 앞에 이처럼 위대하신 절대주권자로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여호와 하나님 - 정말 아무리 보아도,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유일의 신이 아니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출발점을 똑바로 찾아야 합니다.
절대주권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유일한 대전제가 되고 이 하나님의 그런 신비로운 고유의 속성을 믿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과 진짜 종교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곧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께서 먼저 스스로 절대주권자가 되어 계신다는 바로 이 사실부터 우리가 깨닫고 인정하고 믿어야만 우리의 신앙은 그 출발점을 제대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종교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잘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 발상지가 되는 종교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되는 신을 찾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지능에 딱 맞아떨어지고 사람의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와 들어맞아야만 믿을 수 있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찾는 신은 결코 참된 신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라는 존재와 대등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사람보다 열등한 신'을 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계산과 반드시 일치가 되어야만 하는 신이라면 기껏해야 '사람과 같은 수준의 신'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먼저 주면 갚아 줄 수 있는 신, 사람의 굿을 하면 그제야 반응할 수 있는 신, 사람이 무언가 갖다 바쳐야 먹고 살 수 있는 신이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람보다 못한 신'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나도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다 측량할 수 없고 찾을 수 없으며 그의 마음은 우리가 다 알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하나님 - 오직 이 분만이 참 신이십니다.
아무도 그분께 먼저 무엇을 해드리는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 - 오직 이 분만이 우리가 '신앙해야 할 대상'이신 참 신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진짜 하나님, 이런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믿고 깨닫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는 고백적인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위대하신, 이처럼 크고 무한하신, 이처럼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존재를 사람이 알게 되면, 그 무게와 그 크기와 그 존귀와 위엄에 순식간에 압도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 앞에 그저 엎드려 벌벌 떨면서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뵈옵게 된 인격 속에서 뜨겁게 감동되는 신앙이 그 입술을 통하여 고백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이 개혁주의 신앙의 표어는 이처럼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 되시게 하는,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자존하시는 절대주권자로 믿고 시작하는 신앙임을 확실히 깨닫고 똑바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란 말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바로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에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할 때에 사람은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구실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 33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선 31절에 보면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본문의 앞에 보면 사도 바울은 신자가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확실한 신앙고백을 한 신자이면 그 신앙에 따른 행위가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온갖 제도와 법으로써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심에 진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신앙에 따른 양심의 판단'을 가지고 행동할 자유 또한 있는 것이며 이것은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신자의 기본적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신앙양심이란 것이 각 신자로 하여금 제멋대로 살아도 되도록 무단방치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양심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신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하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절대적인 목적을 따라 행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 하고많은 사람의 행위들 중에서도 유독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든지, '너희가 기도생활, 헌금생활, 봉사생활 열심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라.'라는 식으로 예를 들지 않고, 그 대신에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밥 먹고 물 마시는 것' -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특별한 행위로 여겨지지는 않는 일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고 매일 하는 아주 흔한 행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매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그런 것들까지도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할 줄 알아야 마땅하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할 때조차 기독신자들은 자기가 지금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잠자고 일어나는 것, 숨을 쉬고 맥박이 뛰는 것 - 이런 것들까지도 다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자율신경으로 되는 행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생명으로 유지되기 위하여 작동되고 있는 일상행동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 돈 버는 것, 결혼하는 것, 자식을 키우는 것 - 이런 모든 삶들이 다 나 자신이 잘 먹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생활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행위까지도 우리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행하는' 일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 다시 말해서, 나라는 사람의 생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작용과 행위가 전부 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이 한 가지에만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2절과 33절에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타인을 대하여 "거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성도를 귀찮게 하고 어렵게 만들고 괴롭게 하는 존재, 약한 교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교회 일을 방해하는 '거치는 인생'으로만 평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와 더욱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알고 위로해 주고 기쁨을 주는 존재, 택하신 백성을 교회를 통하여 구원하고자 하시는 이 귀한 구속 사역에 잘 쓰임을 받는 실로 '유익한 인생'을 사는 신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양자를 결정짓는 요소가 바로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과 행동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일까?' - 목사가 이런 자세로 가르치고 설교하며 교회 일을 결단하고 인도해 갈 줄 알아야만이 진정 성도의 신앙생활과 교회성장에 유익한 주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대접하고 이번의 교회 일에 대하여 어떻게 봉사해야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을까?' - 신자가 이런 자세로 약한 교우를 대하고 교회를 섬길 줄 알아야만 실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정에서나 직장과 사업처에서나 학교에서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내가 지금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만 우리는 진정 사람과 교회 앞에서, 아니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치는 자가 아닌 유익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위의 환경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식물계가 그러합니다.
약간의 감각적인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하등 동물계가 그러합니다. 
먹고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욕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고등 동물계가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살아야 정말 사람다운 생명이 되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대로 그저 그 조류에만 맞추어 살면 되겠습니까?
식물계 수준의 인생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저 오감에 느껴지는 대로만, 그저 먹고 살려는 욕망만 충족시키고 살면 되겠습니까?
그거야 동물계 수준과 똑같은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그런 하등의 상태, 그런 저질의 수준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욕망은, 아니 우리의 본능까지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몸부림칠 줄 알게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그 최고와 최대와 최선 모두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알아야 사람은 정말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이 멋진 표어를 통하여 자기 생명의 진짜 용도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자기 인생이 고귀한 목적을 완벽하게 성취해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은 이 '영광이 그에게'라는 신앙의 최고 원칙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행위의 최고 원칙을 전파하면서 그 인격의 지성소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이 위대하고도 멋진 표어를 통하여 '바른 신앙'과 '참된 행위'의 지표를 실로 간단하면서도 명백하기 그지없게 설정해 주었습니다.
'SOLI DEO GLORIA'라는 이 세 단어 속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신앙 진리의 핵심,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행동 지침의 근본이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표어는 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왔던 로마천주교의 이단적 교리와 허례허식의 제도들을 한순간에 타파하고 참된 교회, 선지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 곧 개혁주의 신앙의 교회를 세우기에 충분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대 교회들, 바로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용기 있는 결단과 목숨을 내 건 투쟁의 결과로 세위지게 된 개신교 교회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그 선배들의 인격을 그처럼 뜨겁게 감동시키고 그들의 삶을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했던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이 표어가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사라지면서 그 대신에 '오직 사람에게 사랑을', '오직 세상에 행복을'이라는 표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기독신자의 기본 의무는 전 인류에게 박애를 베풀어 주는 데 있고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일단 종교화합운동부터 앞장섬으로써 전 세계가 평화공존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예 한술 더 떠서, 그것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교회 개혁'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천주교의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아 놓은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으며 그것을 계속 지켜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개혁주의 신앙운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처럼 '오직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는 목사들은 이 개혁주의의 정신을 거부하고 그 전통을 파괴하는 것을 '새로운 개혁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원래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던 개혁주의 기독교를 순전히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인본주의 종교로 전락시키고 있는 무리가 바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에 해당되는 개신교 목사들 중에서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기가 막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년 동안 지속되었던 천주교의 오류를 단숨에 고칠 수 있었던 표어라면, 오늘날의 그 어떤 교회의 문제점 역시 정확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 이것만 깨달으면 우리는 참된 신앙을 분명히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이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에 대한 교리 제1조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 이것만 지켜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이것이야말로 신자와 교회의 행위에 대한 수칙 제1조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주권자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믿음'을 지키고 또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도록 행동함으로써 '사람답게 사는 생활'을 나타내는 것 - 바로 여기에서 참된 신행일치가 이루어짐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이 개혁주의 신앙인의 자랑스러운 표어를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뜨겁게 간직하고 강력하게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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