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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르밧의 기적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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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의 기적 (왕상 17:8-16)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인과 엘리야와 그 여인의 식구가 여러 날 동안 먹었지만,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 세계성찬주일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세계성찬주일(World Communion Sunday)입니다. 1936년 미국의 장로교에서 시작된 이 주일은 1940년 이르러 다양한 교파들이 동참하면서 교회력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교파들이 동참하게 된 까닭은 그 전해에 벌어진 제2차세계대전의 여파일 겁니다. 평화와 정의가 무너지고, 공포와 두려움이 세계를 갈라놓고 있는 상황에서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재확인하고,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할 소명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살과 피를 인류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성찬을 전례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오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당장 전쟁 상황에 있지는 않다 해도 왠지 모를 불안감과 공포가 의식을 파고들어 우리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마치 안개처럼 우리를 휩싸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상황을 ‘유동하는 공포’라고 표현했습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항변했던 가인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아벨은 또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1991년 지리산 뱀사골에서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홀연히 세상을 등진 시인 고정희는 <이 시대의 아벨>이라는 시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세상과 교회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그리고 시인은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라고 노래합니다. 잠들지 못하는 아벨의 울음을 듣고 있습니까? 이 시대의 아벨들은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서남아시아에서, 북한에서, 그리고 부유한 나라의 그늘진 땅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들은 변변한 교육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지속적인 영양도 공급 받지 못하고,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아벨들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놓으셨습니다. 예수 정신의 알짬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성찬은 매우 중요한 의례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찬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을 행하는 것은 우리도 또한 예수적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 함께 사는 세상의 꿈

오늘 저는 일견 성찬과 무관해 보이는 본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찬의 정신이 이 본문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 그러니까 주전 9세기 중엽에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인 아합은 성경에서 대단히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그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왕상16:30) 성서 기자는 아합이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도 세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터 위에 세운 국가 정체성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아합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립니다. 몇 해 동안 비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전하고 엘리야는 요단 강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가뭄이 깊어져 시냇물마저 다 마르자, 하나님은 그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시돈은 지금의 레바논 땅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성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땔감을 줍고 있던 한 과부를 보고는 마실 물 한 그릇을 부탁합니다.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갈 때 엘리야는 여인을 다시 불러 세우고는 염치없는 부탁을 합니다. 먹을 것을 조금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으뜸가는 의무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좀 당황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은 나그네에게 자기 처지를 설명합니다. 어쩌면 울먹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밖에 없는 데, 이제 막 땔감을 구해다가 아들과 함께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기를 기다리려던 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일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시돈에 과부가 그 여인 하나뿐일 리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직관적으로 이 여인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여인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문제는 여인이 남을 도울 처지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여인에게 마치 포고령을 낭독하는 것처럼 아주 엄숙하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13-14)

참 몰인정한 부탁이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염치없는 나그네의 가슴이라도 쥐어뜯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은 엘리야의 말대로 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이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기대를 걸고 이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입성이 험하고 피골이 상접한 그 나그네의 처지가 자기와 다를 바 없다는 고통의 연대가 그런 헌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요?

• 먹이고 싶은 마음

권정생 선생은 어린 시절 거지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핵환자였던 그의 존재는 딸을 출가시켜야 했던 아버지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권정생에게 누이를 시집보낼 동안 잠시 밖에 나가 살다 돌아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 일대를 떠돌면서 유랑걸식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 조그만 식당집 아주머니, 가로수 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다 물을 길러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 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도, 배 삯이 없다니까 그냥 강을 건너 주시던 뱃사공 할아버지도 좀처럼 내 기억엔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220쪽)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어도,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준 그분들의 사랑 덕분에 권정생은 시린 영혼들을 덮여주고, 마음의 양식에 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화수분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랑은 이처럼 기적을 낳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산 속에 살던 한 선사가 어느 겨울날 길을 가다가 너구리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배가 등에 붙어 있는 너구리의 시체 앞에 퍼질어 앉아 배낭의 먹이들을 다 풀어놓고는 엉엉 울었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 즉 ‘먹이고 싶은 마음’이라 썼습니다. 시가 ‘먹이고 싶은 마음’일진대 믿음이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의 본문에서 밀가루가 줄지 않았던 뒤주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던 병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촛불은 다른 초에 불을 붙여줘도 불꽃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낳습니다. ‘먹이고 싶은 마음’이 우리 속에 있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오늘은 기독교 역사가 낳은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성자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난 날(1226년 10월 3일)입니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예수와 만난 후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등지고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비웠기에 그에게서는 생명의 향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 향기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생명의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먹이로 내놓으신 주님의 마음을 절실하게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딱한 나그네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음식을 내주었던 여인의 마음을 회복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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