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롬 4:1-8)

  • 잡초 잡초
  • 614
  • 0

첨부 1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롬 4:1-8)

   
우리 목사님들도 모이면 많은 분들이 다른 목사의 실수나 실패를 가지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나와 너 할 것 없이 모두가 인격이 모자라고 품성이 완악하고, 역시 추한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남을 정죄하면서 손가락질 하였는데, 사실 더 많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너는 더 위선자, 너는 드러나지 않은 죄인, 너는 실행에 옮기지 못한 죄인, 너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영혼을 인도하는 목회자로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아니라, 안 된다고 단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머잖아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가 그지없고,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죄라는 것은 우리의 체면을 잘 살려주고, 우리를 얽어매는데, 이런 죄에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고, 점점 더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고 맙니다.  이 죄를 다 회개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죄 문제를 말할 때마다 나 자신의 죄를 말하고 나의 죄를 들여다보고 나를 정죄하면서 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고 다른 사람의 작은 죄를 가지고 정죄하고 심각하게 문제 삼는 것은 내가 그보다 더 큰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죄라는 것은 정말 작은 죄를 용납하는 것으로 큰 죄인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과도한 욕심이 일어날 때에, 그것을 억누르고 자제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의 유리창도 깨진다고 합니다. 이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됩니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였는데, 그 지역이 황폐해지고 공동화되고, 범죄의 온상으로 깡패들이나 출입하게 되고,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한 사람이 있는데,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란 사람이 1982년에 발표한 이론입니다.  이것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라토가스 대학의 겔링 교수는 이 ‘브로큰 윈도우’ 법칙에 근거해서 뉴욕 시의 지하철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철저히 지우는 것을 제안했다.   낙서가 방치되어 있는 상태는 창문이 깨져있는 빈집이나 방치된 자동차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시에는 무려 5년 동안에 걸쳐 6000대의 지하철 차량의 모든 낙서를 지우면서 범죄를 줄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하철 범죄의 75%를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다 보면 더 심각한 범죄가 생겨나고, 우리말 그대로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산지석을 삼아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작은 실수를 크게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하나님에게 맡기도 나의 죄와 실수는 아주 크게 볼 수 있어야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원하시면, 이렇게 우리의 죄는 크게 보고, 아파하고 즉시 회개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공로주의, 율법주의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공로주의,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우리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려면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만한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공로주의,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은 잘 믿어보려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게 됩니다.

목사님들이 모여 말씀을 연구하고 받은 은혜를 나눌 때에도 그 중에는 공로주의와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음을 봅니다.  “그렇게 믿어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물론 주님의 말씀을 권면과 경계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런 경고가 결코 십자가의 은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전도하다보면 사람들에게 진단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저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고 남을 위해 선한 일을 하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성실하게 살고 남을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공로주의, 율법주의 선한 행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선을 하고, 적선을 하고, 인생에 대해 깨닫기 위해 깊은 사색에 빠지고, 세상적인 욕심을 다 내려놓고 신적으로 존재가 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욕심을 다 내려놓는다고 하였는데, 자존심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교만한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구원받으려는 자세는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양심에 좀 걸리기는 해도 이러 이런 것은 죄라고 확정해주어야 하는데, 율법이 있어야 죄는 죄로 확정되는 것입니다. 

롬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점점 죄를 죄 되게 해주고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절대 무능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틀린 이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그대도 잘 보이고 사람답게 살았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소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보내실 때에 누구는 구원하지 않고, 누구는 구원하기 작정하시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아서 문제지 주님의 대속의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롬3:22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님에게 모든 죄악을 짊어지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후의 위대한 단어입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시는 호의요, 분에 넘치는 하사품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무조건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구원받으려면 그래도 무엇이라도 드려야 하고, 받을만한 사람이 되고, 구원이 그렇게 값싸게 준다고 하니, 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값을 받으라고 대드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선언을 내리시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쉬워서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 구원받을만한 그릇이 준비되든지, 내가 조금이라도 구원받기 위하여 무슨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짜라면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구원받는 데는 공짜로 주신다고 하여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때에, 그래도 하나님 앞에 무엇이라도 내놓을 만한 것이 있으면 가지고 나와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다면 거부감 없이 수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무엇이라도 내어놓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무엇이 있을까, 내가 세상을 살면서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고, 욕하지 않았고, 바르게 살고, 누구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받지도 못하였고, 지나가는 거지에게 1천원짜리 지폐를 던져준 적도 있는데, 여전도회가 고아원에 간다고 할 때에 돈 만원 낸 것이 있는데, 이것저것 다 생각하면서 구원받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빠짐없이 말씀드려보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앞에 무조건 믿으라, 받으라,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지은 죄와 심판 때문에 두려워하는데 그 죄의 심판은 아들 예수님,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에게 다 물었으니, 예수님만 믿으라,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영접하라, 예수님만이 구원을 위하여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면 그는 구원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약이라고 하면 그래도 내 몸을 위한 것인데, 약 값이 좀 비싸야 약효가 있지, 1천원에 몇 개씩 주는 약이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약이 될 것이냐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소화제로 ‘건위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값싼 약이었습니다.  돈 천원만 가지고 가면 아주 많이 주었습니다.  

이 구원이란 약은 사람을 살리는 약입니다.  죄 없는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어야만 살릴  수 있는 구원이기에,  공짜로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값으로 살 수 없는 약,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생명을 드려야 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로 그냥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어떻게 값을 매기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이라도 온 천하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값으로 따질 것입니까?  

이 세상에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값을 매기지 않습니다.  공기, 물, 땅 햇빛 이런 것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그냥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역시 아들의 값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가 받아야 하는 모든 형벌을 이미 우리 주님께서 받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없이 많으신 긍휼하심을 따라 은혜 중에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가 고귀하고 행실이 아름다워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잘 준행하여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 자신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의 죄 때문에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의 마음을 엽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마음에 좌정하셔서 저의 구주가 되어주십시오.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저의 생명이십니다.  이제 제가 사는 이유는 예수님이 저의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 이제부터 저는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명예의 전당에 가장 먼저 등록된 인물이요,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의인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이런 저런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의인의 본보기로 아브라함을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대인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것이 어떤 그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분의 생애는 우리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으며, 그는 믿음의 조상이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하는 위대하신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가 고상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란 분은 믿음의 조상이요,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깨끗하고 정직하고 죄가 없으므로 하여 의롭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 그는 정말 자랑스러운 사람이요, 자기를 내세울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단언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같이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절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아보려면 창세기15:6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행동이 바르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거나 공의로운 사람이기에 그를 의롭다고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대하여 말하거나 연구할 때는 어떤 사건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지 말고, 그의 전체를 놓고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유명하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대하여 말할 때에는 창세기15:6의 한 말씀만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루터가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언제나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창12장에서 고향을 떠나는 것이나, 창22장에서 나오는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복종하여 결단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의를 순종의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롭게 보시고 있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의 말씀 때문에 어떤 기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긴 바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믿음’과 ‘의’는 동등한 관계로 봅니다.  “여긴다”는 말은 평가한다, 간주한다, 계산한다는 말입니다. 

4-5절을 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노동자를 예로 들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을 시켰으면 돈을 주어야 합니다. 일한 사람에게 노임을 주는 것을 마땅한 일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일을 하였으면 채권자가 되고, 주인은 당연히 돈을 주어야 하는 채무자가 됩니다.   내가 일해서 돈을 받는 것처럼 내가 열심히 믿고 노력하여 얻은 구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구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노력한 결과가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엡2:8-9의 말씀이 이것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엡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6-8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므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따지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지도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데, 경건하지도 않은 죄인인데,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해도, 죽음의 고통이 닥쳐와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넘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