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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든지 죽든지 (빌 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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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빌 1:19-26)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신장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장 하나를 이식해야 했습니다. 교인들이 모여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후에 <목사님께 신장 하나를 드리도록 하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누구의 신장을 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앞으로 나와서 새의 깃털 하나를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이 깃털을 날리겠습니다. 이 깃털이 누구에게 가서 앉든지 그 분이 신장을 기증하도록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드디어 장로님이 깃털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 깃털은 하루 종일 누구에게도 내려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깃털이 자신에게 다가오면 <후, 후>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날아가도록 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일이 생길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죽는 것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믿으면 안 되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는 말>과 <장사하는 이들이 밑지고 판다는 말>과 <노인들이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고 노인들에게 <빨리 가시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을까봐 겁을 냅니다. <너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라고 말하면 겁을 냅니다. 죽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건강을 위해 새벽부터 걷고 뛰는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맛있는 삼겹살을 앞에 두고도 젓갈만 들었다 놨다 하면서 <먹으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잘 살게 해 주십시오. 건강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편안히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따져보면 모두 살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이게 죽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주 드물지만, 가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인생이 괴로워서 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질병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기암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고 싶지도 않고, 충분히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강재구 소령을 기억하십니까? 강재구 소령은 1965년 10월 4일,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월남 파병을 앞두고 병사들과 함께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던진 수류탄이 다른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고, 다시 주워 던지기에 늦었다고 판단했을 때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부하들을 구했습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화면의 사진을 몇 장 보시지요. 현재는 사고 현장인 강원도 홍천에 그 분의 기념관이 있고, 육군 박물관 앞에도 동상이 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를 이어 육군 장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강재구 소령은 삶이 괴로워 죽음을 택한 게 아닙니다. 불치병을 앓은 분도 아닙니다. 나이가 많은 노인도 아닙니다. 그 때 나이 28세였습니다. 결혼하여 이제 갓난 아들이 하나 있는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근심이 있는 분도 아닙니다. 꿈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부하들을 위해 자신을 던졌습니다. 숭고한 죽음이지요.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어떠했을까요? 바울 역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출세하고 성공해서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과 유대전통에 충실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에게 배웠습니다. 또 대제사장 그룹과도 줄을 대놓고 있었습니다. 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오는 권한을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아 그 곳까지 가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게 다 오래 오래 살고, 부유하게, 성공해서 살고 싶어서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변했습니다. 조금씩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본문에는 이런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둘 사이에 끼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둘>이란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한다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바울은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첫 번째 변화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1세기 말 안디옥 교회의 <이그나티우스>목사님은 순교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죽기를 원한 것이지요. 그 분이 붙들려서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에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거기 보면 순교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4.1 / 나는 누가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한다는 것을 많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통하여 알렸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나를 위한 적절치 않은 친절은 베풀지 마십시오. 맹수들에게 나를 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밀로서 맹수들의 이빨 사이에서 부셔 뜨려짐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순수한 빵이 되는 것입니다.  5.3 / 나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무엇이 내게 유익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막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제발 그리스도께 나가는 나의 길을 가로막는 아무런 장애물도 나타나지 않게 하소서.  무엇이든 오라.  불도, 십자가도, 맹수와의 싸움도, 온 몸이 부서지는 것도, 사지를 난도질하는 것도, 악마의 잔인한 고문도 오라.  단지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을 구명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 두어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 생활을 깊이 하는 분들이 왜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일까요? 

첫째는 세상의 무상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그나티우스도 세상에 대한 실망을 언급합니다. <7.3 / 나는 이 세상의 오염된 음식물과 추한 것들에게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떡입니다. 또 나는 그 분의 피를 마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불멸의 사랑을 담고 있는 축제의 음료입니다. 8.1 / 나는 더 이상 인간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도 그러한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 실망스럽고 허무합니다. 세상의 허무함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70세만 되면 외모도, 지식도 모두 평준화된다고 합니다.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천국의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허무함에 비하여 천국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을 보면 천국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은 이 세상과는 다릅니다. 세상에는 눈물이 많지만, 그 곳에서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 곳에는 아픔도, 죽음도 없습니다. 상처받는 일도 없습니다. 가난도 질고도 없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이 계신 우리의 고향입니다. 추석 명절을 맞아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습니다만, 우리도 장차 천국이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곳은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바울도 천국이 주님과 함께 하는 좋은 곳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보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깊은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믿음의 준비가 잘 된 분들, 깊이 신앙생활 하신 분들이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맛보면 세상의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님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분입니다. 

앞에서 강재구 소령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 분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단순히 부하에 대한 사랑이나 지휘관의 책임감 때문일까요? 그 배후에는 깊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화면의 사진을 보세요. 그 분이 소장하고 있던 요한복음 15장 13절을 말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그는 죽음 이후의 천국을 알았기에, 주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마지막에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길 원합니다. 허무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길 원합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길 원합니다. 

게다가 이런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얻는 유익이 또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그 많은 문제들이 왜 생깁니까? 그 모든 문제들은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깁니다.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습니다.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면서 사느니 죽는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입니다. 더 잘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더 성공하기 위해 탐욕을 품고, 남을 밟고 올라섭니다. 모든 문제는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탐욕, 욕망, 시기, 질투, 전쟁 등, 모든 문제들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다투는 것은 아직 살고 싶은 욕망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고 초연한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욕망을 죽이고, 자신을 부인하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아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사랑한 나머지 모두 다 죽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누가 봉사하고 전도하는가?> 이런 혼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천국만 바라보면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무책임해지기 쉽습니다. 일부 이단들이 그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곧 주님이 오실 텐데, 곧 천국에 갈 텐데, 직장과 학교에 다니면 뭐하나? 다 중단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사람들이 죽든지 말든지 산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된다고 해서 세상에 무책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무책임한 것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난 천국이 좋아. 난 산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잘 있어라> 이러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다시 한번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본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고백합니다. 즉 그는 <어서 빨리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지만, 주님께서 더 살다가 오라고 하시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22절을 보세요.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라고 합니다. <육신으로 산다>는 것은 죽지 않고 세상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상에 사는 것이 열매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오래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오래 살면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돌봄으로써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25절을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살면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돌보고 복음을 전하다가 오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또 한 번 변신하고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어서 빨리 주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고 싶지만, 살아서 할 일이 있다면 더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성도들을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더 살면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시면 살겠습니다. 그만 살고 오라고 부르시면 기쁨으로 가겠습니다>. 그는 이제 살고 죽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살라고 하셔도 감사하고 그만 살고 오라고 하셔도 감사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살라 하시면 살고, 죽으라 하시면 죽을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살고 죽는 문제까지 맡길 수 있을까요? 

첫째는 안 맡긴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지금 오라고 하시지만, 저 10년만 더 있다 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라고 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맡겨야 합니다. 그게 옳은 것이요, 편한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에 의해 정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목적을 위해 살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까? 20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존재 목적이었습니다. 

여기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때 <내 몸에서>란 <내 몸을 사용해서>란 말도 되고, <내 몸으로 있는 동안에, 즉 살아 있는 동안에>란 뜻도 되고, <내 전 존재를 바쳐서>란 의미도 됩니다. 즉 그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그 몸을 통해 주님을 존귀하게 하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살아서 주님을 존귀하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살기로 했습니다. 비록 당시에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었지만, 주님의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옥생활도 견디어 내기로 한 것입니다. 또 죽어서 주님이 존귀하게 되신다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삶에도 긍지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삶을 살면서도 <이것이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이게 성도의 숭고한 삶인 것입니다. 

엊그제 염 집사님댁을 방문했습니다. 집사님은 90세가 다 되어 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계십니다. 집사님도 정말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집사님이 병자가 병자를 돌보는 그 힘든 삶을 통해서, 그 효도의 모범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 삶 자체가 멋진 것입니다. 임 권사님도 양 장로님을 수 년째 수발 들고 있습니다 힘든 삶입니다. 그러나 그 삶으로 남편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암으로 고생하면서도 기쁨으로 살면서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면, 그 분은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분입니다. 그러다 갈 날이 오면 훨훨 날아가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고생하는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그 어려운 교회 강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존귀한 것이고,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힘들게 사는 분들을 보면서 <저렇게 고생하느니 차라리 죽지?>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 분은 그 힘든 삶을 지킴으로써 주님의 사람답게 승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그 삶을 통해 주님을 높이는 장엄한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숭고한 삶을 사는 중입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그 힘든 삶을 통해서라도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하십니까? 편하지만, 주님께 영광되지 못한다면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갓 인수를 받은 젊은 목사님이 어떤 교회로 부임했습니다. 신임 목사님을 환영하는 만찬이 열렸습니다. 한 부인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수백 명이나 되는 교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힘드시겠어요..>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수백 명의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단 한 분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그 분이 기쁘시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잘될 것입니다.> 그 한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기쁨이 된다면, 사는 것도 복이요, 죽는 것도 복입니다.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해 잘 사십시오. 그리고 부르시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고향인 천국으로 가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부를 찬송은 이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주님께 기쁨되는 삶, 그것만이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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