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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만'과 '또한' (빌 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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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과 '또한' (빌 1:27-30)


두 젊은이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은 화려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너무도 잘 생긴 멋진 선남선녀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미스코리아 같았고, 신랑은 너무도 늠름하고 잘 생긴 왕자님 같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들 부부는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태어난 아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아기가 태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기를 낳고 보니 떨어진 메주 같았습니다. 조금 크면 예뻐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기의 얼굴은 전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기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닮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불화가 깊어질 때 주변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으라고 했고, 검사 결과 친자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기 얼굴이 엄마 아빠와 다른가 했더니,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아기는 단지 원판불변의 법칙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아기는 부모의 얼굴 원판을 정확히 닮은 죄 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결혼식장에서 그렇게 멋져 보이던 두 사람의 얼굴은 원판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 모두 성형외과에서 리모델링한 얼굴이었습니다. 둘 다 가짜였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가짜 얼굴에 반해서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난 잘 생기지 못했어도 저 사람이 잘 생겼으니, 아기도 예쁠 거야>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이 얼굴이 안 닮았거든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히 아내나 남편의 지금 얼굴이 원판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디 성형외과 생산품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가짜 투성이입니다. 본래 원조는 하나만 있는 것인데, 골목 하나에 원조집이 여럿 있습니다. 어느 집이 진짜고 가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짝퉁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가짜는 세상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도 가짜가 있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가짜가 많습니다. 이런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비웃은 다음과 같은 글을 보십시오. 

<시끌벅적 현란한 조명 속에 춤 덩어리들이 흐느적거리는 음침한 곳에서 ‘주님 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하며 거품을 걸친 잔을 높이 드는 사람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에 은혜를 받고도 전철의  비좁은 자리를 비집고 남산만한 궁둥이를 디미는 이들과, 어쩌다 빈자리가 개펄처럼 드러나면  ‘권사님!‘을 소리쳐 불러대는 예수쟁이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을 부르며, 입맛대로 양식을 골라먹는 십자가 처마 밑, 모두 가짜이기는 마찬가지다.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의 길에 서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폼잡으면서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소리치는 웃기는 가짜들이 십자가 밑에 너절하다. 죽었으면서도 살았다고 큰소리치는 가짜 생명, ‘세상에 저것도 목사야. 저것도 집사야, 무슨 교회가 저래?’라며 가짜 같은 자이면서도 진짜로 행세하는 곰탱이 같은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그리고 그 가짜 생명들은 손가락에 힘주어 나를 지목하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삼킬 듯이 말한다. “너 가짜지?”> 

이 글은 교회를 비웃는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뜻밖에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한 목사님의 날카로운 자기 반성적 글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된 기준에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맞춘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저는 옷을 대충 입고 다닙니다. 그러다 보니 어울리게 입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제가 처음 입은 양복은 밤색 줄무늬였는데, 점잖은 색으로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그 양복을 입고 교회에 가면 선배 누님들이 제가 쉰 살은 되어 보인다고 놀렸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 무렵에 양복을 한 벌 더 사게 되었는데, 그 때는 만회하기 위해 튀는 색을 선택했습니다. 무슨 색이었을까요? 그건 메뚜기처럼 초록색이었습니다. 초록색, 그것도 제게 어울리는 색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옷과 사람 중에서 옷에 사람을 맞춰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람에 옷을 맞춰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에 옷을 맞춰야 합니다. 사람이 작으면 옷도 작아야 하고, 사람이 뚱뚱하면 옷도 넉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본질이고, 옷은 그 사람을 꾸미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적 세계에도 이런 원리가 존재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과 복음, 이 중에서 무엇이 무엇에 맞추어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가 복음에 맞춰야 합니다. 복음을 확대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말씀에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말씀은 우리가 그에 맞춰야 할 기준입니다. 

반대로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 전 주님을 좋아합니다. 주님은 멋쟁이에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 주님 팬클럽에 가입했어요. 그런데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요즘 많이 바쁘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매주일에, 또 수시로 예배에 오라고 하시니, 제 현실에 안 맞아요. 그리고 언제 전도하고 봉사합니까? 그건 힘듭니다. 또 저 요새 수입도 줄었는데, 어떻게 그 사람까지 돕겠어요? 선교헌금 드린 것으로 봐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당신께서 읽으라고 주신 그 책, 성경책을 보니,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좀 많던데, 제가 좀 수정해서 제 방식대로 해도 괜찮겠지요.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이러면서 말씀을 수정하고 해체하여 자기에게 맞추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자기 스스로 성경을 만들고, 거기 <내가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될 것입니다. 따져보면 우리 모두가 <내가복음서>를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내가복음>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그 때 우리가 가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순간 가짜가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복음, 즉 말씀에 자신을 맞춥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27절에서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기서 <합당하게>란 <적절하게, 상황에 맞게>란 뜻입니다. 즉 복음에 잘 어울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생활하라>는 <폴리튜오>란 동사인데, 이 단어는 폴리테이아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시민 생활>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시민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믿어 천국 시민이 되었으니, 천국 시민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당시 바울은 시민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로마시민권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단계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했는데, 시민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늘같이 보였습니다. 이로 볼 때 바울의 집안은 상당한 가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로마에만 시민권이 있는 게 아니라, 천국에도 시민권이 있습니다. 천국 시민권에 관한 이야기가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미국이나 호주의 시민권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 나라 역사를 배우고, 언어 시험을 거쳐서 합격 여부를 결정합니다. 어려운 병을 앓고 있어도 안 됩니다. 또 나라에 오래 거주해야 합니다. 그 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시민권을 어떻게 얻습니까? 시험을 쳤나요? 돈을 냈나요? 깨끗한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을 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로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로마시민권이 대단했다면 하물며 천국시민권이겠습니까?  천국 시민권을 가진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민권에는 권리와 의무가 동반됩니다. 로마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범법자로서 구타당하지 않을 권리와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로마제국에 대한 본분을 다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국방과 교육과 납세의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들도 가짜가 되지 않으려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진짜 천국 시민답게, 의무를 다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만>과 <또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만 나라가 주는 단물만 빼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리만 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줄곧 국방의무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다만 권리만 누리겠다>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권리만 누리는 게 아니라, 또한 의무까지 충실히 감당하겠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복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또한>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를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권리만 누리면 얌체가 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 얌체가 되면 곤란합니다. 얌체가 되지 말라, 이게 바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짜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다음에 <또한>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 천국 시민답게 사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은 당시에 감옥에 계셨는데, 멀리 있는 빌립보교인들의 좋은 소식을 듣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듣고 싶어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27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이 복음을 위해 협력한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협력한다>는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잘 전해지도록 협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도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도 복음을 전달받아야 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권을 얻었다면, 다른 사람도 천국 시민권을 얻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해야 합니다.그래서 모든 교인들은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도와야 합니다.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달에 방해되는 일은 조금도 해서는 안 됩니다.종종 우리는 복음에 방해되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사업을 하면서 정직하지 못하면 상대방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분쟁하면 주변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다니던 사람도 주저앉게 됩니다. 이게 복음에 방해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이 얼마나 전도에 방해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27절을 다시 보면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마음, 한 뜻이 된 사람들이 다툴 수 있을까요? 다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하나를 이루어 복음을 위해 전진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도, 이견도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두 양보해야 합니다. 별 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교회가 복음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투는 것입니다.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소인국 사람들이 싸우다 많은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란을 먹는데, 뾰족한 부분을 깨서 먹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쪽을 깨서 먹을 것인가를 다투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싸우면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독일 베벤하우젠 근처의 오래된 수도원에 가면 서로 엉켜 있는 두 개의 사슴뿔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두 마리 사슴이 서로 엉켜 죽었을까요? 그것은 두 마리의 사슴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의 뿔 속에 자신의 뿔을 쑤셔 넣음으로써 그만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고 버둥대다가 끝내 둘 다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싸우면 둘 다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라고 합니다. 여러분, 싸우면 우리 영혼도 죽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니, 다른 사람도 죽고, 사단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협력하길 원합니다. 그게 천국시민답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적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28절을 함께 읽읍시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할렐루야!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좀 쉽습니다.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빌립보교인들을 힘들게 했을까요? 우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교도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행위와 출신 등 인간적인 것들을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도덕적 삶을 거부하는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즉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되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빌립보교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겁내지 않고 굳게 서서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당하게 복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하신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추석 명절에 믿지 않는 친척들을 만난 것이 이교도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제사 문제 등으로 갈등할 때 우리는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즐거움에 취해 사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전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아무개도 교회 집사인데, 잘만 마시더라구....그러니 자네도 한 잔 하게>라고 할 때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용기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28절 끝을 보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했는데, 이런 용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용기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편 27편 1절 이하의 말씀인데, 우리 모두 이런 용기를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됩니다.  28절 중간에 보면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란 구절이 나오지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것, 그리고 대적자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바울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고난은 성도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29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어 구원만 받는 게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기뻐하십시오.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기뻐하십시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불편을 경험한다면 기뻐하십시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을 보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7절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천국 시민답게 살길 원합니다. 복음을 위해 협력합시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믿음의 원리를 따라 의연하게 살아갑시다. 그렇게 할 때 더욱 멋진 참 그리스도인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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