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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 (벧전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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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 (벧전 3:4) 
 

(벧전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1.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는 외쳐라” 고 하시자 “내가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반문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다 들의 꽃과 같아서 여호와의 입김에 그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니 참으로 사람은 풀에 지나지 않는구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외치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에 마르는 풀과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리고 겨자씨같이 작고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영원히 값진 인생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단장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이 되려면 먼저 온유함으로 그 마음을 단장해야 합니다. 

‘온유’는 첫째,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화를 부드럽게 참아내며, 둘째,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꺼이 참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통치하고 전쟁에 앞장 서 싸워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분명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對敵)하는 배신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울 때 야기되는 엄청난 부담과 문제들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며 설득하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사무엘이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 때문에 눈물로 부르짖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고 경고함에도 ‘그래도 우리는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그가 우리를 다스리며 전쟁에서 우리를 지휘하고 우리를 위해 싸울 것이 아닙니까?’ 라며 우겨댑니다.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하나님께 고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고 하셨습니다.(삼상8:17-22)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악행임에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과 주권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악행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 질투하여 죽여 없애버리려 한 끝에 노예로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행을 섭리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가셨습니다. 그 섭리가운데 요셉을 애굽 총리가 되게 하셨을 때, 그 형들이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며 두려워합니다. 

이에 요셉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겠습니다.’ 며 따뜻한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창50:18-21)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대로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셨지만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은 키가 장대하고 풍채도 뛰어난데다 전투력마저 갖추어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매우 매력적인 ‘사울’을 선택했습니다. 이 사울이 자신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말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게다가 우리 가족은 우리 지파의 모든 집안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집안인데 어째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삼상9:21) 라며 겸손해합니다. 

이러했던 사울이 10년 세월이 흘러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아말렉이 500년 전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피곤함을 틈타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의 이러한 비겁한 악행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시고자 사울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사울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쉽게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이 하나님 말씀 그대로 시행했는지 여부를 알고자 찾아가는데 어떤 사람이 ‘사울이 갈멜에 가서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습니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이겼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다시 말해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왕으로 세워 의롭게 쓰임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을 나타내고자 기념비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거만한 사울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삼상15:23,26)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온유’는 자기의 의(義)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에 대해 보복하지 아니하고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냈습니다. 참으로 요셉과 같은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온유’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꺼이 참는다.’는 뜻입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도피 길에 올랐습니다. 그 때 전(前) 왕 사울의 친족 중 ‘시므이’라는 자가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인 다윗이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창 49:10)을 시기하던 중, 마침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거침없이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살인자여! 불한당 같은 자여! 사라져라!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너에게 갚으셨도다. 네가 사울의 왕위를 빼앗았으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것을 너의 아들 압살롬에게 주었구나! 너는 사람을 죽인 죄로 이제 벌을 받아 망하게 되었도다!’ 이때 다윗의 신복 아비새가 ‘어째서 왕은 이 죽은 개 같은 녀석이 왕을 저주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가 가서 당장 저놈의 목을 베겠습니다.’ 며 칼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저주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가 나를 저주하고 있다면 누가 그에게 네가 어째서 이렇게 하느냐? 고 말할 수 있겠느냐? 내 몸께서 난 아들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내버려 두어라.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 지도 모른다.’ 고 말합니다. 

사실 ‘시므이’의 비방과 저주는 전혀 근거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을 뿐입니다.(삼하9:9-10) 그래서 ‘시므이’를 단칼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참았습니다. 훗날 ‘시므이’는 압살롬의 반란이 평정되자 급히 다윗 왕을 찾아와 과거의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다윗의 용서를 구걸합니다.(삼하19:16-23). 

그때에도 신복 아비새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시므이가 저주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시므이는 죽어야 마땅한 줄 압니다.’ 며 처형할 것을 요구하자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시므이’에게 처형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왕상 2:36-46). 

다윗은 이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謹愼)하는 자세, 겸손한 모습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참았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온유한 통치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만들었습니다.(마5:5) 삶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끝까지 참는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다는 말은 우유부단이나 아첨, 비열, 무력하고 굴종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유명한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온유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며 자기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는 겸손이다.” 그러면 어느 때가 분노할 때이고 어느 때가 분노해서 안 될 때인가? 

분노에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자신을 모욕했을지라도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웃이 불편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온유함으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이기적인 분노여야 진정한 온유입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항상 죄가 되지만 비이기적인 분노는 도덕과 정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 가장 거룩하게 보이며, 속으로는 자기 뱃속을 채우려 성전을 이용하며 성전을 더럽힌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 

(막11:15-1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을 증오하며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하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해야 할 때에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분노할 까닭이 없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파괴적인 분노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 타락과 퇴폐로 얼룩진 사회를 정화시키는 거룩한 분노, 증오로 가득한 상한 마음에 용서와 위로 등 아름다운 향기로 채우는 사랑의 분노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감싸주는 온정 속에서 나오는 사랑의 분노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돌보는 거룩한 분노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생활감정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하나님의 은혜로 억제되지 아니하면 파괴적인 분노가 될 뿐이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언22:24-25입니다

(잠 22:24-25)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분노를 바르게 해소하지 않고 억지로 억누르기만 하게 되면 심령이 상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인격과 성품이 뒤틀리게 되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질투하십니다. 그 질투로 끝나시는 분이 아니시라 분노하셔서 잘못된 인간의 사랑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질투와 분노를 인정하십니다. 

때문에 무조건 분노를 피하고 분노의 감정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사람들이 미모의 여인들을 이용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습니다. 미인계에 넘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에 빠졌습니다. 음란에 흠뻑 젖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여인들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함께 우상 숭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로부터 엄청난 염병이 돌기 시작해서 무려 2만 4천명이 죽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대낮에 내 앞에서 처형하라. 그러면 이 백성에 대한 나 여호와의 분노가 사라질 것이니라.” 그래서 모세의 지시에 따라 음행과 우상숭배한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자, 여기저기에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서 한 이스라엘 사람(시므온 지파 족장 시므리)이 모세와 백성이 보는 앞에서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통회하는 그 순간에도 파렴치하게 음행을 자행한 것입니다. 그때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그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창을 들고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 남자의 등에서부터 그 여자의 배까지 한꺼번에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불타오르는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여 결연히 일어나 단번에 처형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퍼진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비느하스가 행한 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분노를 거두었노라. 그가 내 명예를 위해 나처럼 분개하였으므로 내가 분노로 그들을 전멸시키려던 뜻을 돌이켰노라. 그러므로 너는 그에게 내가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기로 약속한다고 말하라. 그는 나를 위해 분개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속죄하였느니라.”(민25:1-13) 

하나님은 자신의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음행과 우상숭배할 때, 하나님은 그 거룩한 속성상 뜨거운 질투와 극렬한 분노로 다가오십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질투하시고 질투하시기 때문에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비느하스의 행동을 두고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거룩한 의분에 찬 비느하스의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그는 나를 위해 분개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속죄하였느니라.’는 말씀대로 비느하스의 거룩한 분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음행과 우상숭배로 전염병의 심판이 즉각 멈추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가 담긴 온유함으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에 따라 살 때 맺어지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거룩한 분노, 의분으로 나타나는 온유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과 성령에 따라 사는 자가 온유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분노를 완전하게 자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의분강개(義憤慷慨)의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제,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은 분노는 파괴적인 분노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 앞에 값진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여 결실하는 토양이 부드러운 옥토와 같습니다. 옥토는 말씀의 씨가 떨어질 때 잘 자라서 100백,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가르침 받기를 잘하는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속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참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가장 교만한 자를 가장 겸손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완악하고 강퍅한 자를 가장 온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레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마13:18-23)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라면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모든 분노를 창조적이고 성공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최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아 돌처럼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에스겔서 11:19-20입니다. 

(겔11: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성령은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죄가 하나 없으신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가시면류관 쓰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그리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도 그 인간 군상들을 향해 한 마디 분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을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분노이며,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 구원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온유한 자가 되시므로 이웃을 구원하여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안정한 심령(quiet spirit)으로’ 단장해야 하나님 앞에 값진 삶이 됩니다. 사람은 그 영(靈)이 안정되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재미있는 유머 하나 소개합니다. 뒤늦게 결혼해서 60세에 결혼 25주년을 맞이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60세가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파티도 열지 못한 두 사람이 조촐하게 기념식을 갖고 뜻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당신들의 금실이 너무 좋아서 소원을 들어줄 테니 한 가지씩 말하세요.” 먼저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했어요. 세계 일주를 하게 해 주세요.” 요정이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흔드니 세계 일주 여행 비행기 티켓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할아버지 소원을 말하세요.” “나는 나보다 30살 적은 여자와 살고 싶어요” 요정이 웃으면서 지팡이를 달랑달랑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60세의 할아버지가 90세 할아버지로 변했습니다. 마음을 잘못 쓴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구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겠습니까? 부부간에도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그 영이 안정되어야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시편42:11을 보겠습니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영혼이 낙심하고 불안함을 토로(吐露)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 소망이 없기 때문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없기에 낙심하며 불안한 것입니다. 참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낙망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현대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돈을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오자 안절부절 하면서 잠을 못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 멍청하네요. 내일 당신이 돈을 못 갚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못 잘 사람은 바로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잖아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음 가라앉히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빚진 돈이 있어도 갚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갚기는 하되 너무 걱정하지 말고 빚을 다 갚고 오히려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때를 소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신하 다윗의 인기도가 날로 치솟자 권좌에 위기를 느껴 다윗을 살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추격자’가 되었고, 다윗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불안초조해하는 사람은 쫓겨 다니는 다윗이 아니라 쫓아다니는 사울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육체는 때로 피곤했을지라도 그 영혼은 오히려 평안합니다. 

결국 사울은 훗날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접하는 여인을 찾아가 안전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갑작스런 풍랑에 시달리고 있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고 소리치며 무서워했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말합니다. 예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워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자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고 하셨습니다.(마14:22-31) 세상 바람이 아무리 거세어도 바람을 보지 말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참된 소망이신 예수,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삶으로 영혼이 안정되어 하나님 앞에 아주 값진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영혼이 평안하기 위해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시편121:1-2을 보겠습니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두려워 아니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떠한 환난 중에라도 하나님의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시46:1-3) 인생에 진정한 도움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항상 우리 연약한 인생들을 도우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라고 하는데 ‘Helper’,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공회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바로 성령이 스데반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행6:10-15)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 스데반이 결국 돌에 맞아 고통 가운데 순교할 때,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 우러러 보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는 말씀 그대로 스데반은 평안한 영혼으로 “(행7:59-60)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심령의 평안함으로 범사에 천사의 얼굴로 사시기 바랍니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하여 하나님 앞에 값진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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