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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돌아가는 삶(2) (룻 1:6-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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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는 삶(2) (룻 1:6-7,2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냉장고 하나를 살 때는 최하 10년을 생각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또는 영원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할 때도 선택이 중요합니다. 잘 선택하면 평생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순간 선택을 잘못 하였을 경우 평생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결혼한다면 또 다시 결혼하겠느냐고 물으면 다시 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어떤 아내는 그래도 또 현재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정말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왜 또 결혼하겠다고 그러느냐”고 물으니 “남자는 다 그놈이 그놈이지, 그래도 길들여진 놈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에 엘리멜렉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결과 모압에 가서 다 잃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을 떠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인생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실패합니다.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말씀 주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의 결과”였고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길이 아님을 알았으면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선택입니다. 오늘은 다시 돌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나오미의 생각들 

여기 나오는 나오미는 마침내 다 잃었습니다. 남편도 두 아들도 순식간에 잃었습니다. 기막힌 현실입니다. 그렇게 다 잃고 나서 나오미는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졸지에 남편을 잃고 또 두 아들까지 잃고 이제는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타향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왜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나오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내가 왜 베들레헴을 떠나왔던가, 베들레헴을 떠나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라는 질문이 머리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생각하니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잘잘못을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아 살아가게 하십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희락,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남편을 따라 모압에 가서 이 희락의 여인은 슬픈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 사람들에게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 즉 “나는 슬픈 여자”라는 뜻입니다.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세 남자를 잃었습니다.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고통과 고독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로 하여금 철두철미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혹 치시려면 엘리멜렉이나 치시지 왜 두 아들까지 죽게 하셨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생각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곳 모압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 곳이 못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남편만 죽었어보십시오. 두 아들과 함께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갔겠습니까. 그들은 아예 모압에서 정착하려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을 현지 여인을 얻어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까지 모두 치시니까 나오미가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생각한 결과 “여기에 오는 것이 아니었어.” “여기는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어.” 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오미가 다 잃고 나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는 말은 원위치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돌아가자 

그래서 때로 실패가 좋은 은혜일 수가 있습니다. 실패는 전환의 지점입니다.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불행같이 생각되지만 길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패가 또 다른 길을 만들고 환경을 만들고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오미는 실패의 자리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생각한 결과 나오미는 새 길을 찾기로 작정합니다. 그 새 길은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예부터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고 갔다 해도 빨리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빨리 돌아갈수록 덜 힘듭니다. 나오미는 다시 돌아가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이점에서 나오미는 칭찬받아야 할 여인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을 때 나오미는 과감하게 유턴을 결정하였습니다. 길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일찍 돌아갈수록 회복이 빠릅니다. 우기거나 머뭇거리면 더 수렁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빨리 유턴할수록 회복이 빨라집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늦게 맞으면 남들이 맞는 매를 다 보며 간접 아픔을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찍 맞으면 한결 짐이 가벼워집니다. 

엊그제 가족 모두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습니다. 어린 손녀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안심시키려고 제가 먼저 맞으려고 하니까 자기가 먼저 맞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지혜로운 생각입니다. 맞기 싫다고 맨 나중까지 기다리다 보면 남들 맞는 아픈 모습을 다 보고 자기도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 말에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재빨리 가던 길을 수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긍휼의 마음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도 큰 복입니다. 그 순간 탕자는 이미 회복된 것입니다. 집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목이라도 맸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사람들이 이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목을 매는 사람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이고 저주입니다. 나오미는 이제라도 잘못했으니 돌아가자고 결심합니다. 그것 자체가 복입니다. 


장애물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큰 장애물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체면이고 자존심입니다. 돌아가 무슨 낫으로 고향 사람들을 볼까,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고향은 참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고향도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만 가는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은 실패한 사람은 갈 곳이 못됩니다. 그것이 자존심과 체면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막상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단은 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부끄럽지만 나오미는 돌아가려고 결단하였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돌아가면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이사야 55장6-7절을 보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결단력이 필요했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탕자는 그것조차도 극복하였습니다. 나오미도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모두 지혜로운 결단입니다. 이 결단에는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옛날 유교사상이 깊을 때 집안 어른들께서 유교에 깊이 빠져 생활하였습니다. 그때 아낙내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아주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가는 아낙네들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당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예수교가 참 좋구나.”하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가라, 나는 못 나간다.”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 때문에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그동안 큰소리 친 것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가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용기도 용단도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시련 

여기서 한 가지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나오미 가정은 갈렙의 후손들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위해서 중심 있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공헌도 했고 역할도 했고 수고도 많이 했습니다. 그 후손이 엘리멜렉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혹 그들이 잘못 생각해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에 갔다 해도 그곳에서 사는 동안 그 땅에서 복을 주시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살면서 모압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며 살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일부러 믿지 않는 세상에 선교사도 보내는데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의 자기 합리화의 생각입니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할 때 그렇게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서 모두가 갖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전도하면 되지 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또 복권을 살 때 그 복권을 사는 것은 별로 합당한 생각이 아닌 줄 알면서도 사게 됩니다. 그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만일 이 복권이 당첨되면 11조를 드리면 되지 않는가, 망일 당첨되게 하신다면 12조라도 드리겠다.”는 생각입니다. 모두 자기 합리화이고 자기변명입니다. “엘리멜렉이 잘못 판단해서 모압으로 이사 갔어도 그 땅에 사는 동안 전도하고 하나님을 전하고 살면 좋지 않으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합리화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던 사람에게도 연단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용도로 고난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길이 아닌데도 자꾸만 가고 있습니다. 빨리 돌아와야 하는데 자꾸만 더 멀리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환경으로, 사람들을 보내, 때로는 꿈으로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암시를 주었는데도 자꾸만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길을 그냥 가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복입니까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아픔을 주며 길을 막는 것이 복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가면 안 되는 길을 갈 때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과정에서 환란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탕자의 경우를 보십시오. 집을 나가서 계속 형통하게 하셨더라면 탕자는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탕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로 그가 가게 된 것은 그 돼지우리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신 곳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때로 재앙이, 환란이, 아픔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고난도 시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시련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잘못된 생각과 욕심과 욕망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십니다. 그렇다면 때로 시련이나 고난이나 아픔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환란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란 이후에 돌아오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에게 그런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 후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모압에 가서 그 가족이 고난 없이 잘 살았다면 그 집은 그 후에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들은 그 땅에서 잘 살고 오래 살았을 것인데 그러면 나오미 가정도 모압 사람들처럼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과연 무엇이 복입니까. 평안한 것이 복입니까 때로는 아픔과 환란이 복입니까. 하나님은 왜 나오미 가정에 이렇게 혹독한 환란을 주신 것입니까. 그 가정에 그런 아픔과 어려움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오미는 결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나오미가 다 잃었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잃었습니다. 남편도 두 아들도 다 잃었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철두철미하게 나오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박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나오미가 10년 만에 다 잃고 난후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가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나오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빼앗으셨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박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가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 지점이 회복의 지점입니다. 돌아가면 다 회복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다 회복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 실패도, 아픔도, 상실도 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메시지 

여기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태어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숨 쉬는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은 가나안땅입니다. 다윗이 그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예수께서 태어나리라고 예언된 곳이고 또 후에 예수께서 그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곳은 나오미가 떠나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떠나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의 품인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불행스런 일이지만 그런데 나오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고 모압을 떠난 떠남은 축복의 떠남입니다. 회복의 떠남입니다. 

떠남도 다 같은 떠남이 아닙니다. 탕자가 집을 떠난 떠남은 불행한 떠남이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돼지우리를 떠난 떠남은 복된 떠남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회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나오미는 원래 그 자리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오미는 순간 현실을 너무 생각하다가 하나님 품까지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때로 현실이 눈을 어둡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을 그르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폐일언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사울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고 아합이 그랬고 엘리멜렉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리브가가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엘리사가 그랬고 제자들이 그랬고 나오미가 그랬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나오미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가다가(룻기1장6절) ..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기1장22절). 하나님을 위해 떠난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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