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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은 시험을 참고 견디어 온전케 한다 (약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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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시험을 참고 견디어 온전케 한다 (약 1:1-12)


계속 매주일 신약성경 한 권씩을 강론해서 각 성경에서 성령 안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성령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성령의 삶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매주일 성찬상에서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은 분명 눈에 보이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말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성경의 영적, 육적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인데 세상의 구분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성령 안에 행하는 삶이 보이지 않고 신비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많은 교인들이 성령을 동원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대개 이상하고 신비한 체험과 경험을 말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성령안에 행하는 삶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성찬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각 자가 직접 자기 손으로 떡을 떼고 포도주 잔을 마시는 육적인 행동이 곧 영적 삶입니다. 옛 사람, 새 사람의 구분도 성경은 옛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를 구별시킴인데, 우리는 엉망으로 살다가 개과천선하여 새 사람이 된 경우를 말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의 교파를 막론하고 지배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진실한 성령 안에 행하는 삶은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르게 성령 안에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나타내어 한국교회 안에 바른 성령의 삶을 비추는 복된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1:12절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런데 예전에 성경개요를 할 때에는 3:13절의 말씀으로 주제를 말했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 때는 야고보서가 지혜서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혜를 중심으로 보았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시험, 시련, 인내가 그 중심이어서 주제구절을 바꾸었습니다. 

특히 야고보서는 믿음의 시련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시련을 통하여 온전케 됨을 이루는 것이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1:2-4절 서두에서부터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해라, 왜 기뻐하는가?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내를 이루게 되면 온전케 된다, 그럼 주님 오시는 날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을 견디어 내어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대하여 야고보서 끝부분인 5장7-8절에서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여기에서 ‘길이 참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서는 앞과 뒤에서 인내를 말하고 있으니 결국 그 주제가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12절의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주제구절로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주제를 야고보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1:1절이 암시해 줍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자로 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야고보서는 성도들, 집사들, 또한 어느 지역에 사는 성도들이라고 말한 바울서신과 크게 다릅니다. ‘흩어져 있는 12지파’라고 말합니다. ‘흩어진 12지파’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교회가 출생했으나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같은 핍박으로 말미암아 흩어졌던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2:1절에서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가졌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흩어져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좋습니다.

시험 가운데 인내를 이루어 온전케 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1: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6-8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하나님께 구하는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시대를 아는 지혜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임을 아는 지혜입니다. 

1:9-11절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는 고린도서에 있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처럼, 슬픈 자는 기쁜 자처럼.’ 즉 이 세상의 질서에 매이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질서는 풀의 꽃과 같이 떨어져 아름다운 모양이 없어지는 것같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전케 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상속하게 됩니다.

그럼 믿음의 시련에 대하여 인내하지 못하고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은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시험을 주셔서 그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만들어 올무에 사람들을 빠지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시험에 넘어지는 것은 순전히 자기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1:13-15절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은 속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욕심 때문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과 시대가 지나간다는 지혜가 있어야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속지 않도록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위로부터 주십니다.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모든 은사와 선물이 공급됩니다. 빛들의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1:17절 후반부에 ‘그는 변함도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는 변함이 없으신데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회전하는데 그림자가 없다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자기 몸을 회전시켜 보세요. 앞에서 빛이 비취면 뒤는 그림자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회전해도 그림자가 없습니다. 이 말은 앞과 뒤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1:5절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는 항상 빛이셔서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은사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새 피조물로 지으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지으셨습니까? 1:18절에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목적으로 지으신 것입니까?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지으셨습니다. 이는 욕심에 이끌려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았던 옛 이스라엘을 지으심과 달랐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시내산의 율법으로 낳은 백성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권세와 이방신에 대한 욕심에 빠져 죄를 낳았고 결국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빛들의 아버지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새 백성은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지 않도록 새로운 창조를 행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백성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이 새 백성에게 모든 은사를 공급하셔서 믿음의 시련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마치 창세기를 보는 듯합니다. 구약의 세계는 나누어짐의 세계입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었고, 땅과 바다를 나누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었고,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된 구약의 세계는 온전한 빛의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즉 회전하면 그림자가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인자와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여호와께서 보이셨어도 앞과 뒤를 다 보이시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모세는 여호와의 등만 볼 수 있었고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또 다르게 표현한다면 첫 창조된 세상은 두 마음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마음과 다른 한 마음이 있게 됩니다. 회전하면 그림자가 보입니다. 의심은 두 마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믿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신 새 창조된 백성은 나누어짐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일을 합니다. 회전하면 그림자가 없으신 아버지를 닮은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둘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만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은 빛과 그림자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듣고 행함이 다르다면 이는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앞이라면 행함은 뒤인데,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이는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듣는 것은 앞인데 회전하여 행함은 그림자여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듣는 것과 행함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는 자,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입니다. 

곧 예배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와 그 말씀으로 사는 때가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경건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이 말로만 하고 실천적으로 돕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건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회전하면 그림자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1:26-27절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세상에 물들어 있는 자는 세상을 섬기는 자이니 그 안에 둘이 존재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께서는 2:1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까? 이렇게 자기 입으로 말하는 자는 어떻게 사람을 대합니까? 차별이 없이 대합니다.

만약 부자가 빛이라면 가난한 자는 그림자입니다. 차별은 부자를 대할 때는 빛으로 대하고, 가난한 자를 대할 때는 그림자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닙니다. 빛들의 아버지,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신 분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 시작한 지 약 10여분 정도 되었는데 벌써 졸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조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빛과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2:2-4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부자는 영광스럽게 대하고 가난한 자는 어둡게 대합니다.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서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는 옛 세상 곧 구약 세계에 지혜로운 자가 될 수는 있어도, 새 세상 곧 신약 세계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믿는 것과 행함이 서로 다릅니다. 믿음과 행함이 같지 않습니다. 믿음이 빛이라면 행함은 그림자가 됩니다. 이것도 역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자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새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즉 사망이 지배하고 왕노릇하였던 옛 세계의 삶에 불과합니다. 

2: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새 피조물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습니까? 귀신들도 믿고 떨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믿고 있습니다. 단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허탄한 줄 모르시겠습니까? 허망한 사람은 헛되고, 헛된 사람은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 세계로 나누고 사는 사람입니다. 왜 허탄합니까?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옛 구약의 질서였습니다. 

그럼 이런 차별을 추구하는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3: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아무래도 선생은 말을 많이 하는 자입니다. 말이 많다 보면 실수도 많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선생이 된다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위치에 앉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과 랍비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말로써 남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일을 합니다. 말은 혀를 사용해서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하는 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혀 하나가 온 몸을 불사르게까지 한다고 말을 합니다. 즉 혀 하나 때문에 온 몸이 지옥에 갈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역시 빛과 그림자입니다. 찬송은 빛이라면 저주는 그림자입니다.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면서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합니다. 물샘도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 두 가지를 내지 못합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하나만 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를 비방하고 욕합니다. 그런 입은 온 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것이라는 점을 꼭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형제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일도 무서운 일인데 목사까지라도 아주 쉽게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라요! 결국 그 목표는 하나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의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차별을 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욕구는 차별에 있습니다. 일류, 이류 이런 말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고, 오직 일류를 이루기 위하여 삽니다. 이 일은 이미 마가복음을 강론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좇아가는 것입니까? 뭇사람의 첫째가 되고자 좇아가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뭇사람의 끝이 되고자 좇아가는 자가 주님을 바르게 따라가는 자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속히 듣고 성을 내기는 더디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을 듣자마자 속히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남에게 화를 내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어떤 화를 낼까요? 말씀에 비추어 금방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아주 잘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구약의 랍비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며 세리를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높음과 선생을 추구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와 다릅니다. 당연히 세상의 첫째가 되고자 하면 시기와 다툼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기와 다툼은 욕심 때문에 온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바를 좇아가려 하기 때문에 시기와 다툼이 오게 되고 그 시기는 바로 정욕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요, 세상이 부럽고 좋게 보여 벗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욕심이 발동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형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4: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이와 다릅니다. 3:17-18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다른 사람 위에 자기를 높여 자기 능력과 권세를 자랑하는 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화평으로 열매를 맺는 자가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갖고 사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신 분으로 자기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과시하고 높였습니까? 그는 십자가에 그렇게 죽지 않으셨습니다. 낮은 자, 곧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으로 죄인 아래 낮아지셔서 죄인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제물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을 자기 교만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특히 우리 구속사를 들으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자기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목사의 해석보다 좋다고 주저없이 아무에게나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높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게 하고 스스로 높아지게 하는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복종해야지 마귀에게 복종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아셔야 합니다. 마귀가 자꾸 우리를 세상과 벗이 되게 하여 높이려고 책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 동산의 뱀이 여자를 꾀임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망이 옵니다.

이런 믿음의 시련을 우리가 지금 겪고 있습니다.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에 우리가 나와 있습니다. 세상과 벗이 되게 하려는 악한 일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높음을 추구하는 일에 속지 마십시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4:8-10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가까이 합니까? 손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성결하게 할까요? 슬퍼하십시오. 애통하십시오. 우십시오. 왜요? 세상과 벗이 된 것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우십시오. 세상의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십시오. 세상의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그게 성결입니다. 세상의 웃음과 즐거움은 모두 일류 때문에 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말고 주 앞에서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심으로 하늘 보좌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지혜를 따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형제를 비방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4:11-12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형제를 비방하는 문제는 곧 형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재판관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데 형제를 비방함으로 하나님 자리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교만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만큼 형제를 비방하는 문제는 두려운 것입니다. 

여기까지 사도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직접적인 권면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 권면은 4:13절과 5:1절의 ‘들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먼저 허탄한 자랑을 하는 자에게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허탄한 자랑입니까? 

13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무언가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왜 허탄한 자랑입니까? 

14절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의 생명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인데 마치 내일 일이 오래 계속될 것처럼 바라고 계획합니다. 그게 허탄하다는 말입니다. 마치 곡간에다 곡식을 가득 채워놓고 ‘내 영혼아 평안하라!’고 했던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내일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 생명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의 바라고 원하는 꿈이 다 이루어지고 넉넉한 환경을 누리며 만수무강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생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허탄한 자랑에 대하여는 고민하고 여러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백성이라면 도리어 이런 말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4:15절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주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죽든지 살든지 이것 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하는데, 세상에서 이익을 보는 이야기만 늘어놓으니 이는 정말 허탄한 자랑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지혜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풀의 꽃도 떨어져 그 아름다움이 지나가는 것처럼, 자기 생명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정말 잠깐 왔다가 가게 될 터인데 그걸 알지 못합니다. 

회전하면 그림자가 없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도 모든 생각과 욕심은 내일 일에 있습니다.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살든지 죽든지 하나로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회전하면 그림자가 없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회전하면 자기 일을 구하는데 열심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4:17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자기 땅과 돈은 영원히 자기 소유가 될 줄로 압니다. 그래서 나이가 70, 80이 되어도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데 애를 씁니다. 죽으면 가져가지 못할 재산을 그 나이에도 얼마나 더 불릴 것인가 고민하고 궁리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시대의 갑부가 지금도 갑부입니까? 그 땅과 재산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저 부를 쌓기에 열심입니다. 오직 자기 뜻을 이루기를 바라고, 자기 성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은 부지런함을 덕을 삼습니다. 최선의 노력을 선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모든 노력과 부지런함이 헛수고에 그칠 뿐입니다. 

이제 부자에게 경고합니다. 

5:1절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왜 울고 통곡해야 합니까? 재물이 썩었고, 옷이 좀먹었으며 금과 은은 녹이 슬었습니다. 즉 썩고 없어지는 것을 위하여만 살았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도 고생이 임할 것입니다. 이런 부자들은 지혜가 없습니다. 말세인줄 아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재산과 재물로 영원히 이 세상이 계속될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세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품꾼의 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자신을 살찌웠습니다. 남의 것, 약한 자의 것을 탈취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부가 자기 살을 태우는 불이 될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과 다르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물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지나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세대가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길이 참아야 합니다. 마치 농부가 열매를 바라며 길이 참는 것과 같습니다. 5:7-8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과 우리는 다른 나라를 바라기 때문에 믿음의 시련을 당합니다. 흩어진 나그네처럼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은 길이 참는 것입니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습니다. 그리하여 인내로 온전하게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망입니다. 그래서 5:9절에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이만큼 참았는데 아직 주의 강림하심이 나타나지 않으니 원망이 나옵니다. 

원망도 비방과 동류입니다. 한 가지로 지속되지 못하고 바라던 열매가 아직 나타나지 않으니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회전하면 그림자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 자는 하나를 바라고 기다립니다. 그러니 앞과 뒤가 같습니다. 

목회를 이렇게 오래 했는데 왜 요정도밖에는 안되느냐고 원망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동안 열심히 성도들을 가르쳤는데 왜 이렇게 성장이 더디냐고 원망해서도 안되겠지요. 저 형제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원망이 나옵니까? 그 원망을 거두십시오. 끝까지 믿고 바라보십시오.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련을 겪고 나면 곧 열매가 있으며 온전케 될 것입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시련을 끝까지 견디어 내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면류관을 우리에게 상속케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옛 세상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구약 백성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 피조물로 지으신 빛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새 백성입니다. 회전하여도 그림자가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이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도록 온갖 좋은 선물과 은사를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가져오는 새 예루살렘 성을 기다리며 우리도 변함이 없는, 즉 앞과 뒤가 서로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개의 나누어진 삶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 생명이 하나입니다. 더 이상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내 뜻이 두 개가 되지 않고 하나가 되며, 내 남편이 둘이 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는 빛과 그림자로 나누임이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님을 회전시켜도 나타나는 모습은 자식 사랑, 오직 하나입니다. 그 인생을 다 회전시켜도 오직 자식을 위하여 아끼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빛들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이 모든 선물과 은사를 후히 주십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함이 둘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둘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욕심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경건과 삶이 나누이지 않습니다. 나누는 세상은 모두 구약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고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심으로 새 나라를 일으키셨습니다.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협력하는 존귀한 하늘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박해와 핍박에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로 끝까지 주님이 오르신 새 구원의 길을 우리도 따라 걷습니다. 

전도서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해 아래 있는 모든 일을 살펴서 가르친 지혜서입니다. 그 솔로몬 왕이 내린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헛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내일 일, 곧 미래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가 끝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볼 수가 없었습니까? 자기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단절이 되어 미래의 일, 앞날의 일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헛된 자랑에 그칠 뿐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믿음의 시련 가운데서, 세상의 유혹 가운데서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 안에서 새 시대를 보았기 때문이며, 부활하신 주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영원하 새 나라가 오게 됨을 압니다. 그러기에 길이 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세와 맹세가 아닌 삶이 나누이지 않습니다. 5: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맹세의 부분이 있고, 맹세하지 않은 부분이 있게 되면 이것 역시 두 개로 나누인 것입니다. 빛과 그림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다 진실해야 하는데, 맹세한 것만 지키고 맹세하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실제 구약 모델입니다. 오직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 우리의 병이 든 것도 실제 나누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다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질병이 그림자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림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장로들을 초청하여 회복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가 되게 하는 가장 큰 일은 바로 미혹되었던 자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5:19-20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이것이 가장 큰 열매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께서 가장 원하는 열매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이 가장 기쁨이었던 아버지의 마음과 같습니다. 자기 삶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오직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아름다운 삶이 귀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어둠의 길을 가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은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으로 헛된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교회를 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많은 교회가 아직도 저 옛 세상, 구약의 나라를 바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세의 가르침에 미혹되게 합니다. 그런 교회를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으로 봉사하여 돌이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길을 함께 변함이 없이 걸어가십시다. 그리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십시다. 믿음의 시련 가운데 지혜를 구하여 인내로 온전케 되어 주님의 얼굴 앞에 서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때문에 미혹을 당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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