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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자리에 앉으라 (눅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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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자리에 앉으라 (눅 14:7-11)


저는 “동물의 세계”라는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편입니다. 동물의 세계 안에서 세상을 보는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이 두 마리 이상 함께 모이면 꼭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서열을 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두머리를 정하고, 그 다음 서열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서열에 맞는 대우를 주고받습니다. 예를 들어 먹이가 생기면 우두머리가 먼저 먹습니다. 짝짓기 때도 대부분의 암컷은 우두머리 수컷 차지입니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에서는 우두머리가 되려고 치열한 싸움이 계속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서열을 정합니다. 대개는 사회의 합의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위가 높다든지, 나이가 많다든지, 그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처럼 힘겨루기나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서열이 합의하에 정해지면 대우가 결정됩니다. 특히 자리가 달라집니다. 대개는 서열에 따라 자리에 이름을 붙여놓아서 앉는 자리를 정해 놓습니다.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을 때 눈치껏 자기 자리를 찾아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상석은 오른쪽이고, 또한 앞쪽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관례로 자리가 정해져있습니다. 예를 들어 긴 탁자나 원탁의 연회석일 경우 안쪽 가운데가 상석입니다. 길을 걸을 때도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두 명이 걸을 때는 오른 쪽이 상석이지만, 세 명이 걸을 때는 중앙이 상석이고 오른 쪽이 2석, 왼쪽이 3석입니다. 네 명이 걸을 때는 가운데에서도 두 명중 오른 쪽이 상석입니다. 또한 엘리베이터에서도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문을 향하여 왼쪽 구석이 상석이고, 조작판이 있는 앞 쪽이 말석입니다. 자동차에도 상석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도 세단이냐 지프차냐에 따라 다릅니다. 온돌방에도 상석이 따로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에 이런 관례를 잘 몰라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후배 선교사들이 부임해 오면 빼놓지 않는 당부가 있습니다. 바로 선교사들이 선교하려고 할 때 상석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의 방에 들어가 선교할 때, 꼭 말석에 앉아서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갓이 걸려있는 벽 쪽이 상석이고, 그 반대편이 말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안에는 저마다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는 “자리”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분수에 맞는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질서에 일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루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이런 안간힘을 쓰면서 서로 경쟁하고 다툽니다. 이것이 바로 자리다툼입니다. 이 자리다툼이 우리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도 바로 이런 자리다툼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으셔서 참석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리스-로마 문화에 널리 퍼져있던 소위 "심포지움" (symposium) 형태의 모임을 즐겼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형태의 모임에 초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심포지움 형태의 모임은 주인이 주요 손님을 청하고, 몇 몇 가까운 지인들을 청해서 먼저 식사하고, 다음으로 술과 음료를 마시며 대화 즉 종교, 철학, 정치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모임입니다. 대개 작게는 3명에서부터 9명까지 손님들이 초대되었습니다. 그 자석은 대개 U자 형태였습니다. 가운데 중앙에는 주요 손님이 자리하고, 그 주위로부터 나름대로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날의 모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주요 손님으로 청해서 심포지움의 모임이 형성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상석으로 모시지 않고, 참석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우두머리를 그 자리에 앉게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청년이었고, 지위도 낮은 상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모임 성격상 당연히 상석에 모셨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자리에서 서로 간 앉을 자리에 대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

본문 14: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손님으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주요 손님으로 가장 상석에 앉아야 할 예수님을 제쳐놓고 자기들이 앉으려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들이 앉아야 할 적절한 자리보다 더 상석에 앉고자 신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리를 탐하는 모습은 본문의 유대 지도자들뿐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은 타락한 인간의 교만함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된 타락한 인간 본성의 한 특징이 된 것입니다.

창 3:5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하와를 미혹하며 한 말입니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을 부추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인간은 교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교만한 존재인 사탄의 미혹에 넘어간 뒤 아예 교만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주요한 특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예인 인간의 그 본성 깊은 곳에 교만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이런 인간의 교만한 본성이 다음 네 가지로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지적인 교만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배워서 알게 되면, 그 지식을 통해서 교만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많이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둘째, 영적인 교만입니다. 신자들이 남다른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체험을 통해서 교만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체험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셋째, 권력적 교만입니다. 사람이 남다른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가진 권력을 통해서 교만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이 갖기 힘든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넷째, 도덕적 교만입니다. 사람이 남들과 비교해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면, 그 흠이 없다는 것을 통해서 교만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과 다르게 도덕적으로 흠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기 전의 인간입니다. 아직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 말씀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그날 설교를 잘했다고 생각이 들더랍니다. 교인들 반응도 좋았고 자기도 무척 만족스러웠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배당 입구에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장로님 한 분이 다가오셔서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좋았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설교를 마치자마자 마귀가 ‘너 오늘 설교 참 잘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우리의 교만한 본성을 자극합니다. 우리 스스로 부풀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자리를 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끝자리에 앉으라”

예수님께서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자리를 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를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라” 높은 자리에 욕심을 내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기를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만이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토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연회석에 가면 상석을 주목하고, 할 수 있으면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느 정도의 자리에 앉아야 할 지 알면서도, 할 수 있으면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끝자리를 주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끝자리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자리를 찾아가서 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교만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교만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나도 몰래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내 마음 자체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교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세상을 거꾸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앞자리를 좋아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부러라도 끝자리를 좋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받는 자리를 탐하고 인정받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바란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피하는 자리를 찾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지은 [영적 성장의 길]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군가 알베르트 슈바이처에게 물었다. "왜 여행을 하실 때마다 삼등석을 이용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아주 명료했다. "사등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명문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간디가 이끄는 공동체에 와서 살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그의 보직은 변소 청소였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간디에게 항의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저는 큰일을 할 수 있다고요." 간디가 대답했다. "자네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네. 내가 모르는 건 자네가 작은 일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걸세."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교만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끝자리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끝자리를 찾아 앉으려고 해야 합니다.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은 미국의 페스탈로찌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공교육의 필요성을 처음 주창하고 구체적으로 공교육의 제도화의 길을 연 사람입니다. 이 분은 정치가로서도 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원의원과 상원의원까지 지냈습니다. 모두가 정치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공직을 다 내려놓고 신설된 어느 지역의 교육위원회 의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왜 좋은 자리를 내려놓고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이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자리가 제게 낮은 자리라면 제 임무는 그 자리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겠지요. 저는 그 자리를 통해 명예를 얻기보다 그 자리에 명예를 주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를 찾기 보다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높은 자리가 되도록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리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리를 빛나게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그 자리가 끝자리이지만 장차 그 자리가 좋은 자리가 되도록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이 앉는 자리는 그 자리가 높은 자리여도 끝자리처럼 되고 맙니다. 그러나 교만을 극복하고 겸손을 드러내는 사람이 앉은 자리는 그 자리가 끝자리여도 높은 자리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아름다운 반전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반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추한 반전입니다. 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사람이 교만을 극복하지 못하고 높은 자리를 탐했습니다. 자기가 앉을 자리가 아닌데 높은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나중에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왔을 때 주인이 와서 자리를 내주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반전입니다. 10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사람이 교만을 극복하고 끝자리에 앉았습니다. 자기가 앉을 자리가 아닌데 낮은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높은 자리로 안내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한다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이 끝자리에 않는다고 언제까지나 그 사람이 끝자리에 않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반전이 있습니다. 

그 반전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반전을 이루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반전입니다. 바울은 그 아름다운 반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물리친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십니다. 일부러 끝자리를 찾아 앉는 사람들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을 높은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 사람을 세우십니다. 바로 아름다운 반전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반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교만의 뿌리가 남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여라도 이 교만의 뿌리가 살아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적극적으로 끝자리에 앉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아름다운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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