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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번의 배신, 세 번의 사랑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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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배신, 세 번의 사랑 (요 21:15-17) 
 

1. 사랑의 배신

성도 여러분, 혹시 이 노래를 아십니까? “betrayer, betrayer, betrayer of love!” 아주 오래전 배호라는 가수라 불렀고, 나훈아, 현철이 부른 <사랑의 배신자>라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사랑의 배신’이라는 것은 이 노래 가사처럼 달콤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이야기입니다만, 70년대 초반 직업군인으로 월남전을 다녀온 한 남자가 자기가 집을 비운 사이 부인이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알고, 함께 살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무시하는 행동을 했었는데, 부인은 그런 남편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욕을 하든지, 때리든지, 아니면 이혼이라도 해주면, 내 탓이니까 감수하면서 살겠는데, 같이 살면서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하다.” 그 남편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부인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사랑의 배신자에 대한 복수는 이보다 더 심각하고 지독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배신의 파국은 비극적입니다.

사랑의 배신이라고 할 때, ‘배신’이라는 말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배신이란 이미 믿음이나 의리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즉 믿던 사람, 꼭 의리를 지킬 것 같던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배신이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예 기대가 없었으니 배신이랄 것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드물고, 의리 있는 사람이 드문 이 각박한 세상에서 배신을 당하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제가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의 배신자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어쩌면 그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배신은 극복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배신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떠 올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를 ‘사랑의 배신자’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관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 즉 베드로는 스스로 주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사랑의 고백을 함으로서, 예수님을 향해 제대로 된 사랑의 고백을 한 최초가 되었고, 또 그 자신 역시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한다고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성경의 배신자 중 첫 번째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먼저 그 배신의 현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어쩌면 주님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가 될 지도 모를 최후의 만찬, 그 자리에서의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 등으로 다들 마음과 생각이 복잡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2:61). 그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도 또 주님 곁을 떠나지도 않겠습니다!” 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재판을 받을 때, 그 곳으로 잠입하듯이 따라간 베드로는 거기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 관사의 문지기인 어린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 어린 여종의 말을 부인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온이 뚝 떨어진 밤 대제사장의 뜰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사람들이 그 둘레에 서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베드로가 그 무리에 끼어들자 불빛 때문에 사람들은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들 역시 베드로를 향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베드로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에는 더 확실한 증인이 등장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체포하러온 武裝軍人들 중 한 사람인 ‘말고’의 귀를 칼로 베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시면서 그의 귀를 기적적으로 붙여주셨는데, 바로 그 ‘말고’의 친척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역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막14:71).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습니다(눅22:61,62).

베드로는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크냐” 라는 논쟁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가장 큰 자, 제자들의 선두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듯 주님도 종종 베드로에게 리더로서의 책임을 지우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했고, 자신도 그런 주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번의 否認 事件>은 그의 사랑에 대한 自信感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부인하다니! 그것도 주님이 묶여 계신 그 현장에서! 아마 주님은 당신을 부인하는 나를 보셨을 것이고, 내 목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주님인데! 나 또한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자신만만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베드로의 배신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든 것은 주님의 復活이었습니다. 차라리 주님이 돌아가심으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래도 덜 미안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부활하실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어린 계집종 앞에서까지 주님을 “모른다”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로서는 주님의 부활이 확실하면 할수록 더욱 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기가 왠지 어색해지고 그럴수록 더욱 더 주님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는 느닷없이 자신은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습니다(21:3).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감격적인 부활의 계절에 왜 베드로는 난데없이 갈릴리 바다로, 물고기 잡는 어부로,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을 만나셨고, 상처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심지어 도마는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지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은 확실하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이 확실하면 할수록 베드로는 자신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것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는 점점 어색해져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색함과 불편함을 견딜 수 없었던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했고, 베드로의 심정과 별 다를 바가 없었던 다른 제자들 역시 거기에 동조하여 갈릴리 바닷가로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치듯 간 갈릴리 바닷가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한참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서서히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찾아오는 그 시각에, 저 멀리 호숫가에서 한 사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쳐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때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은 그 음성에 순종해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뭍에 서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신 분이 누군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시라” 하고는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21:7). 그때 배와 뭍의 거리는 약 50칸, 즉 91m 정도였기 때문에(21:8), 꽤 먼 거리였고 바다도 깊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치 정신 줄을 놓은 사람처럼 바다로 뛰어들어 뭍에 계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왜 베드로는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지금 그에게 일어난 일은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11절에 나오는 사건, 즉 자신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 같았습니다. 갈릴리 바닷가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그날도 밤새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었는데, 허탕을 치고 내일을 위하여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이미 해가 중천에 뜬 낮 시간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시간, 고기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곳에 그물을 던지라 하신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 아니 배를 한 척 더 불러 물고기를 실어도 두 배 다 가라앉을 정도로 滿船이었던 그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고, 그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은 자신을 향해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면서 자신을 제자로 불렀습니다. 바로 그 사건과 똑 같은 상황이 다시 한 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베드로는 바로 그곳에서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빈털터리로 헛수고만 하고 있던 새벽녘,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그 주님으로 인하여 豊漁를 경험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배신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도망치듯 주님을 떠나왔으나, 주님은 그런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기에 몸소 갈릴리 바다까지 찾아오신 것을요! “나는 주님을 배신했지만,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한결같으시구나!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데, 주님은 배신자인 나를 이미 용서하셨구나!” 바로 이런 깨달음과 감격으로 그는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바다로 뛰어 내린 그가 걸었는지 아니면 헤엄을 쳤는지는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뛰어내리더라”는 말은 자신의 몸을 바다로 내던졌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옛날처럼 바다 위를 걸을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그때처럼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리고 자신의 첫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에 감격해서 배를 호숫가에 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을 곁에 두고서도 그 주님을 아예 의식도 하지 않은 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다 보시고 다 듣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보지 않는 것처럼, 듣지 못하는 것처럼, 함부로 살고 막 살고 무시하면서 살지는 않았습니까? 베드로의 3번의 否認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갈릴리 바다로 떠난 모습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저와 여러분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죄송하여 숨어있는 그곳까지 주님은 찾으셔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이 주님을 갈릴리 바다의 베드로처럼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의 배신을 치유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갈릴리 바닷가로,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두 사람의 첫 만남과 거의 동일한 상황을 연출하심으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오신 사랑의 주님 때문에 물불 안 가리고 바다로 뛰어들 정도이지만, 그러다가 또 다시 어려울 때면, 삶과 사역의 고비를 만나면, 주님을 의심할 것이고 또 다시 배신할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럴 가능성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지요.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삶에 더 이상의 否認과 背信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확실한 장치를 마련해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려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은 그들은 그 물고기 반찬과 함께 주님과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사랑한다”는 말은 성경 원어로 ‘아가파오, αγαπαω’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는 물음이었던 것이죠. 

‘아가페’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獻身的이고 犧牲的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아가페 하느냐?’고 물었다는 것은 ‘베드로야,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세상 그 누구보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나만을 사랑하느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이 더 크고 깊으냐?’는 질문이었지요. 
그리고 이 질문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를 진심으로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뜻도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아가페’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질문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 성경에는 질문과 대답이 동일하게 ‘사랑’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 베드로는 주님이 물었던 질문과는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아가페’라고 물었는데 ‘필레오, φιλεω’라는 엉뚱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필레오’는 ‘신앙이나 성령의 감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신앙적이고 영적이기보다는 전혀 비신앙적인 인간관계로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고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정말로 사랑하니?” “아니요, 그저 좋아할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두 번째로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도 예수님은 ‘아가페’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두 번째 대답 역시 첫 번째 답과 같이 ‘필레오’였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말귀가 어둡고 머리가 나쁘고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고, 함께 죽겠다고 했으나 따라 죽지도 않는 등, 큰 소리만 ‘탕 탕’쳤지 실속이라고는 없는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와 같은 ‘아가페’ 사랑으로는 도저히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보다 훨씬 낮은 차원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필레오’로 대답한 것입니다. ‘주님, 前 같으면 자신 있게 주님을 ’아가페‘한다고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저의 사랑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세 번째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 “사랑하느냐”는 ‘필레오’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마지막 질문에 가서 “그래, 베드로야! 나도 네 식으로 물어보마.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는 하는데, 그 말만은 진심이니?”라는 뜻으로 ‘αγαπαω’가 아닌 ‘φιλεω’로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이죠. ‘그래, 좋다. 네가 나를 아가페할 수 없다면 네 수준인 필레오로 물어볼까? 정말 나를 필레오하는 것은 사실이니?’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하고, 우정이라고 하는 그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하기는 하냐?’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17). 이 말은 ‘주님,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왜 자꾸 어려운 답을 요구하십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이런 실패자 배신자의 모습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으실 때 각각의 단어가 달랐다는 것이나,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답했으나 주님이 물으신 것과 다른 답을 했다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혹은 내 양을 치라”고 세 번 말씀하신 것 등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3”이라는 숫자이지요. 왜 예수님은 똑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의 3번의 부인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대로 주님은 자신의 사랑을 세 번 나타내신 것이고, 또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세 번 물으신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보다 용서와 사랑을 담으신 주님의 세 번의 질문이 더 크고 깊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기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신의 배신과 혹시 앞으로 그보다 더한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임을 이 세 번의 질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설사 내가 다시 주님을 배신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그때도 지금처럼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아멘?

4. 우리의 배신보다 더한 주님의 사랑

말씀을 맺겠습니다.

프랑스 작곡가 조루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는 1875년, 오페라 <카르멘, Carmen>을 발표했습니다.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라는 마을입니다. 당시 세비야에는 집시들이 많이 살았는데, 카르멘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여자 카르멘은 호세라는 남자를 유혹하여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그에게 싫증을 느껴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카르멘에게 버림받은 호세는 ‘제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다가 이를 거부하는 카르멘을 죽이고 맙니다. 이것이 오페라의 끝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는 지금도 아침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 등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주제이고 내용들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한 아이 딸린 이혼녀가 재벌 상속자이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자기만 사랑해주는 남자랑 결혼하는 것으로 전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이 뻔한 스토리들이 지금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뻔한 스토리가 TV와 드라마 등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도 사랑의 배신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시와 외면과 배신의 드라마일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대부분의 만남, 대부분의 일에서 주님을 새까맣게 잊고 살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았던 베드로의 배신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배신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우리를 주님은 부인하거나 배신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인생을 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오른편에서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활약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그리고 많이 사랑한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계집종 앞에서까지 주님을 부인함으로서, 일시에 실패하고 풀이 꺾여 도망치듯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했고, 자신이 미워 아예 모든 것을 잊고 체념해 버린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세 번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요. 

첫째는 ‘처음 너를 부를 때처럼 나는 여전히 너 베드로를 사랑한다. 내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함으로서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 역시 회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과거 네가 얼마나 열심이었고, 얼마나 뛰어났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네가 나를 부인하고 배신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네가 지금 너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으며,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첫 사랑이 회복되기를 내가 기다린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어리석음보다 더 지혜로우시고, 우리의 둔함보다 더 민첩하시고, 우리의 배신보다 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사랑하지 않음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배신자, 실패자 베드로를 친히 찾아가신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친히 찾으셔서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실패한 베드로를 보기보다는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신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해 세 번이나 사랑한다 하시고, 그의 사랑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시는 그 음성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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