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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거스르는 죄 (행 7: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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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거스르는 죄 (행 7:41-60)
 
 
우리는 지난 주일에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대표하는 스데반이라고 하는 집사의 신앙의 모습을 저희들이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따라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시대마다 영웅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 적으로는 영웅이 아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령 충만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의 영웅은 많지 않지만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교회나 또는 역사 속에서 교회와 역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의 역사 가운데 선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순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스데반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스데반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부분에는 스데반이 유대인들 앞에서 행한 긴 설교의 내용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이 설교의 내용을 이해하시면 좀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여러 유대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장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민족의 시조가 되게 하신 아브라함, 그가 갈대아우르 땅에서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 부름을 받아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그를 통해 이어지는 족장의 역사를 별 특별한 내용 없이 기술하였습니다.

두 번째, 설교의 내용은 모세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내용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아주 강한 분명한 메시지를 증언합니다. 출애굽기 30장 이하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시고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십계명돌 판을 작성하시고 그것을 모세에게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가이드라인을 정해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조급해진 나머지 그들은 아주 하나님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 형 아론을 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금부치를 다 녹여 황소를 만들고 난 다음에 그 황소 앞에 절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소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과 배교의 죄악을 범합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와 불순종 우상숭배, 이것을 가리켜 스데반은 뭐라고 표현 하냐 하면,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을 범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세 번째, 스데반의 설교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돌로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성전 안에만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마음속에 계시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돌로 만든 성전 안에 가두어 놓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스데반의 설교 내용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보낸 많은 선지자, 의인들을 잡아 죽이고 급기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대인들이 잡아 죽여 유대인들이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커다랗게 이 네 가지 내용을 스데반이 설교하게 되자 이 이야기를 들었던 유대인들이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언할 때,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받으면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오히려 반대로 유대인들 회개는커녕 이를 갈며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들어 결국은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난 다음에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스데반을 죽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스데반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이 양적으로 성장하는 초대교회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안전하다는 의식을 갖고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던 이 이스라엘 백성들, 이 신앙인들을 외국으로 보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핍박과 고난과 어려움을 교회 안에 허락하셨습니다. 흔들림을 당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제 복음을 가지고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 이제는 외국으로까지 복음을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의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런 성령 충만한 사람, 또는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바로 스데반이 그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스데반이 하는 이 설교의 내용을 듣고 있었던 이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입니다. 스데반이 이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령을 거스르는 몇 가지 죄악을 범했다. 라고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 스데반이 행한 설교의 내용 가운데 유대인들이 범한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먼저 우리는 성령을 거스르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합니다. “거스르다.” 이 말은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무시하다. 라는 뜻이지요. 저항하다. 또는 반대 길로 가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한 말, “너희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을 범했다.” 라고 하는 말은 성령의 가르침, 성령의 교훈, 성령이 말씀하게 하시는 모든 것들을 다 저항하고 거부하고 반대로 돌아섰다. 무시했다. 라는 이야기 입니다. 

사도바울은 여러 차례 성령에 충만 하라. 성령을 받아들여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령을 기쁘시게 하라는 말은 많이 했지만 성령을 거스른다는 이 말은 저주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스도를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는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는 사탄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떤 면에서 유대인들이 성령을 거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이 한 설교의 결론 부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을 첫 번째 행위는 목이 곧은 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절 상)

목이 곧다. 쉬운 말로 이야기 하면 목이 뻣뻣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목이 뻣뻣한 행동, 이것은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첫 번째 죄악입니다. 목이 뻣뻣하다. 목이 곧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주위에 아주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이 곧은 사람, 일반적으로 우리가 저 사람 목이 뻣뻣해, 목이 곧아! 라고 이야기 하면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보통 세 가지 의미가 있지요!

첫 번째는 교만할 때 사용합니다. 교만은 언제 오나요? 교만은 자기가 제일 잘 낫다고 생각할 때 옵니다. 많이 배웠고 가진 것 많고 잘 낫고 배경이 좋을 때 사람들은 교만해 집니다. 목이 뻣뻣해지지요? 나 같은 사람이 있느냐!

두 번째 목이 뻣뻣한 사람은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가진 것 없다고 못 났다고 재능이 없다고 특정 신체 부위를 일컬어 또 비난을 합니다. 무시하지요. 목이 뻣뻣한 사람은 이렇게 안하무인(眼下無人) 합니다. 남을 무시합니다. 자기만이 제일 잘 낫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틀렸습니다. 그러니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세 번째, 목이 뻣뻣한 사람은 고마워할 줄 모릅니다. 자기가 오늘 있게 된 것은 부모님의 은혜고 남편의, 아내의 사랑과 뒷받침이 있었고 자식들의 도움이 있었고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생각, 하나님께서 지금의 나의 삶의 모든 것들에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누리고 있다는 은혜에 대한 감격해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얻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마음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없으니까 목이 뻣뻣해 지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최고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이런 목이 뻣뻣한 사람, 언젠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목이 뻣뻣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장과 가정과 일터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누리고 있다는 사람은 남들에 대하여 고마워합니다. 당신의 도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목이 곧은 행동은, 목이 뻣뻣한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비가 있습니다. 친절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은혜의 사람이지요. 그런데 성령을 거스르니까 은혜도 없습니다. 친절도 없습니다. 겸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면에서 목이 곧은 행동이었을까요? 왜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다고 했을까요?

스데반이 한 설교 가운데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돌 판을 받아 내려오던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을 합니다. 금송아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뻣뻣한 행동은 순종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교만의 극치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 누가 주었나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준 것을 자기들의 신이고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우리가 탈출하여 여기까지 오게 하였다. 

목이 곧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일할 수 있는 일터와 직장, 재물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시대가 좋아서 자기가 부지런해서, 많이 배워서 얻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기에게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400년 동안의 종살이에서 끄집어냈고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그 홍해까지 가르고 밤이면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메추라기와 만나와 생수를 통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그 하나님을 저버리고 웬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소 앞에서 경배하며 그 소가 자기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하는 이런 우상숭배 반역을 저지릅니다. 

만약에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돈이 여러분을 지켜주었고 여러분의 재능이 여러분을 지켜주고 여러분의 건강이 여러분을 지켜주고 직장과 사업장이 여러분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우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을 성령을 거스르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라는 생각이 들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여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 바로 우상을 숭배했던 이 죄악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것입니다.
  

두 번째,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죄를 의미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절 중하)

할례는 무엇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 아이를 낳게 되면 성기 끝 부분을 부싯돌로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가죽을 잘라 버린 것이지요. 이 의식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성기 일부분을 자르무로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민족과는 달리 이것을 자른 민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였습니다. 이 살의 일부분을 자르면 당연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지요. 할례의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표시로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했습니다. 할례만 받으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나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될 규례와 율법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물리적인 할례가 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여워하셨지요.

그래서 많은 율법학자들의 잘 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이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신명기 10:16에서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10:16)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4:4에서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예레미야 4:4)

마음에 가죽을 베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죽을 베지 말고요. 예레미야는 이제 귀의 할례도 이야기 합니다. 예레미야 6:10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 (예레미야 6:10)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다는 이야기 이지요.

성령을 거스르는 두 번째 양상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의 할례와 귀의 할례를 받지 못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음의 할례는 형식을 뛰어 넘은 진정성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신자로서 주일 날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신자로서 헌금도 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신자로서의 형식적인 것은 다 한다고 하더라고, 주일부터 주일이 지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 세상에 나가 살면서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심으로 해야 될 진심과 사랑과 용서와 구제와 이런 것들을 한 번도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육체의 할례는 받았지만 마음의 할례는 아직 못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닙니다. 육체의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지키지 않고 사랑과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육체의 할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귀의 할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귀의 할례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 귀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 하실 때마다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귀가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안 듣고 세상에 있는 말만 듣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잘라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귀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세상의 음성은 다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귀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오게 하고 세상의 더럽고 추잡한 모든 말들은 다 잘라 버립니다. 그런데 귀의 할례를 받지 않으니까 세상의 말은 다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슴속에 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나를 도와 다오. 헌신해 다오. 희생해 다오. 너의 재물과 시간과 눈물과 재능을 나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느냐고 주님이 요청하실 때마다 귀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주님, 믿겠습니다. 알았습니다. 희생하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이야기 하지요. 그런데 귀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오지 않고 세상의 재미와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이야기만 들어오니까 이 사람은 세상 죄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이야기 남을 무시하는 이야기, 욕하는 이야기, 거짓말 하는 이야기는 들어오지만, 희생하고 헌신하라는 주님의 말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할례와 귀의 할례를 받아야만 우리는 형식을 뛰어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려면 귀가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들을 때, 내 마음이 감동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마음의 할례가 있어야만 우리는 손발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삶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육체의 할례만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몸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은, 의를 박해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52절) 

주변에 있는 의로운 사람들을 핍박하고 무시하고 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때에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나요? 그런데 이 선지자들이 이야기 할 때마다 백성들은, 왕은 선지자를 못 마땅히 여겨 죽였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하여 톱으로 잘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동족들의 손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들 대부분이 다 이렇게 살해당했습니다. 

요즘도 교회 안에서나 또 어디에선가 정말 바른 말 하는 의로운 말을 하는 성령에 충만해 감동받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일반사람들이 미워합니다. 무시하고요.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사람들을 들어 올바른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지적하여 누군가가 이야기 할 수 있지요! 기분은 안 좋지만 우리의 죄악과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통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들을 때마다, 주님, 제가 죄인이군요.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사람을 무시합니다. 바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이지요.

여러분의 실수와 여러분의 잘못을 누군가가 이야기 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네 번째,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는 죄를 의미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5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천사가 그와 함께 했더라. 그러니까 천사는 모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일 수도 있지요. 일반적으로 천사가 전해 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인데 이 교만한 사람의 아주 특이한 전형적인 삶은,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인생의 기준입니다.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회에서 배운 것,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 자기가 인생에서 배운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성경 읽지 않고 신앙생활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루에 성경 몇 장 읽지 않고 예배드리지 않고 듣지 않으면서도 나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 이런 마음 갖고 계시는 분계십니까? 바로 교만한 마음입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너희들에게 임하게 되면 그 성령이 너희들에게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올바른 지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말씀을 거스르는 자, 무시하는 자,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내 치십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성령을 거스르는 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을려고 귀를 막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57절을 보면, 스데반이 설교를 하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57절)

귀를 막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데반이 이야기 할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 맞아 내가 예수를 죽였고 우리가 하나님을 돌로 지은 집에 가두어 놓았고 우리가 우상을 숭배했구나, 정말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귀를 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 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유대사람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일부로 귀를 막았습니다. 귀를 막으니까 들리는 말은 뭔가요? 사탄의 음성입니다. 귀를 막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의도적으로 성령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시간에 설교를 통해 여러분에게 말씀을 하시고 여러분이 기도할 때 말씀하시고 여러분이 찬송 부를 때 말씀하시고 여러분이 누군가에게서 말씀을 공부를 배울 때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 하시는구나. 라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열고, 들을 때 하나님은 말씀을 들을 때 전달할 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스데반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안 들으려고 귀를 막게 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신자들을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 값을 물으셨지요. 그래서 72년 로마 8군단이 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모든 성벽을 부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외국으로 다 쫓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서러운 신세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고 교만하고 마음에 할례, 귀의 할례를 받지 않고, 이 세상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내 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냐? 아니면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냐? 올해 우리교회 표어,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바로 우상을 버리고 겸손하고 의를 인정하고 받아주고, 그리고 의도적으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또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통해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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