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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언제 (말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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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제 (말 1:6-14)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할머니인 코리텐 붐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소련의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려고 하는데. 예배당 문을 걷어차면서 두 명의 소련 군인이 들어 닥쳤습니다. 기관단총의 총 뿌리를 겨누어 흔드는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5분간의 시간을 준다. 예수를 버리고 살 사람은 5분 내로 예배당 밖으로 나가라. 예배당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5분 후에는 모두 죽음을 맛볼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이 무서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의 믿음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견디고 있는 순간,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시계를 바라보고 서 있던 군인들은, 
“마지막 50초다. 또 나갈 사람은 없느냐?”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남아 있는 성도들의 얼굴은 모두 거룩한 표정으로. 자기들의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군인들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총을 땅에다 내려놓은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두 사람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크리스천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주님께 함께 경배를 드리실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우리가 다시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배하며 진리 되시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제사장들이라면 당연히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위해서 백성들이 가져온 소나 양 염소와 비둘기 같은 제물을 하나님 앞에 불태워 드리는 귀한 직책을 맡아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레위 지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론의 후손들에게 이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당연히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귀한 이름으로 알아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버지요 동시에 주인이 아니냐 그런데 아버지로서 나를 공경하고 있느냐? 주인으로서 나를 공경하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처음부터 자녀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 주셨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성령님의 깨우치심을 따라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내가 한 일은 오직 하나 믿은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가 나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셔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게 만드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죠. 있다면 오직 감사할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태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정말 고마운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그래서 기뻐하십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저런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투덜거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투덜거린다고 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선은 투덜거리는 내 마음부터 기쁨이 없고요 그러다 보니 몸도 마음도 다 편치를 않습니다. 투덜거린다고 해서 일이 더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신경질만 더 생기고 신경질을 부리다보니 일은 더 엉망이 되고 그래서 더 짜증이 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다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아버지는 마음은 간절해도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가진 돈이 많지를 않아서 마음껏 가르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또 머리가 나쁘다고 할 때 그걸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자식이 아프다든가 어떤 장애가 있다고 할 때 돈 가지고도 그것을 고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으로 충만합니다.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명철로 가득하신 분입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데 고치지 못할 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면 우리에게 주시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시며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과연 그런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죽으셨습니까? 아니면 잠시 놀러라도 가셨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했고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셨으며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아울러 그분이 우리의 주인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우리는 기대해야 되고 그렇게 간구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기대하며 간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이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지를 항상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물으십시오. “하나님 이 일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묻고 또 물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책망에 대한 제사장들의 항변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 제사장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고 반발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선포합니다. “너희 죄가 다 용서 받았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용서와 축복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감사와 찬양이 그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흠 없는 제물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도록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런데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면서도 내게 잘못한 사람을 중심으로부터 용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심지어는 나를 욕보이고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들에 대해 나는 어떠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다 용서했다고 하지만 과연 진짜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있습니까? 참된 용서는 기억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아마득하게 과연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흔적조차도 다 지워질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옛날 저 사람이 그랬지 하는 마음을 아직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면 과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또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되고 있는지요? 우리의 몸과 마음은커녕 우리가 지닌 재물조차도 온전한 예물로 주 앞에 드리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들은 아닙니까? 

우리가 먹어 없애버리는 과인 하나를 고르는데도 흠 없는 것을 고르지 않습니까? 아니 손님을 대접한다고 하면서 흠 있는 과일을 내놓는 분이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끼리 먹을 때는 흠 있는 것을 도려내가면서 먹을지언정 손님이나 어른에게는 온전한 것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온전한 섬김의 자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는 어떻습니까? 
“내가 얼마나 주를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고백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내게 보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과연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얼마 전 제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옆 자리에 아주 성품도 온화하고 신실해 보이는 집사님 한분이 입원해 계셨습니다.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예배 전 저녁 식사 시간에 잠시 병원에 들렀다 나오는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저녁 탁구를 봐야지” 저는 운동경기인 탁구 시합이 있어서 중계방송을 하는가보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더라고요. 뭐 제빵왕 김탁구라나요 하는 수목 드라마에 쏙 빠져서 그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때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과연 이만만한 열정으로 예배시간을 기다리고 있는가? 정말 예배 시간을 간절히 기다릴 정도로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가? 아니 나는 과연 예배를 기뻐드리는 사람인가 할 때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가 아닌 인도하는 사람으로서만 예배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님 정말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데 과연 나는 그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기뻐합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시간 시간 예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도 기대가 되어야 하고요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러한 예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조차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항상 내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귀담아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귀한 것은 우리 몸이 거룩한 산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처럼 그렇게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것을 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단 하나를 하더라도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머니께 생굴을 드리니 아주 맛있게 잡수십니다. “아니 어머니 예전엔 생굴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잖아요?” 했더니 사실은 좋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님이나 저희들이 좋아하니까 생활이 넉넉지 못해서 모두가 다 만족하게 먹을 만큼은 안 되니까 아버님이나 저희 자식들에게만 주고 어머니는 굴을 잡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 자신은 나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남편과 자식들을 먼저 챙겨주시던 그 마음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바로 이래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예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이렇듯 우리가 먼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쁨으로 예물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과부의 드린 두 렙돈 겨우 돈 천원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예물을 부자가 드린 많은 액수의 예물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하며 칭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건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가 아닌 간절할 마음으로 그렇게 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말로는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그게 단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이제는 우리의 마음가짐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그건 바로 지금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투부터 바꿔야 합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가 아닌 “하나님 나 이거 정말 갖고 싶습니다. 이거 정말 하고 싶습니다. 정말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하나님 앞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지 마세요. 확실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진 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예배도 아주 즐거워질 것입니다.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다면 예배 시간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음식도요 맛있게 먹어줄 때 만드는 사람도 신이 나는 것입니다. 기껏 대접한다고 했더니 그냥 시큰둥하면 다음에 또 대접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아주 맛나게 먹어주고 기쁘게 먹어주고 다 먹고 난 다음에는 정말 잘 먹었다 아주 고맙다고 해 보세요. 그러면 대접한 사람도 마음이 좋고 다음에 또 기회를 만들어야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켜보는 분이 짜증나게 예배하지 마십시오. 이왕이면 마음이 와 닿도록 그렇게 예배하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이 거기에 양념을 아끼겠습니까? 다른 거는 몰라도 양념은 아끼지 않고 넣어야 그 음식이 제 맛을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끔은 별미처럼 먹는 라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라면을 잘 끓였습니다. 뭐 요즈음에는 끓이는 것보다는 그저 더운 물만 넣고 기다리면 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만 얼마 전 컵라면을 하나 먹으려고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기다려 먹으려고 보니까 그냥 아주 하얀 색깔인데 순간적으로 아 요즘에는 이렇게 하얀 라면도 나오는가 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어보니 아무 맛도 없어요. 아니 이게 왜 이래 하고 보니까 아니 글쎄 스프를 넣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하도 비싸서 금치라고 한다고 하지만 김치를 담글 때도 결코 아끼지 말아야 될 양념이 있습니다. 물론 지나쳐도 안 되지만 반드시 적당량이 들어가야 제 맛을 냅니다. 바로 소금입니다. 그래서 소금으로 골고루 함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가 이래야 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왕 예배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 예배 시간 잘라내지 마십시오. 뭐 생선 토막 내듯이 뭐 한다고 늦고 뭐 한다고 미리 나가고 그러면 그거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또 예배한다고 앉아있기는 한데 마음으로는 온 천지를 다 유람하고 있다면 그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참 잘 했다 고맙다 수고했다 그러시겠습니까? 요즘 아이들 게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냥 거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그러면서도 아 그래도 나는 이 자리에 나와 있으니 나오지 않은 사람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냐고 하겠습니까? 물론 나오지 않은 사람보다는 백 번 천 번 낫습니다. 하지만 이왕 할 거라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왕 먹을 것이라면 그저 젓가락만 들고 깨작깨작하지 말고 맛나게 먹자고요. 같은 일을 해도 입을 댓자나 내밀고 하지 말고 나중에 뭐라고 할망정 즐겁게 하자고요. 하나님이 흠 없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흠 없는 것으로 드리려고 그리고 먼저 내게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하자고요. 

십자가 목걸이를 옷 밖으로 길게 늘어뜨린, 시집간 지 얼마 안 되는 새색시 같은 사람이 물건을 삽니다. 
“할머니 너무 비싸요. 깎아주세요”
“색시 이건 깊은 산에만 나는 나물이야. 이걸 캐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우. 품 판 걸 생각하면 이것도 싼 거야.”
“그럼 그만 두세요. 뭐 나물이 여기밖에 없나요. 보세요. 쎈 게 나물인데…”
결국 그 여인은  돈 백 원을 깎고는 좋아하며 물건을 삽니다. 

그런데 리어카에 사과를 가득 담은 상인 앞에서 중년을 넘은 듯 한 한 아주머니가 사과를 고르는데, 가장 작은 거나 흠이  많아 다른 손님들이 골라가지 않은 것들만 고릅니다. 상인은 좀 어안이 벙벙해져 아주머니를 쳐다보고 있는데, 다 고른 아주머니는 이번에는 자신이 고른 사과 중 제일 잘 생긴 것을 꺼내 상인에게 내밉니다.
“아저씨, 사과가 이렇게 많지만 제가 드리는 사과는 더 맛있을 거예요. 이거 하나 드세요”
“아 아니,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황한 사과 장수에게 사과와 함께 뭔가를 건네주곤 아주머니는 저쪽으로 갔고, 건네준 것을 보니 전도지였습니다. 사과와 전도지를 받은 사과 장수는 몇 분 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서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목에 건 여인과 전도지를 건네 준 여인을 볼 때 바리새인과 선한 사마리아인을 동시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이제 나는 사과를 샀던 그 아주머니와 같이 복음을 생활 속에서 실현하고, 언행 가운데  나타내며, 내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훈계하셔서 참된 제자와 참된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은밀히 생활 가운데 얻어지는 놀라운 산 교훈에 감사드리며 그 아주머니처럼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말 떳떳합니까? 정말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에 꼭 등장하는 노래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으레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스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선입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스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신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렇다면 이 이방 민족이 바로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더 크고 존귀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안 된다고만 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네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십니다. 그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온전한 예물을 드리며 온전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길을 이끌어 가시는지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확신하는 믿음에 뿌리를 박고 날마다 믿음으로 행하는 우리들 가운데 조금도 빈틈이 없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하심이 날마다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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